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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무식하면 용감하다

  • “저희끼리 시간 조율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 염우영은 결국 미루는 쪽을 택했다.
  •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승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은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룰 생각이었다.
  • “그래!”
  • 지애란은 말을 이었다.
  • “그럼 오늘부터 같이 살기로 했어? 여자들은 다들 로맨틱한 남자를 좋아해. 오늘은 첫날밤이니까 푸대접하면 절대 안 돼! 언제나 아껴주고 사랑해 줘, 알겠지?”
  • 첫날밤이라니.
  •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염우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 그도 생각지 못한 것을 진유월이 생각했을 리 없었다. 그 여자는 그와 밤을 보낼 생각 따위 꼬물만큼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평생!
  • 하지만 지애란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염우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같이 살아야죠. 다들 문 단속 잘하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 그 한마디에 지애란과 염윤설은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두 사람이었다.
  • 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지만 정작 결혼하고 나간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엄마, 울지 마세요! 이제 우영이를 며느리한테 보내야죠. 아니면 어떻게 엄마한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안겨주겠어요?”
  • 작은 목소리로 지애란을 설득하던 염윤설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가까스로 진정한 지애란과 염윤설은 염우영을 도와 짐가방을 꾸렸다.
  • 염우영이 짐을 들고서 문을 나서려던 찰나, 지애란이 돌연 은행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
  • “안 돼요, 어머니.”
  • 염우영은 화들짝 놀라며 은행 카드를 돌려주었다.
  • 지애란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은행 카드였다. 심지어 보험 카드와도 연동되어 있었는데 지금 그 카드를 그에게 준 것이다.
  • 이 카드만은 절대 안 된다!
  • “가져가!”
  • 하지만 지애란은 강경했다.
  • “그쪽에서 예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잖아. 그런 거로도 모자라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야. 그런 여자를 실망시키지 말고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이 카드에 1000만 원 정도 들어 있을 거야. 그 돈으로 우리 며느리한테 다이아 세트라도 하나 해 줘. 알겠지?”
  • 그 말에 염우영은 순간 울컥했다.
  • 끊임없이 줘도 아쉬운 게 바로 부모 마음이었다.
  • 이 돈은 지애란이 노후 자금으로 모은 돈이었다. 염우영이 이 돈을 쓰면 올해 57 세이신 어머니는 어떡한단 말인가.
  • “우영아, 엄마가 주신 거잖아. 그냥 받아.”
  • 그렇게 말하며 염윤설은 염우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 딸만큼 엄마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염우영이 카드를 받지 않으면 지애란은 분명 며느리가 도망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것이다.
  •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염우영은 그 돈을 신부에게 예물로 쥐여주어야 한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엄마한테 정말 감사하면 얼른 네 아내를 데려와서 보여줘!”
  • 염윤설은 다시 한번 당부했다.
  • 사실 염윤설도 초고속으로 결혼한 동생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알겠어!”
  • 순순히 대답한 염우영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 인정머리 없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하나뿐인 누이에게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순간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 어머니는 그가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지만 그 바람을 들어드리기는커녕 아무나 데려와서 연기를 한 것이었으니 죄책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 “적어도 살아 계실 때까지만이라도 절대 들켜서는 안 돼…”
  •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염우영은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다.
  • 진유월과의 결혼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머니는 분명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집을 나선 염우영은 곧장 진유월이 보낸 주소를 따라 포엠 아파트에 도착했다.
  • 운성에서도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는 포엠 아파트는 한 평에 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였다.
  • 단지 내에 건물이 많았지만 진유월에게서 들은 거라고는 ‘1701호’라는 호수뿐이었다. 어느 동인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 이럴 줄 알고 구청에서 미리 연락처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 염우영은 진유월에게서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 같은 시각, 저녁 6 시를 가리키는 늦은 시간임에도 진유월은 회사에서 임원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 천강 그룹 대표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진유월은 회의 중에 절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없자 진유월이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난감한 상황임을 깨달은 염우영은 얼른 문자를 보냈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배고프고 짜증이 난 염우영은 결국 보이스 톡을 보냈다.
  • 진유월의 차갑고 도도한 성격 때문에 통화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서로 카카오톡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 염우영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 진유월은 회의 중에 갑자기 걸려온 보이스 톡에 저도 모르게 힐끗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 진유월과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 답장해야 할 메시지에는 칼답장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메시지에는 설령 그것이 보이스 톡이든 페이스 톡이든 일절 받지 않았다.
  • 생소한 프로필 사진에 ‘calm splendor’이라고 적힌 생소한 이름에 설핏 미간을 구기던 진유월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연락처를 차단했다.
  • 이런 사람은 또 언제 추가한 거야?
  • 진유월이 보이스 톡을 거절하자 현재 수중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염우영은 재빨리 다시 보이스 톡을 걸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는 알림음이 떴다.
  • 뭐야?
  • 염우영은 한참을 멍하니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했다.
  • 설마 여태 그를 가지고 논 건가?
  • 진천후가 진유월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염우영은 얼른 통화기록을 뒤졌다.
  • 연락처를 따로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었기에 염우영은 어렵지 않게 진천후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 “어르신, 손녀분 대체 왜 그러세요? 포엠 아파트에서 같이 살자고 해놓고 연락처는 왜 차단하는 겁니까? 지금 저 놀리는 거죠? 혹시 신종 결혼 사기 수법입니까? 탈탈 털어도 땡전 한 푼 나오지 않는 몸이라 공사 칠 돈이 없을 텐데?”
  • 진천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손녀가 남성 혐오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 “총각, 화내지 말게. 내 지금 바로 유월이한테 연락해 보겠네!”
  • 진천후는 얼른 염우영을 달랬다. 어떻게 얻은 손자사위인데 홧김에 도망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 진 씨 가문은 어마어마한 대부호 가문인 데다 진유월이 얼마나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진천후도 알지 못했기에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시각, 천강 그룹.
  • 진유월이 회의에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 반사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할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임을 확인한 진유월은 야트막하게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할아버지, 저 지금 회의 중인데 어쩐 일이세요?”
  • 아무리 회의가 중한다 한들, 증손자를 낳는 것만 하랴!
  • “유월아, 우리 손자사위한테 같이 살자고 했다며? 우리 손자사위 지금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어느 동인지 모른다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 아! 맞다!
  • 진유월은 그제야 자신이 오늘 결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젠장,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 역시나 남자들은 짜증 나는 존재였다!
  • “B동으로 가라고 전해주세요.”
  • 말을 마친 진유월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염우영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하면 낭패였다.
  •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고개를 들어 올린 진유월은 그녀를 향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힐끗 올렸다.
  • 하지만 상대는 천강 그룹의 대표였다. 다들 엄청 궁금한 눈치였지만 진유월에게 직접 물을만큼 간땡이가 부은 사람은 없었다.
  •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간땡이가 부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한 젊은 여성이 진유월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언니 남편이 언니 찾는 거 아냐?”
  • 그러자 진유월의 싸늘한 눈초리가 곧장 날아와 꽂혔다.
  • 여자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재빨리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 그 용감한 여성의 이름은 진윤서였고 나이는 올해 스무 살이었다.
  • 진윤서는 진유월보다 몇 년 늦게 태어난 걸 새삼스럽게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면 방금 전 할아버지한테 고자질을 한 그 남자가 지금쯤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테니.
  • 진윤서는 문득 궁금해졌다.
  • 남성 혐오증이 있는 언니와 결혼한 그 무식하고 용감한 용사는 대체 누구일까?
  • 우리 언니 성깔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3 일?
  • 어쩌면 내일 바로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갈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