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진퇴양난

  • 결혼은 평생의 일이었다.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 결혼한 이상 염우영도 부부 생활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 “허, 자기도 남자라 이건가.”
  • 진유월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 남자와 여자의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앞으로의 생활에 신경을 쓰는 그녀와 달리 염우영은 가장 먼저 성생활을 신경을 쓰고 있었다.
  • “내 마음이 동하기 전에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
  •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 염우영은 진유월의 으름장이 마음에 쏙 들었다.
  •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자신이 진유월처럼 까칠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 진유월을 보면 심장이 뛰는 건 사실이지만 그쪽으로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 무엇보다 염우영은 자신이 없었다.
  • 여태 결혼에 거부감을 보였던 이유도 아내에게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 진유월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 ‘이 개자식이!’
  • 진유월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설을 곱씹었다.
  • 염우영의 표정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 차갑고 도도한 외모 때문에 남자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남자들이 그녀를 상대로 아무 생각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 자신의 외모에 꽤 자신만만했던 진유월은 그녀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염우영의 모습에 괜히 열이 받았다. 그녀의 외모가 처음으로 오작동을 일으키는 듯했다.
  • 산부인과 의사는 역시나 최악이었다!
  • 앞으로의 삶에 대해 대충 의논을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헤어졌다.
  • 그 길로 곧장 집으로 돌아온 염우영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서 집으로 찾아온 장미란을 맞닥뜨렸다.
  •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 그 위선적인 모습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와 염우영은 선물을 전부 돌려주었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 “뭐? 선물을 전부 돌려줬다고?”
  • 염우영이 수십억에 달하는 선물을 거절했다는 얘기에 장미란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 하느님 맙소사!
  • 세상천지 이렇게 멍청한 남자가 또 있을까!
  • 그러고는 스스로가 청렴 고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이렇게 고리타분하고 멍청하니 여태 결혼도 못 하고 밑바닥 인생이지.
  • 이런 남자와 결혼했다간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미란이 왔어? 얼른 들어와!”
  • 인기척을 듣고 나온 지애란은 장미란을 발견하고서 반색을 했다.
  • 여자가 우리 아들을 찾아오는 날도 있다니!
  • 장미란네 가족들이 아무리 파렴치한 인간들이라고 해도 지애란은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장가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며느리에 대한 지애란의 요구는 심지어 염우영보다 더욱 낮았다. 지애란은 그냥 살아있는 암컷이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장미란이 돌연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쌀쌀맞게 말했다.
  • “어딜 들어가요? 죄송하지만 전 바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결혼, 평생 꿈도 꾸지 마세요! 염우영 씨는 내 발가락에도 못 미치니까! 이런 집안에 들어올 멍청한 여자가 과연 있을라 몰라! 그럼 안녕히 계세요!”
  •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 엄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남자를 잡으라고 한 거야! 시간만 낭비했잖아!
  •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장미란의 태도에 지애란은 어안이 벙벙했다.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분명 1 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태도는 아니었는데?
  • 설마 우리 아들을 조롱하려고 일부러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온 건가? 사이코 패스 아냐?!
  • 어리둥절해 하는 지애란과 달리, 염우영은 장미란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어제 진천후가 보낸 선물이 탐난 것일 테지.
  • 돈만 밝히는 여자는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 “저거 미친 여자 아냐?”
  • 지애란을 따라 나온 염윤설은 멀어지는 장미란의 뒷모습을 보며 허리를 짚은 채 씩씩거렸다.
  • “동생아, 그 미친 여자가 한 말을 마음에 새기지 마. 아니, 상대도 하지 마!”
  • 염윤설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염우영을 다독였지만 염우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어머니, 누나,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 결혼했어요!”
  • “뭐?!”
  • 지애란과 염윤설이 동시에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특히 높은 데시벨을 자랑하는 염윤설의 목소리에 집 안의 유리창에 금이 갈 뻔했다.
  • “결혼했다고?”
  • “누구랑?”
  • “농담이지? 너 여태 여자친구 한 번 사귄 적 없잖아!”
  • 두 모녀는 염우영을 둘러싸고서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 염우영은 대답 대신 혼인 신고서를 꺼내 두 사람의 앞에 내놓았다.
  •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 지애란과 염윤설은 일순 넋이 나갔다.
  • 두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혼인 신고서에 붙인 사진을 향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 “엄청 까칠해 보이는데?”
  • “결혼 사기꾼은 아니겠지?”
  • 가족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염우영은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사실은 북강에서 군인으로 있을 때 만났던 분이에요. 강한 성격인 데다 수줍음이 많은 분이라 여태 연애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던 거예요.”
  • “그런 거였어?”
  • 두 모녀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여자를 소개할라치면 학을 떼더라니, 만나는 여자가 있었구나.
  • “숨겨서 미안해요. 그동안은 유월이 사업 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로 했던 겁니다. 아무튼 무사히 혼인신고를 마쳤으니 이제 더 이상 제 결혼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랑 유월이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 염우영의 호언장담에도 두 모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 특히 염윤설은 염우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면 18 번의 맞선을 보는 동안 한 번도 언질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
  • 그녀가 알고 있는 동생이라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테니 염윤설은 염우영의 거짓말을 부러 들추어내지는 않았다.
  • “뭐 하는 사람이야? 혼인 신고까지 했는데 왜 집에 데려오지 않았어?”
  • 하지만 어머니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 역시나 염우영의 예상대로 지애란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긴,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겠는가! 그의 어머니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오늘도 급하게 회의가 잡혀서 함께 오지 못했어요.”
  • “뭐? 그럼 밤에는 어디서 머무는데?”
  • 지애란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건 걱정 마세요! 유월이 명의로 된 집도 있고 앞으로 그 집에서 함께 살 예정입니다!”
  • “그럼—”
  • 그 순간, 지애란의 눈가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염윤설도 동생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굳게 마음을 먹고 지애란을 달랬다.
  • “엄마, 우영이도 이젠 어른이에요.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게 될 텐데 평생 옆에 끼고 살 생각이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안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떤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눈치가 보여서 부부생활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 도리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 “우영이 네가 좋다면 이 엄마도 반대할 생각 없어.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언제 시간 날 때 집에 데려오면 안 될까? 사돈도 한 번 만나봐야 하지 않겠어?”
  • 지애란이 간절한 표정으로 간청했다.
  • 사실 그 정도는 당연한 요구였지만 염우영은 난감했다.
  • 진유월 같은 여자를 어떻게 그가 사는 단층집에 부르겠는가.
  • 진유월이 정확히 어떤 직책에 있는지, 슈퍼 울트라 다이아 수저인 것도 알지 못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있는 옷차림만 보아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비싼 옷을 더럽혔다고 화만 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 사돈 보기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 듣자 하니 그와의 결혼도 할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한 거라던데 이 연극에 자신의 가족들을 끌어들일 리 만무했다.
  • 이제 어떡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