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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화위복

  • 양방의 감정에서 언제나 주동적인 쪽이 지고 들어가는 법이었다.
  • 염우영 일가족이 직접 찾아오자 장미란은 카페에서보다 열 배는 더 거만해졌다.
  •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넘쳤던 장미란은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 염우영이라면 분명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 그녀의 예상대로 염우영 일가족이 집에까지 찾아와 끈질기게 달라붙자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 장미란의 모친 유숙빈은 염우영 일가족이 찾아온 이유를 깨닫자마자 바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 “그쪽 아들을 우리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싶다면 예물로 1억을 보내셔야 합니다. 한 푼이라도 모자라는 한, 이 혼사는 없던 일로 칠 테니 그런 줄 아세요!”
  • 유숙빈의 요구에 염우영은 바로 마음을 접었다.
  • 결혼 예물로 1억을 요구하다니. 유숙빈은 아주 당당하게 딸을 팔아넘기고 있었다.
  •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지애란은 아들의 결혼을 위해 이를 악물고 승낙했다.
  • “그… 그럼요!”
  • 상대 여자가 아들과 결혼할 의향이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예물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 “그리고 신혼집과 차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건 아시죠? 전 우리 딸을 시집보내고 신랑 측의 할부금을 같이 상환하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 장미란 부친의 말에 염우영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 결혼은 서로 원해서 하는 거 아니었나?
  • 남녀평등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전쟁에서 항복하고 땅을 떼어 배상하듯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 지애란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 1억 정도는 집을 팔아 마련할 수 있다고 쳐도 갑자기 신혼집과 차는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 “네, 문제없습니다!”
  • 그때, 잠자코 있던 염윤설이 동생을 대신해 장미란 부친의 요구를 승낙했다.
  • 그러고는 조용히 화를 내려는 듯한 염우영의 팔을 누르며 가만히 있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 염윤설도 동생이 얼른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다. 올해 30 살인 염윤설은 지난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저축이 있었다.
  • 엄마가 예물을 마련하면 신혼집과 차 계약금은 그녀가 대신 지불할 생각이었다.
  •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신랑 측에서 모든 가계지출을 부담했으면 해요.”
  • 장미란도 여세를 몰아 자신의 요구를 제출했다.
  • 결국 듣다 못한 염우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분통을 터뜨렸다.
  • “딸을 시집보내는 겁니까, 아니면 딸을 파는 겁니까? 우리 집에 고용인으로 취직하고 싶다면 이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 공주나 여왕으로 오고 싶은 거라면, 죄송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 “이것 봐! 당신 아들 보세요! 이게 지금 우리 미란이한테 장가 들려는 사람의 태도예요?”
  • 장미란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날카롭게 말했다.
  • “결혼하기도 전에 이러는데 결혼하면 더할 거 아니에요!”
  • “아니, 아니, 아닙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요. 걱정 마세요!”
  • 지애란은 조심스럽게 장미란 일가족의 눈치를 살피며 달랬다.
  • 아들은 결혼하지 못해도 그만이라지만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올해 안에 남편의 소원을 꼭 이루고 싶었다.
  • “엄마, 그만해요!”
  • 결국 염윤설도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장미란을 제지했다.
  • 동생의 말이 맞았다.
  • 신부 측에서 예물을 요구하든, 신혼집과 차를 요구하든 적절한 선에서 들어줄 수 있지만 결혼하고 나서도 동생에게 독박 부양을 시키는 건 너무 파렴치한 요구였다.
  • 염우영이 홀로 가족을 부양하면 장미란이 벌어들이는 돈은 어디다 쓸 건데? 전부 친정에 보내려고?
  • “하하, 누나, 날 잊은 건 아니겠지!”
  • 장미란의 동생도 서둘러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 “나중에 내가 결혼할 때 우리 신혼집이랑 차도 누나랑 형부가 해줘야지!”
  • 결국 염우영은 폭발했다.
  • “대체 난 누구랑 결혼하는 거야? 당신이야? 아니면 당신 가족이야? 이럴 거면 차라리 나한테 온 가족을 부양해 달라고 해!”
  •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장미란은 차갑게 냉소하며 비아냥거렸다.
  • “그 말 진심이지? 그럼 결혼식 연회, 신혼여행 모두 당신한테 맡길게! 설마 그 정도 능력도 없는 건 아니지?”
  • “닥쳐! 차라리 돼지와 결혼할지언정 너 같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아!”
  • 염우영은 분노한 나머지 상을 엎고 싶었다.
  • 전장에서 뛰어다닐 때 느꼈던 들끓는 감정이 다시 솟구치는 것 같았다.
  • 이토록 뻔뻔스러운 가족은 난생처음이었다. 일가족 모두 사악한 요귀들이었다.
  • “이봐, 이봐! 누가 성질도 더럽고 무식한 사람 아니랄까 봐! 그런 주제에 감히 나를 넘봐? 꿈 깨! 차라리 돼지한테 시집갈지언정 너 같은 남자한테는 안 가!”
  • 장미란도 질 수 없다는 듯 이죽거렸다.
  • 이 정도 외모와 몸매라면 재벌 2세도 꼬실 자신이 있었다.
  • 원래도 염우영처럼 가난한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장미란은 염우영이 먼저 화를 내고 혼사를 번복하자 오히려 잘 됐구나 싶었다.
  •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던 염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 지애란과 염윤설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염우영을 따라나섰다.
  • 하지만 장가를 나서자마자 돌연 세 대의 고급 승용차가 그들 앞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 난데없는 소동에 깜짝 놀란 장 씨 일가도 얼른 나와 어찌 된 영문인지 살펴보았다.
  • 그러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고급 승용차 세 대를 발견하고는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들 집에 올만한 사람 중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부호는 없는데?
  • 염우영은 문득 그중 한 대를 일전에 카페 앞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자 다음 순간, 달칵하고 차 문이 열리고 진천후가 정장을 차려입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 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염우영에게 다가오더니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일전에 카페 앞에서 도와줘서 감사하네. 오늘은 보답하러 왔다네!”
  •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염윤설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염우영의 팔을 꼭 붙잡았다.
  • 넝쿨째 굴러들어 올 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 염우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천후를 훑어보았다. 눈앞의 노인이 정말로 부자일 줄은 몰랐다.
  • 일전에 카페 앞에 쓰러져 있던 것도 연기였나?
  • 그때, 진천후가 손을 휘젓자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끊임없이 차에서 선물 상자를 옮겨왔다.
  • 각종 진귀한 금은보화와 그림, 골동품은 물론, 포르쉐 차 키까지, 어림잡아도 수십억은 되어 보였다.
  • 연 3000만의 연봉을 받고 있는 염우영에게는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큰돈이었다.
  • 오, 지저스!
  • 예기치 못한 전개에 장 씨 일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제아무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치장으로 둘렀다고 해도 장미란은 그냥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들 가족에게도 수십억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 염우영이 수십억을 가지고 있는 자산가라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당장 결혼하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장미란은 재빨리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염우영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 “자기야, 어떻게 된 거야? 길가에 쓰러진 노인을 부축하다니, 우리 자기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 몰랐네! 너무 멋져!”
  • “내가 왜 그쪽 자기야?”
  • 하지만 이내 염우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장미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 병균을 퇴치하듯 잽싸게 장미란을 밀어낸 염우영은 미친 여자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바로 전에 날 거절했던 것 같은데, 그새 잊었어? 무슨 낯짝으로 날 자기라고 불러?”
  • “어? 그건—”
  • 장미란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있던 장미란의 가족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 그동안 장미란의 짝으로 숱한 남자들을 골랐는데 황금알을 낳는 사위인 줄도 모르고 쫓아내다니!
  • 지애란이 무어라 얘기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염윤설이 얼른 끌어당겼다.
  • 그녀 또한 동생이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장미란은 아니었다. 방금 전 장 씨 일가들이 그들에게 했던 행동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에서 열불이 났다.
  • 게다가 이제 동생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는데 결혼할 여자 하나 찾지 못할까.
  • “어머니, 누나, 가요!”
  • 염우영은 망설임 없이 지애란과 염윤설을 데리고 진천후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 자고로 아무런 이유 없이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 애초에 이 선물들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일단 장미란을 열받게 하기 위해 살짝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 염우영 일가족이 떠나고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적막만 감돌았다.
  • 장 씨 일가의 얼굴들에 괴로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 “딸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요즘 같은 세월에 재산이 수억 원이 넘는 남자를 찾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 유숙빈은 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 “그… 그럼 이제 어떡해?”
  • 장미란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바를 몰랐다.
  • 사실 그녀도 선을 많이 봤지만 염우영 같은 부자를 만난 적 없었다.
  • 선을 본 이유가 뭐겠는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팔자나 좀 고쳐보려고 했던 것인데 수억 원을 가진 부자를 이렇게 완벽하게 놓칠 줄이야!
  •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쪽 집안에서도 우리 집으로 찾아왔는데 우리라고 그쪽 집안에 찾아가서 혼담을 꺼내지 말란 법 없잖아!”
  • 유숙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 그러자 장무현도 다급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난 몰라. 누나는 무슨 일 있어도 방금 그 부자 놈이랑 결혼해야 돼! 나중에 내가 여자친구랑 결혼할 때 그 부자 놈을 꼬셔서 집도 해주고 외제차도 해줘야지! 안 그럼 누나와 연을 끊을 거야!”
  • “알았어, 알았다고!”
  • 장무현과 유숙빈의 성화에도 장미란은 화를 내기는커녕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하지만 염우영과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마당에 그쪽에서 과연 그녀를 만나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