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에서 나오자마자 진유월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8 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기다리다 지친 것인지 잔뜩 골이 난 모습이었다.
오피스룩 차림의 여자는 매력적인 몸매에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진유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디 가서 꿀릴 법한 외모는 아니었다.
자신의 조건을 알고 있기에 염우영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다가간 염우영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염우영입니다. 나이는 28 살이고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연봉은 3000만에—”
“잠깐!”
염우영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이봐요. 지금 나랑 장난해? 그 조건으로 정말 결혼할 여자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조건이 안 되면 인품이라도 좋든가. 그런 주제에 감히 지각을 해? 당신이 뭔데 날 기다리게 만들어? 시간 낭비만 했잖아!”
화가 난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와다다 쏟아내던 여자는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올리더니 염우영의 얼굴에 뿌렸다.
촥!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지만 염우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장소를 착각하고 지각한 건 그의 잘못이었으니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흥. 28 살에 연봉 3000만이라니. 여태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네! 시간관념도 없고 능력이 없으니 평생 밑바닥 인생이지! 언감생심 나를 넘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죽었다 깨도 그쪽이랑은 결혼할 생각 없으니 꿈 깨!”
멸시 가득한 눈으로 염우영을 훑어보던 여자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가방을 낚아채고서 떠났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어 걸음 만에 돌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돌아온 여자는 지갑에서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들더니 보란 듯이 염우영의 눈앞에서 흔들어대고는 탁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에 염우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여자는 지금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결혼에 대한 기대가 없다고 해서 성깔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방금 한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여자가 떠나고 염우영도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를 나섰다.
막 카페에서 나오려던 찰나, 웬 장발의 사내가 마주 오는 BMW 차량에 뛰어들더니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일부러 차량에 뛰어든 것임이 분명했다.
염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뭔 놈의 카페가 이렇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거야?
“사람이 부딪혔어요!”
“으악! 다리가 부러졌어! 아이고, 나 죽네!”
장발의 사내가 쓰러지자마자 돌연 어딘가에서 서너 명의 사내들이 뛰어나오더니 고래고래 소란을 피워댔다.
염우영은 사내들이 자해공갈단임을 단박에 간파했다.
그때, BMW 차량에서 묘령의 여자가 황급히 내려왔다.
붉은 민소매 원피스에 순백의 피부를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탐스럽게 열린 여지 같았고 길쭉하게 뻗은 뽀얀 다리와 보일 듯 말 듯 한 가슴골이 눈 돌아갈 만큼 섹시했다.
“괜찮으세요? 저 진짜 천천히 운전한 거라 다리가 부러질 리 없는데…”
여자가 초조한 얼굴로 변명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료비나 줘요! 얼른!”
장발 사내의 친구들은 분개하며 여자를 포위했다.
사내들이 자해공갈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사내들의 건장한 체구에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잠자코 제 갈 길을 갔다.
“얼마면 돼요?”
여자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대충 돈을 쥐여주고 해결을 보려 했지만 노골적인 시선으로 여자의 가슴골을 훑어보던 사내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리 중의 한 사내가 여자의 원피스 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하, 예쁜 아가씨, 그러지 말고 오빠들이랑 재미있는 놀이할까?”
노골적인 희롱에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던 여자는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염우영과 부딪혔다.
성큼 앞으로 걸어 나온 염우영은 여자를 등 뒤로 숨겨주며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발의 사내에게 말했다.
“다리가 부러졌다고요? 치료비 필요해요?”
염우영의 음산한 표정과 서슬 퍼런 시선에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같은 시각, 카페 창가에 앉아있던 진유월은 카페 입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동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의외로 배짱 좋네!
혼자서 깡패 다섯 명을 상대하다니,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배짱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염우영이 장발남의 다리를 세게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끄악—!”
다리가 부러졌다고 주장하던 장발남은 다리를 잡고서 펄쩍펄쩍 뛰었다.
거침없는 염우영의 행동에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 독종이네!
진유월도 붉은 입술을 씩 말아올렸다.
카페는 그녀의 소유였기에 방금 염우영이 맞선을 보는 모습도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다.
여자한테 물벼락을 맞고도 조금도 반격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그냥 여자한테 화를 내지 않는 남자였던 것이다.
진유월은 그런 염우영보다 지금의 독기 어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지 않았나? 잘만 뛰어다니네!”
염우영은 싸늘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염우영이 앞장서서 자해공갈단의 사기 행각을 들추어내자 주변 사람들도 장발남의 다리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앞다투어 나서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깡패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
“흥. 너 잘났다, 그래! 두고 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자해공갈단은 악당 다운 말을 남기고서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다.
“잘생긴 오빠, 고마워요. 저희 집에 술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요?”
자해공갈단이 도망치고 일이 일단락되자 붉은 원피스의 미녀가 갑자기 염우영에게 몸을 바짝 밀착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여자의 열성적인 초대에도 염우영은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염우영의 모습에 붉은 원피스의 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매력이 부족했나? 이렇게 적극적인데 어떻게 눈길 한 번 안 줄 수 있지?
“하하…”
진천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유월아, 방금 봤지? 내가 제대로 된 총각이라고 했잖아! 네 비서 소윤처럼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남자야. 결혼한 뒤에도 바람피울까 걱정할 필요 없겠어!”
진유월은 할아버지의 얘기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번 일로 염우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진유월이 남자를 혐오하게 된 데에는 여색을 밝히는 남자들의 너절한 성품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염우영이라는 저 남자는 다른 남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할아버지, 기뻐하시기에는 아직 일러요. 여색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재물을 밝히는 남자일 수도 있어요.”
진유월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염우영이 그녀의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염우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선에 실패했음을 알렸다.
“뭐? 이번에도 꽝이라고?”
염우영의 누이 염윤설은 한풀 기가 꺾인 채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모습에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것으로 열여덟 번째였다!
183 센티미터의 모델 같은 큰 키에 꽤나 잘생긴 얼굴인데 왜 따르는 여자가 없지?
제아무리 연애 지식도 없고 센스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 남자라고 해도 이 정도 인물이면 혹할 법도 한데?
염우영의 모친 지애란은 염윤설보다 더욱 가슴이 타들어갔다. 아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애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들을 끌고서 집을 나섰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약이 바싹 오른 지애란의 표정에 염우영은 덜컥 겁이 났다.
“뭐 하는 거긴! 너 때문에 속이 타서 그러는 거 아냐! 그것도 몰라?”
지애란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울분을 토했다.
“백날 천 날 집에만 틀어박혀 인터넷 소실인지 뭔지 하는 걸 끄적이는 옆집 칠뜨기도 올해 벌써 둘째 낳을 생각을 하고 있던데 우리 아들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여태 여자친구도 못 찾는 거야? 그 여자,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고 했지? 중매쟁이한테 웃돈까지 얹어줬는데 그럼 안 되지! 지금 당장 찾아가서 오늘 다 못한 맞선을 마저 보자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