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나가는 인생 2회차
벼락식혜
Last update: 2024-12-02
제1화 그 아이가 죽을 수도 있어
- 무더운 삼복 날.
- 허다은은 땀을 훔치며 삼계탕을 보온 도시락에 담은 뒤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 모녀의 목소리가 병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 “엄마,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신장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난 죽을 거야. 이제 어떡해?”
- 허유라는 검사 결과지를 손에 쥔 채 절망에 잠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에 박주희 역시 잔뜩 당황한 듯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 “둘째 오빠가 의사잖니. 영인이더러 신경 좀 쓰라고 하면 금방 기증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그때까지 못 버틸까 봐 그래, 엄마. 난 아직 젊단 말이야. 난 아이도 있고, 엄마한테 효도도 아직 제대로 못 했는데, 난…”
- 허유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
- 죽고 싶지 않다는 것. 겨우 이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은 그녀였다. 앞으로 펼쳐질 좋은 나날들을 남겨두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 ‘그런 몸 상태를 하고도 나한테 효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친 자식보다 낫네.’
- 박주희는 그런 그녀가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 “참, 다은이 걔가 위암이라며.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걔더러 신장을 기증하라고 하면 되겠다. 이렇게라도 한 번쯤은 쓸모가 있네.”
- 그제야 원하는 답을 얻어낸 허유라는 사뭇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 “하지만 걔는 동의하지 않을 거야. 오빠들한테는 또 어떻게 말해!”
- 그러자 박주희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 “넌 걱정 말고 수술 날짜나 기다리고 있어. 오빠들이 널 얼마나 아끼는데, 절대 반대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은이 걔는 엄마가 알아서 할게.”
- 문 앞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허다은은 마음이 한없이 시려왔다.
-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자신이 집안에 굴러들어 온 돌이라는 이유로 이 집안 가족들에게 잘 보이려 갖은 노력을 해왔었다.
- 하지만 허 씨 가문에서 고분고분 종노릇을 해가며 호구 이미지를 아주 그럴듯하게 연기해 온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란 고작 이런 결과였다.
- 열 살이 되던 해에, 뒤늦게 아이가 바뀐 사실을 알아챈 허 씨 집안에서 시골에서 자라던 그녀를 이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고, 모두 이로써 그녀의 앞에는 꽃길이 깔릴 것이라 생각했다.
- 그녀 역시도 그렇게 여겼었다.
- 하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터라 이 집안에 섞여 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부터 허다은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그녀는 집안의 모든 구성원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비록 가족들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호구 같은 성격 때문에 가족들과 그나마 ‘잘’ 지낼 수 있었다.
- 허다은에게는 네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일 뿐만 아니라 다들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꼈다.
- 다만 그들이 아끼는 대상이 친여동생인 그녀가 아닌 바뀐 가짜 딸인 허유라였을 뿐이었다.
- 허유라가 눈물만 보이면 온 가족이 어쩔 줄 몰라 했다. 허다은의 잘못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들은 가장 먼저 허다은을 나무랐고 그녀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 허유라가 저지른 잘못은 전부 허다은의 잘못이 되었고 허유라가 조금 다치기라도 하면 그것은 허다은이 다치게 만든 것이었다.
- 심지어 그녀는 가끔은 허유라가 진짜 허 씨 집안 사람이고 자신이 그저 외부인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었다.
- 허 씨 가문은 90년대에 처음으로 바닷길을 이용한 사업에 뛰어든 가문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조건들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 하지만 해상 운수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며 허 씨 가문은 자금 순환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허다은이 밤낮없이 일을 해가며 가문의 자금 문제를 해결했었다.
- 그녀는 바로 허 씨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혹사시키다 병을 얻게 된 것이었다.
- 그리고 그 허 씨 집안은 그런 그녀에게 연민을 보이기는커녕 그녀의 목숨까지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 허다은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미리 알았어야 했다. 지난 몇 년간 어떤 노력을 해도 자신은 끝까지 그들의 관심 한 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 순간 속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허다은은 흠칫 손을 떨었다. 그러다 들고 있던 보온도시락을 떨어트렸고 그 소리는 안에 있는 모녀를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허다은은 급히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 하지만 더 심해져만 가는 고통에 그녀는 그다지 빨리 달리지 못했고, 이내 박주희는 계단 어구에서 허다은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 하지만 고통에 차 있는 허다은의 모습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더욱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 “다은아, 엄마 말 좀 들어봐. 넌 혈혈단신에 미련 둘 곳도 없는 데다가 위암으로 시한부 판정까지 받았잖아. 하지만 유라는 달라. 걔는 가정도 있고 아이도 있다고. 너 죽어가는 언니를 모질게 보고만 있을 거니?”
- 허다은은 웃었다. 웃다 웃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 수양딸을 위해 친딸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저주를 퍼붓다니. 하다못해 의사도 발견이 빨라 치료를 받는다면 완치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친엄마라는 사람은 그녀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 ‘도대체 누가 모진 건지 모르겠네.’
- 허유라는 원래는 그녀의 것이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갔다.
- 처음에는 그녀의 집을 차지하고 부모님과 네 오빠들의 사랑을 차지하더니, 그다음에는 그녀의 약혼자를 빼앗아 갔고, 약혼자인 소경운과 결탁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주식을 빼앗아 간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녀의 목숨까지도 원하고 있었다.
- 박주희는 아무 말이 없는 허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에 화가 잔뜩 나 있던 허다은은 힘껏 그 손을 뿌리치려다 순간 중심을 잃고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듯하더니 허다은은 벽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입에서는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고 의식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 박주희는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급히 그녀를 향해 뛰어내려왔다.
- 하지만 다음 순간 박주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에 허다은은 몸보다 심장에서 더욱 큰 고통을 느꼈다. 박주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저렇게 높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는데, 신장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겠지? 피를 이렇게 많이 토했으니 살기는 어렵겠네. 차라리 잘 됐어. 너희 언니는 이제 살 수 있겠어.”
- 그 말에 허다은은 눈을 부릅뜨고 박주희를 노려보았다. 마음속 가득한 증오와 억울함에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지 못했다.
- ……
- 다시 눈을 뜬 허다은은 정신이 몽롱했다. 정신을 차리려 한참을 애를 쓰고 나서야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 얼룩덜룩한 회색 벽 위에는 붉은색 십자가가 붙어 있었고, 침대 옆에는 너무 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새것 같지도 않은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 코를 찌르는 짙은 약 냄새가 원래부터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던 머리를 더욱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 ‘나 죽은 거 아니었어? 왜 병원에 있는 거지?’
- 그 순간, 붉게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나무문이 누군가에 의해 벌컥 열렸다. 그로 인한 진동으로 벽에서 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오더니 허영규가 그녀를 쳐다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 “허다은, 너 무슨 생각으로 그 양아치들을 시켜 네 언니를 괴롭히게 한 거냐? 그러다 그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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