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18 번째 고배

  • 룸에서 나오자마자 진유월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8 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 기다리다 지친 것인지 잔뜩 골이 난 모습이었다.
  • 오피스룩 차림의 여자는 매력적인 몸매에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 진유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디 가서 꿀릴 법한 외모는 아니었다.
  • 자신의 조건을 알고 있기에 염우영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다가간 염우영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염우영입니다. 나이는 28 살이고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연봉은 3000만에—”
  • “잠깐!”
  • 염우영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 “이봐요. 지금 나랑 장난해? 그 조건으로 정말 결혼할 여자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조건이 안 되면 인품이라도 좋든가. 그런 주제에 감히 지각을 해? 당신이 뭔데 날 기다리게 만들어? 시간 낭비만 했잖아!”
  • 화가 난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와다다 쏟아내던 여자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올리더니 염우영의 얼굴에 뿌렸다.
  • 촥!
  •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염우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 장소를 착각하고 지각한 건 그의 잘못이었으니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 “흥. 28 살에 연봉 3000만이라니. 여태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네! 시간관념도 없고 능력이 없으니 평생 밑바닥 인생이지! 언감생심 나를 넘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죽었다 깨도 그쪽이랑은 결혼할 생각 없으니 꿈 깨!”
  • 멸시 가득한 눈으로 염우영을 훑어보던 여자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가방을 낚아채고서 떠났다.
  •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 그뿐만이 아니었다.
  • 두어 걸음 만에 돌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돌아온 여자는 지갑에서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들더니 보란 듯이 염우영의 눈앞에서 흔들어대고는 탁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그 모습에 염우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 이 여자는 지금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 결혼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해서 성깔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 방금 한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 여자가 떠나고 염우영도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를 나섰다.
  • 막 카페에서 나오려던 찰나, 웬 장발의 사내가 마주 오는 BMW 차량에 뛰어들더니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 일부러 차량에 뛰어든 것임이 분명했다.
  • 염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뭔 놈의 카페가 이렇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거야?
  • “사람이 부딪혔어요!”
  • “으악! 다리가 부러졌어! 아이고, 나 죽네!”
  • 장발의 사내가 쓰러지자마자 돌연 어딘가에서 서너 명의 사내들이 뛰어나오더니 고래고래 소란을 피워댔다.
  • 염우영은 사내들이 자해공갈단임을 단박에 간파했다.
  • 그때, BMW 차량에서 묘령의 여자가 황급히 내려왔다.
  • 붉은 민소매 원피스에 순백의 피부를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탐스럽게 열린 여지 같았고 길쭉하게 뻗은 뽀얀 다리와 보일 듯 말 듯 한 가슴골이 눈 돌아갈 만큼 섹시했다.
  • “괜찮으세요? 저 진짜 천천히 운전한 거라 다리가 부러질 리 없는데…”
  •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변명했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비나 줘요! 얼른!”
  • 장발 사내의 친구들은 분개하며 여자를 포위했다.
  • 사내들이 자해공갈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사내들의 건장한 체구에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잠자코 제 갈 길을 갔다.
  • “얼마면 돼요?”
  • 여자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대충 돈을 쥐여주고 해결을 보려 했지만 노골적인 시선으로 여자의 가슴골을 훑어보던 사내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 무리 중의 한 사내가 여자의 원피스 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 “하하, 예쁜 아가씨, 그러지 말고 오빠들이랑 재미있는 놀이할까?”
  • 노골적인 희롱에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던 여자는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염우영과 부딪혔다.
  • 성큼 앞으로 걸어 나온 염우영은 여자를 등 뒤로 숨겨주며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발의 사내에게 말했다.
  • “다리가 부러졌다고요? 치료비 필요해요?”
  • 염우영의 음산한 표정과 서슬 퍼런 시선에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 같은 시각, 카페 창가에 앉아있던 진유월은 카페 입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의외로 배짱 좋네!
  • 혼자서 깡패 다섯 명을 상대하다니,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배짱이 아니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염우영이 장발남의 다리를 세게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 “끄악—!”
  • 다리가 부러졌다고 주장하던 장발남은 다리를 잡고서 펄쩍펄쩍 뛰었다.
  • 거침없는 염우영의 행동에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 이 남자 독종이네!
  • 진유월도 붉은 입술을 씩 말아올렸다.
  • 카페는 그녀의 소유였기에 방금 염우영이 맞선을 보는 모습도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다.
  • 여자한테 물벼락을 맞고도 조금도 반격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그냥 여자한테 화를 내지 않는 남자였던 것이다.
  • 진유월은 그런 염우영보다 지금의 독기 어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지 않았나? 잘만 뛰어다니네!”
  • 염우영은 싸늘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 염우영이 앞장서서 자해공갈단의 사기 행각을 들추어내자 주변 사람들도 장발남의 다리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앞다투어 나서기 시작했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깡패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
  • “흥. 너 잘났다, 그래! 두고 봐!”
  •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자해공갈단은 악당 다운 말을 남기고서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다.
  • “잘생긴 오빠, 고마워요. 저희 집에 술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요?”
  • 자해공갈단이 도망치고 일이 일단락되자 붉은 원피스의 미녀가 갑자기 염우영에게 몸을 바짝 밀착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 부드럽게 휘어진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괜찮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 여자의 열성적인 초대에도 염우영은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
  •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염우영의 모습에 붉은 원피스의 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
  • 매력이 부족했나? 이렇게 적극적인데 어떻게 눈길 한 번 안 줄 수 있지?
  • “하하…”
  • 진천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 “유월아, 방금 봤지? 내가 제대로 된 총각이라고 했잖아! 네 비서 소윤처럼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남자야. 결혼한 뒤에도 바람피울까 걱정할 필요 없겠어!”
  • 진유월은 할아버지의 얘기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번 일로 염우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 진유월이 남자를 혐오하게 된 데에는 여색을 밝히는 남자들의 너절한 성품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 하지만 염우영이라는 저 남자는 다른 남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 “할아버지, 기뻐하시기에는 아직 일러요. 여색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재물을 밝히는 남자일 수도 있어요.”
  • 진유월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염우영이 그녀의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한편, 집으로 돌아온 염우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선에 실패했음을 알렸다.
  • “뭐? 이번에도 꽝이라고?”
  • 염우영의 누이 염윤설은 한풀 기가 꺾인 채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모습에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 이것으로 열여덟 번째였다!
  • 183 센티미터의 모델 같은 큰 키에 꽤나 잘생긴 얼굴인데 왜 따르는 여자가 없지?
  • 제아무리 연애 지식도 없고 센스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 남자라고 해도 이 정도 인물이면 혹할 법도 한데?
  • 염우영의 모친 지애란은 염윤설보다 더욱 가슴이 타들어갔다. 아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애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들을 끌고서 집을 나섰다.
  • “뭐 하시는 거예요?”
  • 약이 바싹 오른 지애란의 표정에 염우영은 덜컥 겁이 났다.
  • “뭐 하는 거긴! 너 때문에 속이 타서 그러는 거 아냐! 그것도 몰라?”
  • 지애란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울분을 토했다.
  • “백날 천 날 집에만 틀어박혀 인터넷 소실인지 뭔지 하는 걸 끄적이는 옆집 칠뜨기도 올해 벌써 둘째 낳을 생각을 하고 있던데 우리 아들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여태 여자친구도 못 찾는 거야? 그 여자,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고 했지? 중매쟁이한테 웃돈까지 얹어줬는데 그럼 안 되지! 지금 당장 찾아가서 오늘 다 못한 맞선을 마저 보자고 하자!”
  • “네?!”
  • 염우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가 이 정도로 자신의 결혼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 맞선에 실패했다고 상대의 집에 찾아가겠다니! 굴욕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