제12화 유하준의 병이 도지다
- 오후에는 합반 수업 말고는 수업이 없었기에 허다은은 수업이 끝난 후 바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 지금은 지낼 집이 있지만 그녀에게 남은 돈은 그리 많지 않았고 허 씨 가문은 그녀가 굶어 죽지 않게 음식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교문을 나선 허다은은 버스를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켜서 할 만한 아르바이트가 있는지 어플을 보려고 했다.
- 하지만 휴대폰을 켜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건 시티폰이었기에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인터넷을 할 수가 없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차 안을 쳐다봤고 뒷좌석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그윽하고 또렷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 표정은 예전과 다름없이 차갑고 담담했고 속세에 물들지 않은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 유하준은 허다은을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 “타.”
- 그의 말에 허다은은 잠깐 멍해 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네?”
- 그러자 유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 “치마에 피 묻었어.”
- 그 말에 허다은은 순간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뒤돌아봤다. 역시 파란 치마 뒤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 9월이었지만 여전히 무더운 날씨였기에 그녀는 겉옷을 걸치고 나오지 않았다.
- 허다은은 부끄러운 듯 한 손으로 치마 위 자국을 가렸다. 하필이면 이 모습을 유하준이 보다니, 그녀는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 “빨리 타!”
- 유하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 그때 운전석의 문이 열리면서 운전기사 안정원이 내렸고 부드러운 미소로 뒷좌석의 문을 열면서 타라고 손짓했다.
- 허다은은 고민하다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난감해하며 차에 올라탔다.
-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시트를 더럽힐까 봐 바로 앉을 수도 없었다. 허다은은 결국 가여운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반쯤 웅크리고 앉았다.
- 안정원은 차 문을 닫은 후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허다은에게 물었다.
- “다은아, 집 주소 좀 알려줄래?”
- “군대 아파트 단지요. 성북로 쪽에 있어요.”
- 허다은은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민망해서 손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 그녀의 말에 유하준은 자기 머리 하나만큼이나 작은 허다은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 “그렇게 쪼그리고 있으면 안 불편해?”
- “괜찮아요…”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다은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차 천정에 머리를 부딪혔고 너무 아팠지만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 이 상황이 너무 창피했던 그녀는 약간 슬프기까지 했고 고개를 더 깊게 파묻은 채 숨소리마저 크게 내지 못했다.
- 유하준은 얇은 입술을 오므린 채 그녀를 힐끗 보더니 정장 외투를 벗어 한쪽 좌석에 던지며 말했다.
- “이거 깔고 앉아.”
- 그의 말에 허다은은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속눈썹은 작은 부채처럼 떨렸다.
- 이 정장, 보기만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지금 밥 먹을 돈도 부족한 상황에 이런 값비싼 정장을 깔고 앉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배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때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듯 유하준은 눈썹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 “내가 학생 돈 뜯어먹을 것처럼 보여?”
- 하긴…
- 허다은은 감사 인사를 한 후 조심스럽게 일어나 그 자리에 앉았다.
- 차는 도로 위를 질주했고 허다은은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계속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 반짝거리는 창문 위로 유하준의 옆모습이 비쳤고 그 모습은 아름답고 깨끗하면서도 남자의 성숙미가 느껴졌다.
- 이렇게 멋진 사람이 2년 후에 죽는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 차는 빠르게 길목에서 멈춰 섰고 허다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안정원도 차에서 내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 안정원은 잠깐 머뭇거리다 물었다.
- “다은아, 계속 여기서 살았니? 혹시 여진경이라는 어르신 알아?”
- 그 이름에 허다은은 궁금한 듯 고개를 들며 물었다.
- “저희 할머니를 아세요?”
- “너희 할머니셔? 지금 어디에 계셔?”
- 안정원의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이 배어 있었다.
- 그의 물음에 허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약간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 “저희 할머니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 이 소식이 믿기지 않은 듯 안정원의 얼굴에는 한참이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우리가 한발 늦었구나. 그래, 어서 가봐.”
- 허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돌렸고 마음 한편에는 혹시 유하준의 병 때문에 할머니를 찾는 게 아닌지 하는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 전생에 할머니를 찾지 못해 치료 방법이 없어 유하준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차 안에서 안정원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 “대표님, 괜찮으세요? 약 어디에 있어요?”
- 안정원은 황급히 차 안의 수납함을 뒤졌다. 분명 비상약을 여기에 뒀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 허다은은 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달려와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유하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손등에는 새파란 핏줄이 툭 불거졌다.
- 유하준의 병이 도진 모양이다.
- 허다은은 이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무의식적으로 그의 맥을 짚었다.
- 몇 초 후 허다은은 유하준의 몸 상태를 대충 알아챈 듯 입술을 오므렸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는 후박나무, 복령, 디아제팜 등의 약재 냄새가 났다.
- 그리고 이것들은 전부 다… 불면증이 심하고 쇠약한 정신을 치료하는 한약들이었다. 특히 디아제팜을 복용한다는 건 상태가 이미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오랜 시간 수면 장애를 겪으면 난폭해지고 신경이 피로해지기 때문에 그냥 단순 불면증으로 치료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만 점점 더 심각해질 뿐이다.
- 그때 유하준이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눈꼬리는 시뻘겠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돌려 어두운 낯빛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 “저리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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