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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초스피드 결혼의 후유증

  • 마침내 집을 찾았다. 원래도 여자랑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금 전의 불쾌한 기분은 까맣게 잊혔다.
  • 방 4개에 거실 3 개인 집은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 비록 그의 집도 방 3 개에 거실 2 개짜리 단층집이었지만 그보다 두 배는 더 넓었고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미로 같은 집안 구조에 길을 잃을 뻔했다.
  • 언뜻 보기에는 필요한 것들이 전부 갖추어져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듯했지만 생필품이 거의 없었다.
  • 그 말인즉슨 진유월은 이 집에 거의 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 역시 부자들은 낭비를 좋아하는구나!
  • 그들 가족은 세 명이서 25평짜리 집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데 이 여자는 60평짜리 집을 사놓고도 종종 비워두고 있었다니.
  • 진유월이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하고 그를 이 집에 숨겨두지 않았다면 평생 홀로 외롭게 썩어갔을 것이다…
  • 퉤퉤퉤!
  • 숨겨두다니?!
  • 염우영은 곧 죽어도 자신이 여자 등이나 쳐먹는 기생오라비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 이건 어디까지나 뜻이 맞는 파트너와 함께 살면서 각자 원하는 바를 취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집세 대신 매달 월급에서 100만 원을 상납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 방은 모두 4 개였지만 그중 가장 큰 방안의 옷장에만 옷이 들어있었다. 비록 전부 새 옷이었지만.
  • 아마도 여기가 진유월 그 거미 요정의 반사동일 테지.
  • 스타일 별로 갖추어져 있는 코트와 달리 속옷은 두세 벌뿐이었다.
  • 그 좋은 몸매를 두고 순면 재질의 흰색 아니면 검은색 속옷이라니, 좀 섹시한 속옷을 입으면 어디 덧나나.
  • 주인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기에 재빨리 진유월의 방에서 나온 염우영은 그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 남성 혐오증이 있는 여자이니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 각오는 있었다.
  • 꾸르륵.
  •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는 소리에 염우영은 반사적으로 주방에서 어슬렁거렸다.
  • 음식 빼고 없는 것이 없는 주방을 둘러보며 염우영은 난색을 표했다.
  • 제아무리 번쩍번쩍한 고급 주방기구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당장 배를 채울 만한 것이 없는데!
  • 어차피 당분간 집에 돌아가는 건 그른 것 같으니 이 집이라도 살만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염우영은 서둘로 동네 마트로 향했다.
  • 배가 너무 고팠던 염우영은 일단 빵으로 대충 배를 채우고서 천천히 물건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 같은 시각, 천강 그룹.
  • 회의를 마치고 나온 진유월은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느덧 9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 진유월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업무상의 일을 생각하며 벤틀리에 올라탔다.
  • 운전기사는 평소대로 강북에 위치한 그녀의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진유월이 돌연 나지막이 외쳤다.
  • “차 세워요!”
  • “왜 그러십니까, 대표님?”
  • 운전기사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 하지만 진유월은 뒤늦게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고 사실대로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진가 별장에 발을 들일 생각하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 여자는 죽어도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하는 건 이 나라의 오랜 전통이었다.
  •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그녀라고 해도 결혼하면 남편과 함께 살아야 했다.
  • “포엠 아파트로 가주세요.”
  • “네, 대표님!”
  • 갑자기 차를 돌리라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운전기사는 감히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진유월의 옆에 유일한 남성 운전기사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눈치가 있고 몸을 사릴 줄 알기 때문이었다. 괜히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해고되고 싶지 않았다.
  • 어디 가서 이렇게 높은 봉급을 주는 일자리를 또 구한단 말인가.
  • 염우영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0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 나갈 때도 불을 끄지 않았고 집안도 나갈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깔끔했기에 진유월이 15 분 전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쇼핑에 집중하느라 땀에 흠뻑 젖었던 탓에 염우영은 돌아오자마자 바로 상의를 벗어던지고서 욕실로 향했다.
  • 하지만 문을 밀고서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찰나, 염우영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고 눈을 깜빡이는 걸 잊은 사람처럼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서 목욕을 즐기고 있는 진유월이 있었다. 물 밖으로 눈처럼 새하얀 발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 분홍빛이 감도는 발가락은 눈밭의 매화처럼 앙증맞고 귀여웠다.
  • 욕조에 거품이 가득 차 있었지만 언뜻언뜻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흘러간 염우영의 시선이 관능적인 몸매를 훑었다.
  • 쿵!
  • 쿵!
  • 빌어먹을! 또 시작이네!
  • 심장이 지난번보다 열 배는 더 격렬하게 뛰었다.
  •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면서 여자의 몸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한 번도 감흥이 생긴 적이 없었다.
  • 하지만 진유월은 달랐다.
  • “다 봤으면 눈알 도려내기 전에 눈 돌리시죠?”
  • 진유월도 처음에는 놀란 듯하더니 비명을 지르는 대신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죽일 듯 염우영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위협했다.
  •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 샤워할 때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죄송합니다. 돌아오신 줄 몰랐어요!”
  • 등골이 오싹해진 느낌에 염우영은 황급히 욕실을 뛰쳐나갔다.
  •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욕실을 나오자마자 염우영은 벽에 기댄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 0.5초라도 늦었으면 산소 부족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 상대의 습관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초스피드로 결혼하니 이런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 눈빛은 무서웠지만 몸매는 정말 훌륭한 여자였다. 몸 구석구석 매력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 여자의 벗은 몸에 면역이 생겼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
  • 같은 시각, 욕실.
  • 진유월도 가슴을 단단히 가린 채 심호흡을 거듭했다.
  • 염우영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었지만 염우영이 나가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남자한테 몸을 보이다니!
  • 법적으로는 남편인 데다 불쾌한 표정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구역질이 났다.
  • “역시 괜히 결혼했어…”
  • 진유월은 체념하듯 탄식을 내뱉었다.
  • 사실 진유월은 염우영이 일부러 그런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 어릴 적부터 의심이 많았던 그녀는 염우영이 두 번의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하는 순간부터 염우영은 아주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 부잣집 아가씨인 그녀의 신분을 알고서 일부러 돈이나 여색에 관심이 없는 척 연기한 것임이 분명했다.
  • 진유월은 이 세상에 욕망이 없는 동물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특히 남자는 더더욱.
  • 하지만 아직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니 일단은 계속 염우영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 목욕을 마치고 욕실을 나선 진유월은 자연스럽게 거실로 향했다.
  • 소파에 앉아 기계적으로 TV 리모컨을 누르고 있던 염우영은 다가오는 진유월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 “진유월 씨, 앞으로는 목욕하고 속옷을 입고 나오면 안 되겠습니까?”
  • 염우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 피부가 희고 관능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는 진유월이 향긋한 바디워시 향을 풍기며 매미 날개처럼 얇은 잠옷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 산부인과 의사인 데다 평소 여자의 몸에 면역이 생긴 염우영이었기에 코피를 흘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 “흥. 그쪽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 그렇게 말하며 진유월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염우영을 쏘아보았다.
  • 정말 불편해서 같이 못 살겠네! 어떤 여자가 목욕을 마치고 속옷을 입고 나와?
  • 자유로운 삶을 선호하는 진유월에게 갑자기 생긴 불청객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았다.
  • “그럼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 염우영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좋든 싫든 앞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했기에 조금은 이야기를 나눠볼 요량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듯했다.
  • 진유월과는 평생 친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 앞으로 이런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하지만 막 몸을 돌린 찰나, 등 뒤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뒤돌아보니 진유월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살결에 염우영은 혼이 빨려 들어갈 뻔했다.
  • “이봐요, 진유월 씨! 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