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죽어도 그들 뜻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 허영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 “다은아, 지금은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야. 허 씨 가문에서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그래? 게다가 여자애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 그 불편한 주제는 피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동문서답이었다. 하지만 허영인의 답이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이에 허다은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 “그건 허 씨 가문 둘째 도련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난 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 극단적인 선택 같은 것도 하지 않을게.”
- 비록 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허다은은 여전히 조금은 속이 상했다.
- 하지만 이제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 그녀는 허영인을 지나쳐 허 씨 가문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 군인 아파트 단지 내에는 낡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비록 리모델링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그 건물이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었다.
- 허 씨 가문에 막 돌아왔을 때, 허 씨 집안에 잘 섞이지 못했던 허다은은 어려서부터 바로 이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었다.
- 10살에서 16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 기억 속 익숙한 건물을 바라보던 허다은은 눈시울을 붉히며 계속해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허다은이 기억하기로는 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도둑을 잡다가 돌아가신 대단한 영웅이라고 했다.
- 그녀의 할머니인 여진경은 예전에는 그녀의 할아버지를 따라 입대해 군의관으로 지냈었고, 할아버지를 따라 전역한 뒤로는 단지 옆에 작은 진료소를 하나 차려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었는데 그녀의 의술은 바로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 셋째 오빠인 허영근은 몸이 약했고, 당시 그녀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의술을 배웠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허영근을 위해서였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노력은 허영근에게는 허유라의 몇 마디 걱정의 말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 또한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허영규가 찾아온 횟수는 일 년에 고작 몇 번이었고, 기껏해야 명절 때나 몇 번 그녀들을 보러 오곤 했었다.
- 하지만 할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인 허영규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두 모자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였고, 심지어 어떤 날에는 빗자루를 들고 허영규를 쫓아낸 적도 있었다.
- 반복되는 마찰에 아무리 성격이 좋은 허영규라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더는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았고 이에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예금통장 하나와 함께 이 집을 허다은에게 남기고 간 것이었다.
- 그것들은 할머니가 평생 동안 모은 전부였기에 허다은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이 집을 건드린 적도, 차마 그 돈을 쓴 적도 없었다.
- 집은 3동 2층에 있었다.
- 허다은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 앤티크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방 두 개짜리 집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 다만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터라 창문에는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었고, 장롱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 이에 허다은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온 집 안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 청소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집은 한결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허다은은 지갑 깊숙한 곳에서 돈을 한 뭉치 꺼냈다.
- 그것은 그녀가 일 년간 모은 돈이었다.
- 원래는 다음 달 허유라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이었지만 마침 급한 김에 꺼내 쓸 수 있을 듯했다.
- 그 지폐뭉치 사이에는 천 원짜리도 있었고 오천 원짜리도 있었다. 가장 액수가 큰 것이라고 해봤자 만 원권이었지만 꺼내 세어보니 총 6만 2천 원이었다. 한동안 쓰기에는 충분했다.
- 이에 허다은은 단지 어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소면 한 봉지와 계란 조금, 그리고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샀다.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 한 그릇은 비록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다른 조미료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지만, 허다은은 그 국수가 유달리 맛있게 느껴졌다.
- 이제 더는 허 씨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식모처럼 그들의 음식 시중을 들 필요도 없었고 더는 그들의 모진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으며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내려놓은 뒤에야 허다은은 비로소 그런 삶이 얼마나 편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 그렇게 늦은 밤 한창 잠에 취해있는데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에 허다은은 눈을 비비며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들고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 ‘미친 거 아니야? 이 늦은 시간에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는 게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 허다은은 짜증스럽게 거절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한쪽에 던져놓았다.
- 하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기가 무섭게 다시 울려대기 시작한 휴대폰에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통화버튼을 눌렀다.
- 수화기 너머에서 소경운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다은, 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야? 감히 내 전화를 끊어?”
- 허다은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휴대폰을 얼굴에서 조금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에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 “소경운, 너 씨발 미친 거 아니야? 한밤중에 웬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끊어.”
- 그 말에 허다은은 수화기 너머로도 소경운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신 씩씩거리며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 “허다은, 너 내일 학교로 돌아가면 네가 먼저 교수님한테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기회를 유라한테 넘길 거니까.”
- 그는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 어두워진 화면을 바라보던 허다은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하던 정신이 순간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 소경운이 특별히 전화까지 걸어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이지 그 일에 대해서 아예 잊고 있을 뻔했다.
- 하지만 그토록 그 기회가 갖고 싶어 하다 못해 자신을 핍박하는 상황에, 허다은은 죽어도 그들의 뜻대로는 해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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