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승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은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룰 생각이었다.
“그래!”
지애란은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같이 살기로 했어? 여자들은 다들 로맨틱한 남자를 좋아해. 오늘은 첫날밤이니까 푸대접하면 절대 안 돼! 언제나 아껴주고 사랑해 줘, 알겠지?”
첫날밤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염우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도 생각지 못한 것을 진유월이 생각했을 리 없었다. 그 여자는 그와 밤을 보낼 생각 따위 꼬물만큼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평생!
하지만 지애란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염우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같이 살아야죠. 다들 문 단속 잘하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그 한마디에 지애란과 염윤설은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두 사람이었다.
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지만 정작 결혼하고 나간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울지 마세요! 이제 우영이를 며느리한테 보내야죠. 아니면 어떻게 엄마한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안겨주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지애란을 설득하던 염윤설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가까스로 진정한 지애란과 염윤설은 염우영을 도와 짐가방을 꾸렸다.
염우영이 짐을 들고서 문을 나서려던 찰나, 지애란이 돌연 은행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
“안 돼요, 어머니.”
염우영은 화들짝 놀라며 은행 카드를 돌려주었다.
지애란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은행 카드였다. 심지어 보험 카드와도 연동되어 있었는데 지금 그 카드를 그에게 준 것이다.
이 카드만은 절대 안 된다!
“가져가!”
하지만 지애란은 강경했다.
“그쪽에서 예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잖아. 그런 거로도 모자라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야. 그런 여자를 실망시키지 말고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이 카드에 1000만 원 정도 들어 있을 거야. 그 돈으로 우리 며느리한테 다이아 세트라도 하나 해 줘. 알겠지?”
그 말에 염우영은 순간 울컥했다.
끊임없이 줘도 아쉬운 게 바로 부모 마음이었다.
이 돈은 지애란이 노후 자금으로 모은 돈이었다. 염우영이 이 돈을 쓰면 올해 57 세이신 어머니는 어떡한단 말인가.
“우영아, 엄마가 주신 거잖아. 그냥 받아.”
그렇게 말하며 염윤설은 염우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딸만큼 엄마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염우영이 카드를 받지 않으면 지애란은 분명 며느리가 도망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것이다.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염우영은 그 돈을 신부에게 예물로 쥐여주어야 한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한테 정말 감사하면 얼른 네 아내를 데려와서 보여줘!”
염윤설은 다시 한번 당부했다.
사실 염윤설도 초고속으로 결혼한 동생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겠어!”
순순히 대답한 염우영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인정머리 없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하나뿐인 누이에게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순간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가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지만 그 바람을 들어드리기는커녕 아무나 데려와서 연기를 한 것이었으니 죄책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적어도 살아 계실 때까지만이라도 절대 들켜서는 안 돼…”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염우영은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진유월과의 결혼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머니는 분명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집을 나선 염우영은 곧장 진유월이 보낸 주소를 따라 포엠 아파트에 도착했다.
운성에서도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는 포엠 아파트는 한 평에 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였다.
단지 내에 건물이 많았지만 진유월에게서 들은 거라고는 ‘1701호’라는 호수뿐이었다. 어느 동인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이럴 줄 알고 구청에서 미리 연락처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 염우영은 진유월에게서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같은 시각, 저녁 6 시를 가리키는 늦은 시간임에도 진유월은 회사에서 임원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천강 그룹 대표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진유월은 회의 중에 절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없자 진유월이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난감한 상황임을 깨달은 염우영은 얼른 문자를 보냈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배고프고 짜증이 난 염우영은 결국 보이스 톡을 보냈다.
진유월의 차갑고 도도한 성격 때문에 통화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카카오톡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 염우영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 진유월은 회의 중에 갑자기 걸려온 보이스 톡에 저도 모르게 힐끗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진유월과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답장해야 할 메시지에는 칼답장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메시지에는 설령 그것이 보이스 톡이든 페이스 톡이든 일절 받지 않았다.
생소한 프로필 사진에 ‘calm splendor’이라고 적힌 생소한 이름에 설핏 미간을 구기던 진유월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연락처를 차단했다.
이런 사람은 또 언제 추가한 거야?
진유월이 보이스 톡을 거절하자 현재 수중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염우영은 재빨리 다시 보이스 톡을 걸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는 알림음이 떴다.
뭐야?
염우영은 한참을 멍하니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했다.
설마 여태 그를 가지고 논 건가?
진천후가 진유월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염우영은 얼른 통화기록을 뒤졌다.
연락처를 따로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었기에 염우영은 어렵지 않게 진천후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어르신, 손녀분 대체 왜 그러세요? 포엠 아파트에서 같이 살자고 해놓고 연락처는 왜 차단하는 겁니까? 지금 저 놀리는 거죠? 혹시 신종 결혼 사기 수법입니까? 탈탈 털어도 땡전 한 푼 나오지 않는 몸이라 공사 칠 돈이 없을 텐데?”
진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손녀가 남성 혐오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총각, 화내지 말게. 내 지금 바로 유월이한테 연락해 보겠네!”
진천후는 얼른 염우영을 달랬다. 어떻게 얻은 손자사위인데 홧김에 도망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진 씨 가문은 어마어마한 대부호 가문인 데다 진유월이 얼마나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진천후도 알지 못했기에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천강 그룹.
진유월이 회의에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할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임을 확인한 진유월은 야트막하게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아버지, 저 지금 회의 중인데 어쩐 일이세요?”
아무리 회의가 중한다 한들, 증손자를 낳는 것만 하랴!
“유월아, 우리 손자사위한테 같이 살자고 했다며? 우리 손자사위 지금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어느 동인지 모른다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 맞다!
진유월은 그제야 자신이 오늘 결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젠장,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역시나 남자들은 짜증 나는 존재였다!
“B동으로 가라고 전해주세요.”
말을 마친 진유월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염우영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하면 낭패였다.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 진유월은 그녀를 향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힐끗 올렸다.
하지만 상대는 천강 그룹의 대표였다. 다들 엄청 궁금한 눈치였지만 진유월에게 직접 물을만큼 간땡이가 부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간땡이가 부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한 젊은 여성이 진유월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남편이 언니 찾는 거 아냐?”
그러자 진유월의 싸늘한 눈초리가 곧장 날아와 꽂혔다.
여자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재빨리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 용감한 여성의 이름은 진윤서였고 나이는 올해 스무 살이었다.
진윤서는 진유월보다 몇 년 늦게 태어난 걸 새삼스럽게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면 방금 전 할아버지한테 고자질을 한 그 남자가 지금쯤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