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그해 그녀는 열아홉이었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허유라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양아치 몇 명과 마주치게 되어 저항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다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분명 허다은이 더 심하게 다쳤음에도 온 가족들이 우르르 찾아와 그녀를 추궁했었다.
그녀는 이마가 찢어져 몇 바늘이나 꿰매야 했었고, 허유라는 그저 이마를 부딪쳐 작게 부어올랐을 뿐이었음에도 ‘양아치들을 시켜 자신의 언니를 망쳐놓았다’는 오명은 그녀의 몫이었다.
전생에서 그녀의 이름뿐인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질책했었고 열심히 해명하고 사과를 했던 그녀에게 돌아온 건 차가운 눈빛뿐이었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만큼은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허다은이 담담히 물었다.
“그래서 죽었나요?”
그 말에 허영규는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화가 잔뜩 나서는 허다은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허다은, 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 네 언니더러 죽으라고 저주하다니, 너 어쩜 애가 이렇게 독한 거냐!”
큰오빠인 허영훈은 더욱이 분노로 인해 이마의 힘줄마저 도드라진 채 허다은의 앞으로 불쑥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허다은, 우리 허 씨 집안에서 어떻게 너같이 독한 애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때 널 다시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냥 밖에서 너 혼자 자생자멸하도록 뒀어야 했던 거라고.”
허다은은 그저 그런 허영훈을 지그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 서있던 다른 형제들도 다가와 허다은을 질책하려 했지만, 박주희가 그런 그들을 막아서더니 침대 옆에 앉아 허다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은아, 네가 어려서부터 밖에서 지내면서 고생을 많이 한 건 엄마도 알아. 그래서 널 집으로 데리고 온 뒤로 우리도 최대한 너한테 못 해줬던 것들을 보상해 주려 하고 있잖니.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해줬고, 이제 대학도 다니게 됐잖아. 네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 중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애들도 많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말을 하던 박주희는 서서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너희 언니를 해치면 안 되지. 여자애한테는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게 명성인데. 비록 어렸을 때 실수로 바뀌긴 했지만 유라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곁에서 자란 아이고, 나 역시 너희 둘 다 평등하게 대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 유라한테 어떤 편견 같은 건 가지지 마, 응?”
그녀의 말은 그 어떤 노래보다도 더 감미로웠다. 하지만 눈앞의 이 가식적인 면상을 바라보다 죽기 직전 박주희가 했던 말이 떠오른 허다은의 마음은 얼음장 보다도 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허 씨 집안에서 그녀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 건 맞았다. 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허 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대학 졸업생이라는 명성에 맞게 주변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허유라가 공주님 방 같은 으리으리한 방에서 지낼 때 그녀는 창고 방에서 지냈고, 그녀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은 허유라가 먹고 남긴 것, 입다 버린 것, 쓰다 버린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염치없이 두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이지 듣던 중 가장 웃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허다은이 이렇게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특별히 이곳까지 몰려와 그녀를 추궁하고 있지 않은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오직 그녀만 질책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허다은은 냉소를 터뜨렸다. 단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넷째 오빠인 허영준은 더 이상 참아주기 힘들다는 듯 허다은을 향해 분노에 차 소리치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허다은. 유라한테 그렇게 심한 짓을 해놓고도 뭐라고 하는 건 또 듣기 싫어? 평소 갖은 짓들을 하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이제는 유라를 저주하기까지 해? 대체 무슨 심보인 거야?”
셋째 오빠인 허영근도 이에 맞장구쳤다.
“허다은, 복에 겨운 줄 알아야지. 지금 네가 누리는 모든 건 다 허 씨 가문에서 준 거야.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 설마 정말로 유라가 죽어야 만족이 되겠어?”
둘째 오빠인 허영인 역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허다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주희에게 잡혀있는 손을 빼내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그들에게는 단 한 글자도 아깝게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한테 벌을 주실 생각인데요?”
그녀의 한마디에 방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허다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살짝 얼떨떨해 보이는 박주희의 눈빛 속에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허영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유라한테 양보하거라. 넌 우선 사리고 있다가 내년에 다시 신청하도록 해.”
허다은이 그 영어 스피치 대회에 신청을 넣은 건 소경운 때문이었다. 그와 더 많이 접촉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비록 이 전업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경운을 위해 그녀는 이제껏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해왔었고, 이는 다들 보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허영규의 말을 들은 그녀가 울며불며 난리를 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허다은은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신속한 대답에 다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을 때, 허다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허유라가 또 뭘 갖고 싶다고 했든 다 양보할게요.”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상황들은 수도 없이 많았었고, 허다은은 그럴 때마다 항상 그저 꾹 참고 넘겼었다.
하지만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다. 자신이 한 발 물러선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한 발 물러남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