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심술도 정도껏 부려
- 그 말은 이미 충분히 좋게 말한 것이었다. 좋게 말하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한 것이지, 막말로는 그냥 부모님의 돈을 낭비해 가며 학교에서 허송세월한다는 소리였다.
- 당연히 허다은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고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 게다가 그녀의 부모님은 아마 하다못해 그녀가 멀리 사라져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 “제 일이니 제가 결정하면 되는 거죠. 그러니 도와주세요, 교수님. 교수님을 창피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 이에 이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다은의 고집에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뿐, 결과가 어떨지는 그 역시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 부분은 허다은 본인에게 달린 것이었다.
- “의대 쪽 교수님한테 말씀은 드려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설득이 될지 말지는 또 다른 문제이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는 게 좋을 거예요.”
- 그런 그의 대답에 허다은은 이미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교수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 “감사드려요, 교수님. 결과가 어떻든지 다 겸허하게 받아들일게요.”
- 허다은은 이 교수가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 몇 마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허다은은 넋이 나간 듯한 양소정을 이끌고 교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머릿속이 새하얀 상태였던 양소정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허다은에 의해 이성이 조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것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 이에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 “다은아, 너 설마 진심이야?”
- 허다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 편하게 웃어 보였다.
- “너도 다 봤잖아. 네가 본 그대로야.”
- 이에 양소정은 손을 들어 허다은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또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은 없었다. 하지만 허다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 “너랑 허유라가 동시에 다친 것 때문에 허 씨 집안 사람들이 또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양소정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 그 일에 대해 그녀 역시 떠돌아다니는 유언비어들을 적잖이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못된 여동생이라는 이미지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게 박혀 있는 듯 실제로 허다은이 한 짓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한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지만 양소정의 추측에 허다은은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 “넌 그냥 딴생각 말고 다음 달 있을 영어 스피치나 준비해!”
- “다은아, 너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나랑 같이 지내. 어차피 아빠도 자주 집을 비우시고 엄마랑 나, 그리고 도우미 아주머니밖에 없어. 게다가 우리 엄마는 널 엄청 좋아하셔. 네가 언제쯤 우리 집에 놀러 오냐고 자꾸 나한테 잔소리한다니까.”
- 양소정은 허 씨 집안 사람들이 허다은에게 하는 짓들을 도저히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 게다가 허유라의 그 가식적인 얼굴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 친여동생은 좋아해 주지 않으면서 가짜 여동생에게는 한없이 잘해주는 허 씨 집안 사람들의 차별 대우는 그 누구라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 남인 양소정조차도 지켜보고 있기가 힘든데, 당사자인 허다은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 “소정아, 호의는 고마운데 나도 따로 생각이 있어. 걱정하지 마. 이미 허 씨 가문 저택에서 나왔고, 앞으로 더는 그 집 사람들한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 양 씨 집안은 돈이 넘쳐나니 객식구 하나 늘어나는 것을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허다은에게는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었고 더는 누군가에게 얹혀서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 허다은의 말에 양소정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 허 씨 집안에서 나왔다고? 그럼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야?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 여자애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 아무래도 우리 집에 들어와 지내는 게 좋겠어. 우리 집 엄청 커. 방도 네 맘대로 고를 수 있다고.”
- 양소정의 호들갑에 허다은은 참지 못하고 귀를 어루만졌다.
- 양소정이 자신을 위해 이런다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 “만약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미안하면 시간이 있을 때 우리한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하면 되잖아. 알다시피 난 네가 만든 것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 허다은의 걱정을 짐작이라도 한 듯 양소정이 허다은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 이렇듯 열성적인 양소정의 모습에 허다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 “다은아, 잠깐 멈춰봐. 할 말이 있어.”
- 그 목소리에 허다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 허다은은 그 목소리에 응답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허유라가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나쁜 말을 해가며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 허다은은 무언가 하지 않으면 ‘못된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질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려 허유라를 바라보았다.
- 화려한 차림의 허유라는 K 브랜드의 신상 스커트에 mini 브랜드의 이미 단종된 가방을 들고 있었다.
- 그녀의 몸에 둘러진 것 중 어느 것 하나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 다시 평범한 차림의 자신을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치고 있는 것들을 다 합쳐봐야 고작 몇천 원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 이에 허다은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 “왜? 허 씨 가문 아가씨께서 보시기에 내 처지가 아직 충분히 처참하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더 짓밟고 싶은 거야?”
- 허 씨 집안에서 쫓겨난 친딸이 학교에 돌아온 첫날 우연히 가짜 딸과 마주친 상황. 이처럼 흥미로운 광경에 구경꾼들이 빠질 수는 없었다.
-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둘러싸더니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는 듯 그들 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 허유라는 입을 열기 전부터 이미 눈시울을 붉힌 채 착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허다은을 향해 말했다.
- “다은아, 난 널 집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려고 온 거야. 심술도 정도껏 부려야지. 여자애 혼자 밖에서 지내는 건 엄청 위험해.”
- 그 말에 사람들은 심술을 부리고 있었던 거냐며 허다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 이에 더는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양소정이 나서서 허다은의 편을 들어주려 했지만, 허다은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 허유라는 고단수였다. 정직하기만 한 양소정은 허유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그녀가 될 터였다.
- “아참, 아가씨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저도 깜빡 잊을 뻔했네요. 그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비좁은 창고방이 내 집이었다는 걸 말이에요.”
유료회차
결제 방식을 선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