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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질책

  • 허다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내 흐릿하던 기억이 순식간에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2004년, 그해 그녀는 열아홉이었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 허유라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양아치 몇 명과 마주치게 되어 저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다친 적이 있었다.
  • 그리고 당시 분명 허다은이 더 심하게 다쳤음에도 온 가족들이 우르르 찾아와 그녀를 추궁했었다.
  • 그녀는 이마가 찢어져 몇 바늘이나 꿰매야 했었고, 허유라는 그저 이마를 부딪쳐 작게 부어올랐을 뿐이었음에도 ‘양아치들을 시켜 자신의 언니를 망쳐놓았다’는 오명은 그녀의 몫이었다.
  • 전생에서 그녀의 이름뿐인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질책했었고 열심히 해명하고 사과를 했던 그녀에게 돌아온 건 차가운 눈빛뿐이었었다.
  •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만큼은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 회상에서 빠져나온 허다은이 담담히 물었다.
  • “그래서 죽었나요?”
  • 그 말에 허영규는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화가 잔뜩 나서는 허다은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 “허다은, 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 네 언니더러 죽으라고 저주하다니, 너 어쩜 애가 이렇게 독한 거냐!”
  • 큰오빠인 허영훈은 더욱이 분노로 인해 이마의 힘줄마저 도드라진 채 허다은의 앞으로 불쑥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허다은, 우리 허 씨 집안에서 어떻게 너같이 독한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때 널 다시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냥 밖에서 너 혼자 자생자멸하도록 뒀어야 했던 거라고.”
  • 허다은은 그저 그런 허영훈을 지그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뒤에 서있던 다른 형제들도 다가와 허다은을 질책하려 했지만, 박주희가 그런 그들을 막아서더니 침대 옆에 앉아 허다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다은아, 네가 어려서부터 밖에서 지내면서 고생을 많이 한 건 엄마도 알아. 그래서 널 집으로 데리고 온 뒤로 우리도 최대한 너한테 못 해줬던 것들을 보상해 주려 하고 있잖니.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줬고, 이제 대학도 다니게 됐잖아. 네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 중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애들도 많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 말을 하던 박주희는 서서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 “이렇게 너희 언니를 해치면 안 되지. 여자애한테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게 명성인데. 비록 어렸을 때 실수로 바뀌긴 했지만 유라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곁에서 자란 아이고, 나 역시 너희 둘 다 평등하게 대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 유라한테 어떤 편견 같은 건 가지지 마, 응?”
  • 그녀의 말은 그 어떤 노래보다도 더 감미로웠다. 하지만 눈앞의 이 가식적인 면상을 바라보다 죽기 직전 박주희가 했던 말이 떠오른 허다은의 마음은 얼음장 보다도 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 허 씨 집안에서 그녀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 건 맞았다. 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건 단지 허 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대학 졸업생이라는 명성에 맞게 주변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 허유라가 공주님 방 같은 으리으리한 방에서 지낼 때 그녀는 창고 방에서 지냈고, 그녀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은 허유라가 먹고 남긴 것, 입다 버린 것, 쓰다 버린 것들이었다.
  • 그런데도 염치없이 두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이지 듣던 중 가장 웃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 게다가 허다은이 이렇게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특별히 이곳까지 몰려와 그녀를 추궁하고 있지 않은가.
  •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오직 그녀만 질책하고 있지 않은가.
  • 이에 허다은은 냉소를 터뜨렸다. 단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넷째 오빠인 허영준은 더 이상 참아주기 힘들다는 듯 허다은을 향해 분노에 차 소리치기 시작했다.
  • “적당히 해, 허다은. 유라한테 그렇게 심한 짓을 해놓고도 뭐라고 하는 건 또 듣기 싫어? 평소 갖은 짓들을 하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이제는 유라를 저주하기까지 해? 대체 무슨 심보인 거야?”
  • 셋째 오빠인 허영근도 이에 맞장구쳤다.
  • “허다은, 복에 겨운 줄 알아야지. 지금 네가 누리는 모든 건 다 허 씨 가문에서 준 거야.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 설마 정말로 유라가 죽어야 만족이 되겠어?”
  • 둘째 오빠인 허영인 역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런 상황에서도 허다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주희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내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녀는 더 이상 그들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그들에게는 단 한 글자도 아깝게 느껴졌다.
  •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한테 벌을 주실 생각인데요?”
  • 그녀의 한마디에 방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 허다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살짝 얼떨떨해 보이는 박주희의 눈빛 속에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 허영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유라한테 양보하거라. 넌 우선 사리고 있다가 내년에 다시 신청하도록 해.”
  • 허다은이 그 영어 스피치 대회에 신청을 넣은 건 소경운 때문이었다. 그와 더 많이 접촉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 비록 이 전업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경운을 위해 그녀는 이제껏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해왔었고, 이는 다들 보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그곳에 있는 모두가 허영규의 말을 들은 그녀가 울며불며 난리를 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허다은은 웃으며 답했다.
  • “좋아요.”
  • 신속한 대답에 다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을 때, 허다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허유라가 또 뭘 갖고 싶다고 했든 다 양보할게요.”
  •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상황들은 수도 없이 많았었고, 허다은은 그럴 때마다 항상 그저 꾹 참고 넘겼었다.
  • 하지만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자신이 한 발 물러선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한 발 물러남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