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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까다로운 여자

  • 황급히 진유월에게 다가간 염우영은 진유월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을 뻗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염우영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 송곳처럼 뾰족하고 까칠한 여자라 함부로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 하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기절한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에 염우영은 결국 숨을 크게 들이켜며 진유월을 번쩍 안아들었다.
  • 예상외로 가벼웠다.
  • 172 센티미터 정도 되는 큰 키에 50 킬로 될까 싶은 몸무게였다.
  • “마… 만지지 마!”
  • 고통스러운 표정과 달리 그를 향한 눈빛은 예리한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 남자와의 접촉을 혐오하는 진유월에게 남자에게 안기는 건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진유월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느낀 염우영은 시선을 피한 채 조심스럽게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타박했다.
  • “평소 불규칙한 식사 때문에 급성 위장염에 걸린 것 같네요.”
  • 그 말에 진유월은 일순 멈칫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그녀의 지병에 대해 알고 있다니.
  •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잠옷을 살짝 젖히는 손길에 진유월은 화들짝 놀랐다.
  •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죽고 싶어요?”
  •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진유월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염우영의 팔을 뒤로 꺾었다.
  • 진 씨 가문 아가씨로서 어릴 적부터 각종 무술을 연마해 왔기에 여자라고 결코 얕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비틀린 팔에서 고통이 전해졌지만 염우영은 반항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 “제가 고통을 덜어줄게요!”
  •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욕설이 난무했다. 얼굴만 예뻤지, 여성스러운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 “다… 당신 산부인과 의사 아니었어요? 내과도 다룰 수 있어요?”
  • 진유월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염우영을 훑어보았다.
  • 하지만 다음 순간, 또다시 복부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진유월은 결국 염우영의 팔을 놓아주고서 아랫배를 감쌌다.
  • “정 못 믿겠으면 구급차 불러줄 테니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참아보든가요!”
  • 호의가 무시당하자 기분이 언짢아진 염우영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 하지만 몸을 웅크린 채 고통을 참고 있는 진유월의 모습에 결국 다시 마음이 약해져 휴대전화를 내려놓고서 진유월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 끄고 뜨거운 손이 잠옷을 들추는 것이 느껴졌지만 진유월은 꼼짝하지 않았다.
  • 제지할 힘도 없을뿐더러 한 번은 이 남자를 믿어보고 싶었다.
  •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발각된다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 잡티 하나 없이 희고 부드러운 다리를 힐끗 바라보던 염우영은 잠옷이 젖혀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터질 듯이 뛰어대는 심장에 염우영은 당혹스러웠다.
  • 산부인과 의사였던 탓에 여자의 몸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강력한 충격을 주는 여자는 진유월이 처음이었다.
  •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으며 손바닥을 비빈 염우영은 손바닥의 열기를 이용해 진유월의 복부를 따뜻하게 했다.
  • “윽—”
  • 따뜻한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서늘한 냉기가 흐르고 찌를 듯한 고통이 전해지던 복부가 한결 편안해졌다.
  •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던 염우영은 손바닥으로 뭉근하게 진유월의 복부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 군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탱탱한 촉감이 손바닥에 감겼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여자였다. 평소에도 운동을 열심히 한 티가 났다.
  • “이, 이건 무슨 기술이에요?”
  • 진유월이 진주처럼 반짝이는 이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 예전에는 남자의 손만 닿아도 바로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염우영과의 접촉은 어딘가 달랐다.
  • 울렁거리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혐오감보다는 수줍고 기분 좋은 이상한 기분에 진유월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 “한의학, 구양지압법(九陽指壓法)입니다.”
  • 염우영은 진유월의 시선을 피한 채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려다 무심코 진유월의 백옥 같은 다리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 이 여자의 다리는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예술품이었다!
  • 염우영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던 진유월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흥,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 결혼 전에는 성인군자인 척 고상을 떨더니. 역시 염우영도 여색을 밝히는 보통 남자였다. 세상 남자들은 다 똑같았다.
  • “좀 나아졌어요?”
  • 그때, 염우영이 불쑥 물었다.
  • “이제 괜찮으니까 손 치워요!”
  • 진유월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어들이던 염우영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 “난 진유월 씨 남편이고 더군다나 진유월 씨를 치료한 건데 그렇게 싫은 티를 낼 필요는 없잖아요?”
  • 그 말에 진유월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 인간의 번식에는 왜 하필 성행위가 필요할까?
  • 다른 여자들은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나?
  • “먹을 것 좀 만들어 줄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배를 굶으면서 야근하지 마세요.”
  • 염우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르며 몸을 일으켰다.
  • “의사로서의 훈계예요? 아니면 남편으로서의 당부예요?”
  • 진유월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진유월의 모습에 염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진유월은 대답 대신 새침하게 말했다.
  • “11 시 전에는 무조건 자야 하니까 그 이후에는 방해하지 마세요!”
  • 그 말에 염우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기업 임원과의 동거가 병원에서의 업무수칙보다 더욱 엄격할 줄은 몰랐다.
  • 그로부터 10 분이 지나고 염우영은 갓 삶은 계란국수를 들고서 진유월의 방 문을 두드렸다.
  • 문을 열고 나온 진유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염우영이 들고 있는 국수를 바라보았다.
  • “직접 산 거예요? 사내대장부가 요리까지 할 줄 알아요?”
  • “이 집 주방이 진유월 씨 얼굴보다 더욱 깨끗한데 내가 산 게 아니라면 하늘에서 뚝 떨어졌게요?”
  •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진유월의 방으로 들어온 염우영은 들고 있던 계란 국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당부했다.
  • “따뜻할 때 드세요. 그 취약한 위장으로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 “지금 절 가르치려 드는 거예요?”
  • 진유월은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염우영을 응시했다. 방 안에 남자가 들어온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분이 불쾌했다.
  • 게다가 그 남자가 엄마한테서도 들은 적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다니!
  • 감히 주제도 모르고 천강 그룹 대표한테 훈수를 둬?
  • 진유월의 멸시 가득한 시선에도 염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 “선의의 훈계입니다. 진유월 씨는 내 아내이기 전에 저한테는 환자입니다. 그러니 말 들으세요!”
  • 그 말에 진유월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 하지만 결국 순순히 염우영의 말에 따랐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단출한 계란 국수를 보고는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 “이거, 먹을 수 있는 음식 맞아요?”
  • “먹어도 죽지는 않을 거니까 안심하세요. 지금 먹어두지 않고 내일 아침까지 공복으로 있는다면 위장이 더욱 약해질 거라는 것만 아세요!”
  • 염우영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까칠한 거야?
  • 결국 진유월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국수를 조금 집어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 “의외로 먹을 만하네요! 가끔 밤에 한 끼 먹는다고 살이 찌지는 않겠죠?”
  • 진유월은 처음으로 집에 남자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고용인을 두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 진유월의 냉랭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표정을 보며 염우영은 일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 진유월도 결국 여자였다.
  • 말로는 남자를 혐오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보통의 여자들처럼 자신의 몸매에 신경을 쓰고 목숨을 걸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가.
  • “다 먹었어요. 이제 됐죠?”
  • 고작 한두 입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진유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염우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환자가 의사에게 묻듯 진지한 표정에 염우영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 세상천지 이렇게 까다로운 여자가 또 있을까?
  • 특별히 그녀를 위해 야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고작 한두 입 먹고 안 먹는다고?
  •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염우영은 화를 누르며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참!”
  • 막 방 문 앞에 다다르려던 찰나, 염우영이 돌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 “언제 시간 돼요? 혹시 우리 집에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어머니가 진유월 씨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 그렇게 말하며 염우영은 진유월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괜히 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