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여자였기에 승낙하든 거절하든 진유월에게 말을 꺼냈다는 자체가 염우영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미안해요. 일정이 잡혀서 안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비는 시간이 없어요.”
진유월의 망설임 없는 거절에 염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역시, 이 여자를 부모님에게 보여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네!
“잠깐만요!”
막 방을 나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염우영은 은근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생각이 바뀌었나? 사실은 시간 조율이 가능했나?
하지만 다시 몸을 돌린 염우영의 앞에 은행 카드 한 장이 불쑥 내밀어졌다.
“뭡니까?”
염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라도 사기 결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피땀 어린 돈이 든 카드를 전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진유월이 오히려 그에게 카드를 쥐여줄 줄은 몰랐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 카드에 2000만 정도 들어 있을 거예요. 가져가서 쓰세요. 저렴한 음식으로 저희 집 냉장고를 채우지 마시고요! 집에 없는 물건이 많을 테니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사들이세요. 돈이 부족하면 저한테 얘기하고요.”
부하직원에게 일을 지시하듯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얘기에 염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카드를 밀어냈다.
“이래 봬도 이 집안의 가장이고 직장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유월 씨 돈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 말에 진유월은 눈썹을 힐끗 올렸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고상을 떨 생각인가? 설마 정말 그녀의 재물과 미색에 아무 관심 없나?
할 말을 마친 염우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1000만 원을 예물로 쓰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멋모르고 카드를 내밀었다가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다음날, 염우영은 평소처럼 병원으로 출근했다.
일선에서 은퇴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탓에 아직 주치의로 승진하지 못했고 부인과에서 외래 진찰을 담당하고 있었다.
“염우영! 너 어제도 선 보러 갔다며?”
그때, 등 뒤에서 절친 임범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 순간, 임범이 어깨를 들썩이며 염우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던 두 사람은 염우영이 전역하고 돌아오고 나서는 직장 동료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염우영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임범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안됐어.”
그렇게 말하며 염우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미란과의 소개팅이 실패한 건 사실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이 열여덟 번째 맞선 아냐?”
임범이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안 했지? 상대 여성을 만나자마자 바로 네 바닥을 보이라고 했잖아. 아니, 그렇게 많은 여자 중에 너랑 같이 살겠다는 여자가 하나도 없어?”
임범도 염윤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융통성이 없고 센스가 없는 것 말고는 딱히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고 이렇게 인물이 훤한데, 어떻게 18 번의 맞선 모두 실패할 수 있지?
그중에 염우영의 외모에 혹한 여자가 한 명도 없을 리 없는데?
“네 말대로 해서 실패한 것 같은데!”
염우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연봉이 3000만이라고 할 때마다 여자들이 하나같이 도망갔어.”
“너 바보야? 그럼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임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염우영을 바라보았다.
염우영은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염우영은 처음부터 맞선에 성공할 생각이 없었다. 매번 맞선 상대한테 수입부터 털어놓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요즘 여자들은 하나같이 돈이나 밝히고 엄청 현실적이야!”
임범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돈을 밝히지 않고 물질만능주의자가 아닌 여자와 결혼한다는 건 금광을 캐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염우영은 임범이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임범의 전 여자친구도 재벌 2세와 양다리를 걸치고 헤어졌었다. 그래서 임범도 여태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에잇, 됐어. 오늘 엄마가 진찰받으러 오셨어. 곁에 있어드려야 할 것 같아. 저기 보건증 발급 때문에 검사받으러 온 여성들이 있으니 대신 검사해 줘.”
그렇게 말하며 임범은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순순히 대답한 염우영은 이내 흉부 엑스레이 검사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건강검진표를 들고 들어왔다.
“옷을 벗고 기계 앞에 서세요!”
건강검진표를 받자마자 평소 하던 대로 지시한 염우영은 건강검진표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일순 멈칫했다.
건강검진표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장미란이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염우영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장미란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검사를 어떻게 남자 의사한테 시킬 수 있어? 너 이 자식, 일부러 그런 거지? 내 몸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흥! 그 너절한 음모가 이제 들통났는데 어떡하냐? 당장 의사 바꿔줘!”
장미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주변 검사실에서 검사를 받고 있던 다른 여자들도 그 소란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더니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일부는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검사하는 검사실에 어떻게 남자가 들어올 수 있냐며 장미란을 지지했고 의사들이 환자를 두고 그런 더러운 생각을 할 리 있냐며 염우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 2 년 동안 비슷한 상황을 꽤 많이 겪었다.
보통은 염우영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물론 거기에 염우영의 정직한 외모도 한몫했지만 장미란은 절대 안 된다며 단호했다.
“네가 그러니까 장가 못 가는 거야, 이 더러운 자식아! 산부인과 의사도 여자 몸을 보고 싶어서 된 거지?”
염우영이 의사를 바꿔주지 않자 장미란은 듣기 거북한 말들을 더욱 거침없이 쏟아냈다.
“무슨 일이야?”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임범과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도 하나둘 검사실로 들어왔다.
“장미란?”
소란의 중심에서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후배를 만난 임범은 얼른 다가와 설명했다.
“여기 있는 의사들 모두 전문가들이야. 남자 의사들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눈에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환자야. 네 생각처럼 환자를 보며 이상한 생각을 하지도 않아!”
“흥! 말만 청산유수이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장미란은 감정이 더욱 격해졌다.
“너희들 눈에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존재라면 결혼도 남자랑 하지 그래?”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장미란의 모습에 임범도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장미란과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과장은 결국 장미란에게 여자 의사를 붙여주었다.
염우영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오히려 임범이 불같이 화를 냈다.
“너, 장미란 알아? 우리보다 두 학년 아래에 예전 운성중학교의 퀸카였어. 주변에서 치켜올려주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다른 여성 환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우리한테서 진찰을 받는데 장미란은 뭔데 우리 진찰을 거부해?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알아? 얼굴 좀 잘났다고 아주 기고만장하지?”
임범이 한바탕 울분을 토한 뒤에야 염우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장미란이 내 18 번째 맞선 상대야.”
“뭐?!”
임범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게 예쁜 여자도 선을 본다고? 신체적 결함이 있나? 그래서 아까도 너한테서 검사받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거야?”
그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답을 알고 있을 리 없었기에 염우영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짝가슴인가? 아니면 비행기장? 설마 말 못 할 병이 있는 거 아냐?”
염우영이 대답하지 않자 임범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그 순간,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날아와 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임범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장미란을 발견하고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말 못 할 병은 너나 있겠지! 아니, 너희 가족 모두! 흥! 내가 너희 같은 루저들이 평생 넘볼 수 없는 여자인 건 알겠는데, 괜히 질투 난다고 뒷담화나 까지 좀 마! 없어 보이니까!”
눈을 희번덕거리며 두 남자를 흘겨보던 장미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떴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큰코다친 임범은 멀어지는 장미란의 뒷모습에 대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교만한 여자는 처음 봐!”
임범은 본 적이 없었지만 염우영은 장미란만큼 콧대가 높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에 비하면 장미란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난 이제 우리 엄마한테 가볼게. 지금쯤 소견서가 나왔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임범은 서둘러 CT 실로 향했다.
염우영도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CT 실 입구로 들어간 순간, 소견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임범을 발견했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우영은 황급히 임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견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염우영도 흠칫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