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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상대가 재벌 상속녀

맞선 상대가 재벌 상속녀

G훈

Last update: 2024-02-20

제1화 얼떨결에 맞선

  • “아, 알겠다고요, 어머니! 다 와가요. 끊을게요!”
  • 염우영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 올해 28 살인 염우영은 여태 연애 경험이 전무했다.
  • 7 년 동안 군대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뒤로 운성의 한 병원에서 연 3000만이라는 박봉을 받으며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한지도 어언 3 년이 흘렀다.
  • 염우영의 모친은 얼른 장가를 들라며 재촉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여자친구를 찾을 능력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맞선 시장에 뛰어들었다.
  • 오늘도 성화에 못 이겨 18 번째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이번에도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절하면 또 한바탕 잔소리 폭격을 쏴댈 것임이 분명했기에 마지못해 약속 장소로 향했다.
  • 그야말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 약속 장소인 카페로 막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돌연 들려오는 미약한 목소리에 염우영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길가에 쓰러져 있는 노인이 보였다. 사람들은 쓰러진 노인을 힐끗 바라보며 스쳐 지나갈 뿐, 아무도 나서서 노인을 부축하지 않았다.
  • 그도 그럴 것이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가 도리어 돈을 뜯긴 사례가 허다했기에 은행 잔고가 텅 빌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노인을 부축하려는 멍청이는 없었다.
  • 그에 반해 염우영은 어차피 털릴 돈도 없었기에 노인에게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 “괜찮네! 고맙소, 참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젊은이일세. 내 꼭 보답하겠네!”
  •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염우영은 그제야 초라한 행색과 달리 깨끗한 노인의 손톱을 발견했다.
  • 왠지 모르게 귀티가 흐르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간 데다 노인이 괜찮다고 하자 서둘로 카페로 들어갔다.
  • 꼭 보답하겠다던 노인의 얘기는 진작 까맣게 잊힌 뒤였다.
  • 미로처럼 크고 거대한 카페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모친으로부터 들은 8 번 테이블을 찾지 못한 염우영은 얼떨결에 홀과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구역에 들어섰다.
  •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볕과 화사한 꽃으로 뒤덮인 그곳엔 산들바람이 불고 은은한 꽃향기가 흘렀다.
  • 얼떨떨한 얼굴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공간을 구경하던 염우영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 바로 앞에 위치한 테이블에 월궁의 항아와도 같은 아리따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티 없이 맑고 흰 피부까지, 조물주가 유독 빡세게 공들여 만든 듯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미인이었다.
  •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여인은 갑자기 자신의 공간에 들이닥친 염우영의 등장에 읽고 있던 원서를 탁하고 덮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눈을 치켜떴다.
  •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혐오감을 드러내는 모습에도 염우영은 쿵쿵 터질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주체되지 않았다.
  • 28년을 살았지만 이토록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여인은 없었다.
  • 특히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수많은 여성의 몸을 본 뒤로는 여성에 대한 관심조차 시들해졌었다.
  •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보는 순간,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 긴장한 것인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들뜬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돌리던 염우영은 그녀가 앉은 테이블에 적힌 커다란 숫자 8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설마 그 맞선 상대가 이 여자였어?!
  • 심호흡을 하며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염우영은 당당히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았다.
  • 그 모습에 여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서슬 퍼런 눈으로 염우영을 쏘아보았다.
  • 간땡이가 부었네! 그녀의 룸에 침입한 거로도 모자라 감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 자신을 향한 멸시 가득한 표정에 진작 면역이 생긴 염우영은 여인의 찌를 듯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차피 그도 대충 눈도장만 찍고 갈 생각이었으니.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염우영입니다. 나이는 28 살이고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연봉은 3000만에 집도, 차도 없습니다.”
  • 처음 보는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 테지만 염우영은 자신의 무능함을 털어놓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듯 여유마저 흘러넘쳤다.
  •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염우영을 바라보던 여인은 탐스러운 빛이 감도는 붉은 입술을 장난스럽게 말아 올렸다.
  • “안녕하세요, 진유월이에요. 나이는 27 살이고 하버드 대학교 금융재무학과와 경영학과에서 복수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지난해 수입은 5000억 정도였고 집도 있고 차도 있어요.”
  • 예기치 못한 대답에 염우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 맞선으로 결혼 상대를 찾는 여자들은 다들 어딘가 결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염우영은 눈앞의 여자에게서 아주 작은 결함이라도 찾을 수 없었다.
  • 설마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다리를 절나? 그것도 아니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인가?
  •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염우영의 뇌리에서 소용돌이쳤다.
  • 염우영의 표정을 살펴보던 진유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눈동자에 자긍심이 넘쳤다.
  • 방금 그녀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말라는 뜻으로 일부러 자기소개를 한 것이었다.
  •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 그래!
  • 이 여자가 한 말이 거짓이든 참이든 염우영은 일단 맞선을 마무리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야지 돌아가서 대충 얼버무릴 핑곗거리라도 생겼다.
  • “비록 수입은 적지만 저와 결혼한다면 평생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할 겁니다. 집안일도 모두 제가 전담할 테니 집에서는 여왕처럼 부려먹으셔도 됩니다. 대신 밖에 있을 때나 저희 가족 앞에서는 사내로서의 체면을 세워주길 바랍니다. 제 한 달 월급이 250만 원 정도인데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그중의 200만 원을 생활비로 드릴 겁니다. 그리고…”
  • 모든 맞선 상대에게 그랬던 것처럼 염우영은 단숨에 자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 창피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자신과 미래를 약속하는 염우영의 모습에 진유월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 멍한 얼굴로 염우영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유월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 그녀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염우영이 처음이었다.
  • “왜 웃어요?”
  • 염우영은 불쾌한 듯 설핏 미간을 구겼다.
  • “제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면 사내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 피식.
  • 진유월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그 모습에 기분이 팍 상한 염우영은 안색을 굳혔다.
  • “대체 왜 웃는 거예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러는 거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거둔 진유월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을 지었다.
  • “그런데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네요. 전 선 보러 온 거 아니에요.”
  • 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 염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 “여기가 8번 테이블 아닌가요?”
  • “8번 테이블인 건 맞지만 여긴 VIP 전용 테이블이에요. 홀에 있는 8번 테이블을 찾으시는 거라면 여기서 나가서 우회전하시면 나올 거예요.”
  • 그렇게 말하며 진유월은 섬섬옥수를 들어 밖을 가리켰다.
  • “이…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장소를 착각했네요.”
  • 염우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또 있을까!
  • 선 보러 왔다가 장소를 착각하다니!
  • 어쩐지 그 여자가 계속 웃고 있더라니, 분수도 모르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
  • 염우영이 떠나자마자 한 노인이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들어왔다.
  • 염우영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엄청 놀랐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노인은 방금 전 염우영이 카페 앞에서 부축해 주었던 그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 “유월아, 이런 게 바로 운명 아니냐? 넌 남성 혐오증 때문에 27 살이 되도록 여태 연애 한 번 못해봤잖아. 보통 사내들은 너한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방금 그 총각은 아니었어. 게다가 성품은 또 얼마나 정직하고 착한지. 방금 밖에서 유일하게 날 부축해 준 사람이었어. 나중에 보답하겠다고 했는데도 바로 거절했지!”
  • 그 노인은 다름 아닌 운성제일재단의 회장, 진천후였다.
  •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대부호였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아들 셋 모두 일찍이 떠나보낸 데다 그 세 아들 모두 딸만 남겨두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 가장 아끼는 손녀이자 지혜롭고 강단 있는 천강 그룹의 후계자인 진유월이 여태 사내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풋꼭지였다는 점이었다.
  • 죽기 전에 증손자를 한 번 안아보는 것이 요즘 진천후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 방금도 정의감 있는 남자를 물색하기 위해 일부러 카페 앞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 손녀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손녀와 선을 보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고 진천후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 이것이 바로 운명이 아니겠는가!
  • 눈을 빛내며 방금 전 카페 앞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진천후와 달리, 진유월은 시종일관하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 “할아버지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아직 제 테스트에는 통과하지 못했어요. 제 테스트마저 통과한다면 그 남자와의 결혼을 한 번 생각해 볼게요.”
  •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믿을 만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 고작 방금 전 그 만남으로 결혼하기에는 너무 성급한 것 같았다.
  • “좋아! 그 총각이라면 틀림없이 통과할 거야!”
  • 진천후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