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어
- 허영규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허다은, 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냐?!”
- 이에 허다은은 순간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제 태도가 어때서요, 회장님?”
- 그러자 박주희가 표정을 구기며 곧바로 맞받아쳤다.
- “다은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 셋째 오빠인 허영근이 조롱하듯 말했다.
- “왜? 허다은 너 또 심술부리는 거야? 오냐오냐 해주니까 나쁜 버릇만 잔뜩 들어서는, 이제 엄마고 아빠고 없다 이거냐? 허 씨 가문을 떠나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 “네네, 다 맞는 말씀이에요.”
- 허다은은 다시 자리에 누우며 그들을 병실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 “더 할 말 없으시면 문 닫고 나가주시죠. 제가 좀 쉬어야 해서요. 멀리는 안 나가요.”
- 허유라를 감싸며 도망치느라 양아치들에게 맞아 더 심하게 다친 그녀는 현재까지도 병원에 누워있는데 허 씨 집안 사람들은 멀쩡하게 잘만 걸어 다니는 허유라를 위해 그녀에게 찾아와 따지고 있었다.
- 모든 상황들이 지난 삶에서 벌어졌던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 아직 퇴원도 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피치 대회 참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 허다은은 추악한 그 면상들을 조금이라도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들이 빨리 꺼져주기를 바랐다.
-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허영준은 아예 대놓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 “허다은, 머리가 맞아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하는 거야? 우리를 내쫓다니, 네가 뭔데 우리더러 가라 마라야?”
- 이에 허다은은 그들을 등지고 돌아누우며 더 이상 그들과 말을 섞기를 거부했다.
- ‘이번 생엔 허유라가 갖고 싶다던 그 기회, 개나 주라 그래!’
- 허유라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고 허다은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가볍게 훑었다.
- 그녀의 눈빛에 순간 의심과 알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네, 허다은.’
- 허 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미동도 없는 허다은을 향해 몇 마디 독설들을 쏟아내고는 떠나갔다.
- 굉음과 함께 문이 세차게 닫히며 그 여파로 인해 문가의 벽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 허 씨 집안사람들의 분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문이 닫힘과 동시에 허다은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녀는 현재 굉장히 담담한 상태였다.
- 가족들에게서 따듯한 대우를 바라지 않고, 더 이상 호구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속 시원한 일이었다.
- 지난 생에서의 그녀는 너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이 충분히 철이 들고, 충분히 뛰어나기만 하다면 이 집안에 녹아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 그녀는 이미 허 씨 집안 사람들에게 자신은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이왕 다시 한번 살 수 있게 된 김에, 그녀는 그럴듯하게 살고 싶었다.
- 예전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 그때 다시금 열린 문에 허다은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시 돌아온 허영인이었다.
- 그가 침대 앞으로 다가와 허다은을 향해 말했다.
- “너무 고집부리지 마, 다은아. 부모님한테 잘못했다고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 유라한테 사과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넌 여전히 착한 애고, 부모님도 절대 널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 하지만 허영인의 말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다은은 그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허영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럼 쉬어. 난 이만 갈게.”
- 이내 문이 다시 닫히자 한참을 실랑이하느라 목이 말랐던 허다은은 물을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병원 복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때는 병원이 아직 진찰 병동과 입원 병동이 나뉘어 있지 않을 때라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한 병실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입원해 있는 것도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 허다은은 구석에 놓인 정수기에서 찬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 빈 잔에 다시 따뜻한 물을 조금 담아 들고 돌아서던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뚜렷한 이목구비의 그 남자는 깔끔한 셔츠차림에 옷소매를 대충 접어 올려 하얗고 늘씬한 손목을 드러내놓고 있었는데, 휠체어에 앉아있어도 그 차갑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감추어지지 않았다.
- “하… 하준 오빠.”
- 허다은은 머뭇머뭇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허다은의 목소리를 들은 유하준이 새까만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음?”
- “저는… 저는 허다은이라고 해요. 전에 소 씨 가문 저택에서 오빠를 본 적이 있어요.”
- 유하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위압감을 느낀 허다은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허다은은 그를 두 번 정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소경운의 배다른 형이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일단 소경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든 다 꽤나 신경을 썼었다.
- 듣기로는 유하준은 어렸을 때부터 고질병을 앓고 있긴 했지만, 사업을 함에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했었다.
- 소 씨 가문의 명맥이 그의 수중에 있다 보니 소 씨 가문에서도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잡고 있는 인물인 그는 비록 소 씨 가문의 장자이기는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 씨는 아니었다.
-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2년 뒤면 유하준은 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허다은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에 유하준의 완벽에 가까운 옆모습을 다시 한번 눈에 담는 그녀의 눈빛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 하지만 전생의 허다은에게는 온통 허 씨 집안사람들뿐이었던지라, 유하준이 구체적으로 무슨 병으로 인해 죽게 되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 그저 당시 뒤늦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안타까워했던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유하준이 담담하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 “경운이 친구? 허영규 회장 집안사람인가?”
- 이에 허다은은 그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 남자는 비록 둘도 없을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냥 차갑기만 했다.
- 한기가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허다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도 모르게 들고 있는 잔을 더 꽉 움켜잡았다.
- 지난 생의 그녀는 소경운을 좋아했었고, 그녀가 호구처럼 그를 쫓아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소 씨 가문 저택에 갔던 그 두 번 모두 그녀는 소 씨 집안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한껏 잘 보이려 노력하며 모든 일을 자신이 나서서 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잘한 행동이라 여겼었다.
- 하지만 소 씨 집안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우습게 생각했다는 것은 뒤늦게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 뒤로는 다들 그녀를 두고 여자애가 자신을 아낄 줄 모르고 남자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천하고 가볍게 군다며 비웃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 정수기와 유하준을 번갈아 바라보던 허다은은 그가 들고 있던 잔을 가져다 뜨거운 물을 담은 뒤 손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알맞춤해질 정도로 찬물을 섞어 다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 순전히 호의에 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하준은 그녀가 건넨 잔을 움켜쥔 채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어. 난 경운이 녀석 일에는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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