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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여자였기에 승낙하든 거절하든 진유월에게 말을 꺼냈다는 자체가 염우영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 “미안해요. 일정이 잡혀서 안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비는 시간이 없어요.”
  • 진유월의 망설임 없는 거절에 염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솔직히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 역시, 이 여자를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네!
  • “잠깐만요!”
  • 막 방을 나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염우영은 은근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 생각이 바뀌었나? 사실은 시간 조율이 가능했나?
  • 하지만 다시 몸을 돌린 염우영의 앞에 은행 카드 한 장이 불쑥 내밀어졌다.
  • “뭡니까?”
  • 염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혹시라도 사기 결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피땀 어린 돈이 든 카드를 전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진유월이 오히려 그에게 카드를 쥐여줄 줄은 몰랐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 “이 카드에 2000만 정도 들어 있을 거예요. 가져가서 쓰세요. 저렴한 음식으로 저희 집 냉장고를 채우지 마시고요! 집에 없는 물건이 많을 테니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사들이세요. 돈이 부족하면 저한테 얘기하고요.”
  • 부하직원에게 일을 지시하듯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얘기에 염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카드를 밀어냈다.
  • “이래 봬도 이 집안의 가장이고 직장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유월 씨 돈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 그 말에 진유월은 눈썹을 힐끗 올렸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고상을 떨 생각인가? 설마 정말 그녀의 재물과 미색에 아무 관심 없나?
  • 할 말을 마친 염우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어머니에게서 받은 1000만 원을 예물로 쓰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멋모르고 카드를 내밀었다가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 다음날, 염우영은 평소처럼 병원으로 출근했다.
  • 일선에서 은퇴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탓에 아직 주치의로 승진하지 못했고 부인과에서 외래 진찰을 담당하고 있었다.
  • “염우영! 너 어제도 선 보러 갔다며?”
  • 그때, 등 뒤에서 절친 임범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 순간, 임범이 어깨를 들썩이며 염우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던 두 사람은 염우영이 전역하고 돌아오고 나서는 직장 동료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 염우영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임범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어떻게 됐어?”
  • “잘 안됐어.”
  • 그렇게 말하며 염우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미란과의 소개팅이 실패한 건 사실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 “아니, 어쩌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이 열여덟 번째 맞선 아냐?”
  • 임범이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했지? 상대 여성을 만나자마자 바로 네 바닥을 보이라고 했잖아. 아니, 그렇게 많은 여자 중에 너랑 같이 살겠다는 여자가 하나도 없어?”
  • 임범도 염윤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 융통성이 없고 센스가 없는 것 말고는 딱히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고 이렇게 인물이 훤한데, 어떻게 18 번의 맞선 모두 실패할 수 있지?
  • 그중에 염우영의 외모에 혹한 여자가 한 명도 없을 리 없는데?
  • “네 말대로 해서 실패한 것 같은데!”
  • 염우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 “연봉이 3000만이라고 할 때마다 여자들이 하나같이 도망갔어.”
  • “너 바보야? 그럼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 임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염우영을 바라보았다.
  • 염우영은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염우영은 처음부터 맞선에 성공할 생각이 없었다. 매번 맞선 상대한테 수입부터 털어놓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 “요즘 여자들은 하나같이 돈이나 밝히고 엄청 현실적이야!”
  • 임범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 “돈을 밝히지 않고 물질만능주의자가 아닌 여자와 결혼한다는 건 금광을 캐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 염우영은 임범이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임범의 전 여자친구도 재벌 2세와 양다리를 걸치고 헤어졌었다. 그래서 임범도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에잇, 됐어. 오늘 엄마가 진찰받으러 오셨어. 곁에 있어드려야 할 것 같아. 저기 보건증 발급 때문에 검사받으러 온 여성들이 있으니 대신 검사해 줘.”
  • 그렇게 말하며 임범은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 “그래!”
  • 순순히 대답한 염우영은 이내 흉부 엑스레이 검사실로 들어갔다.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건강검진표를 들고 들어왔다.
  • “옷을 벗고 기계 앞에 서세요!”
  • 건강검진표를 받자마자 평소 하던 대로 지시한 염우영은 건강검진표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일순 멈칫했다.
  • 건강검진표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장미란이었다.
  • “당신이 여기 왜 있어?”
  • 염우영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장미란의 모습이 보였다.
  • “이런 검사를 어떻게 남자 의사한테 시킬 수 있어? 너 이 자식, 일부러 그런 거지? 내 몸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흥! 그 너절한 음모가 이제 들통났는데 어떡하냐? 당장 의사 바꿔줘!”
  • 장미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 주변 검사실에서 검사를 받고 있던 다른 여자들도 그 소란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더니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 일부는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검사하는 검사실에 어떻게 남자가 들어올 수 있냐며 장미란을 지지했고 의사들이 환자를 두고 그런 더러운 생각을 할 리 있냐며 염우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지난 2 년 동안 비슷한 상황을 꽤 많이 겪었다.
  • 보통은 염우영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물론 거기에 염우영의 정직한 외모도 한몫했지만 장미란은 절대 안 된다며 단호했다.
  • “네가 그러니까 장가 못 가는 거야, 이 더러운 자식아! 산부인과 의사도 여자 몸을 보고 싶어서 된 거지?”
  • 염우영이 의사를 바꿔주지 않자 장미란은 듣기 거북한 말들을 더욱 거침없이 쏟아냈다.
  • “무슨 일이야?”
  •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임범과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도 하나둘 검사실로 들어왔다.
  • “장미란?”
  • 소란의 중심에서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후배를 만난 임범은 얼른 다가와 설명했다.
  • “여기 있는 의사들 모두 전문가들이야. 남자 의사들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눈에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환자야. 네 생각처럼 환자를 보며 이상한 생각을 하지도 않아!”
  • “흥! 말만 청산유수이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 장미란은 감정이 더욱 격해졌다.
  • “너희들 눈에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존재라면 결혼도 남자랑 하지 그래?”
  •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장미란의 모습에 임범도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장미란과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자초지종을 알게 된 과장은 결국 장미란에게 여자 의사를 붙여주었다.
  • 염우영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오히려 임범이 불같이 화를 냈다.
  • “너, 장미란 알아? 우리보다 두 학년 아래에 예전 운성중학교의 퀸카였어. 주변에서 치켜올려주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다른 여성 환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우리한테서 진찰을 받는데 장미란은 뭔데 우리 진찰을 거부해?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알아? 얼굴 좀 잘났다고 아주 기고만장하지?”
  • 임범이 한바탕 울분을 토한 뒤에야 염우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장미란이 내 18 번째 맞선 상대야.”
  • “뭐?!”
  • 임범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 “그렇게 예쁜 여자도 선을 본다고? 신체적 결함이 있나? 그래서 아까도 너한테서 검사받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거야?”
  • 그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답을 알고 있을 리 없었기에 염우영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 “짝가슴인가? 아니면 비행기장? 설마 말 못 할 병이 있는 거 아냐?”
  • 염우영이 대답하지 않자 임범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 그 순간,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날아와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임범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장미란을 발견하고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 “말 못 할 병은 너나 있겠지! 아니, 너희 가족 모두! 흥! 내가 너희 같은 루저들이 평생 넘볼 수 없는 여자인 건 알겠는데, 괜히 질투 난다고 뒷담화나 까지 좀 마! 없어 보이니까!”
  • 눈을 희번덕거리며 두 남자를 흘겨보던 장미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떴다.
  •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큰코다친 임범은 멀어지는 장미란의 뒷모습에 대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 “저렇게 교만한 여자는 처음 봐!”
  • 임범은 본 적이 없었지만 염우영은 장미란만큼 콧대가 높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에 비하면 장미란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 “난 이제 우리 엄마한테 가볼게. 지금쯤 소견서가 나왔을 거야.”
  • 그렇게 말하며 임범은 서둘러 CT 실로 향했다.
  • 염우영도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그 뒤를 따랐다.
  • 하지만 CT 실 입구로 들어간 순간, 소견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임범을 발견했다.
  • “왜 그래?”
  •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우영은 황급히 임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견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염우영도 흠칫 몸을 떨었다.
  • 소견서에는 폐암 말기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