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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얼떨결에 결혼

  • “이 물건들 전부 가져가세요!”
  • 얼떨결에 차를 얻어 탄 염우영은 차에 오르자마자 진천후에게 물건들을 전부 가져가라고 했다.
  • “뭐?!”
  • 진천후는 물론이고 지애란과 염윤설도 화들짝 놀랐다.
  • “모두 합치면 자그마치 수십억 되는데 정말 싫어?”
  • 진천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진천후에게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금액이지만 염우영에게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 “네, 필요 없습니다.”
  • 염우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아무런 이유나 근거 없이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어르신을 도와드린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성의는 고맙지만 받을 수 없습니다.”
  • 청렴 고결한 동생의 모습에 염윤설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 지애란은 더욱 실망했다. 이렇게 되면 아들은 대체 언제쯤 장가를 갈 수 있을까.
  • “하하, 그래!”
  • 그에 반해 어딘가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진천후는 이내 염우영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들을 도로 들고 돌아갔다.
  • 그러고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진유월에게 방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고 진유월이 믿지 못할까 찍었던 영상도 보여주었다.
  • “어때? 내가 그 총각은 테스트를 통과할 거라고 했지? 이제 결과에 승복하고 그 총각한테 시집가서 얼른 증손자를 안겨줘!”
  • 진천후의 강요에도 진유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언제나 깔끔하고 시원시원하게 일을 처리해 온 진유월이었기에 이번에도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고 내일 바로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진천후는 언제 시집갈 거냐며 귀찮게 할 것임이 분명했다.
  • 다음날 아침 일찍, 염우영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 “총각, 선물이 싫다면 와이프는 어떤가? 설마 이것도 거절할 생각인가?”
  • 염우영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어제 만났던 그 수상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 “어르신, 혹시 보이스피싱은 아니시죠? 새로운 사기 수법인가요?”
  • 염우영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 물론 진천후가 사기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천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부자’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 그래서 더더욱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진천후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왜?
  • “하하, 트릭은 있네만, 총각을 장가보내고 싶어서 그러네. 왜? 겁먹었나?”
  • 진천후는 일부러 염우영을 도발했다.
  • “공교롭게도 전 세상 모든 트릭을 두려워하지만 장가를 보내겠다는 트릭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염우영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어제 열여덟 번째 맞선에 실패한 뒤로 대체 언제 장가갈 거냐며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 해대는 통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 상대가 여자라면 아니, 암컷 동물이기만 한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당장 결혼할 의향이 있었다.
  • “그럼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지금 당장 구청으로 가게나!”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진천후의 목소리에 염우영은 일순 멈칫했다.
  • 그래, 가자! 밑져야 본전이라고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지 않은가!
  • 염우영은 곧장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구청으로 향했다.
  • 진천후의 말에 의하면 재계 백골 요정인 상대 여성은 한 기업의 고위 임원이라고 했다.
  • 사실 염우영은 상대 여성의 외모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 산부인과 의사로서 여성의 몸을 숱하게 보아온 탓에 여성의 몸에 대한 감흥도 없었고 상대 여성의 몸매에도 관심이 없었다.
  • 유일한 요구라면 인품이 너무 나쁜 사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장미란보다는 나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 하지만 구청 앞에서 그들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 순간, 염우영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 그 결혼 상대가 진유월이었다니!
  • 빨간색 오픈카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진유월은 딱 봐도 부잣집 아가씨였다.
  • 눈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특유의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아무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 “뭘 멍하니 있어요? 얼른 와요!”
  • 진유월의 눈빛 한 방에 염우영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 역시 기업의 고위 임원답게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 “진유월 씨가 제 결혼 상대입니까?”
  • 염우영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 “왜요? 그래서 싫어요?”
  • 그렇게 말하며 진유월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으로 내뿜는 냉랭한 기운은 아무나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럴 리가요! 싫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 염우영의 심장에서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 진유월이 경국지색의 외모의 소유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결고 친해지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 어차피 염우영도 쇼윈도 부부가 필요한 것이었기에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든, 살가운 성격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어서 들어가요. 속전속결로 해결하고 오자고요!”
  • 그렇게 말하며 진유월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구청으로 들어갔다. 원체 독불장군이라 결혼할 때에도 결코 곁을 내주지 않았다.
  • 염우영도 다리가 짧은 편이 아니었기에 잽싸게 진유월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 혼인 신고를 앞두고 진유월이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 사실 진유월은 염우영이 당장이라도 못하겠다고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기를 바랐다. 염우영이 결혼을 번복하면 할아버지도 더 이상 그녀를 강요할 수 없을 테니.
  • “진유월 씨 차가운 외모만큼 맺고 끊음이 깔끔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꾸물거리시네요?”
  • 그렇게 말하며 염우영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 그 한 마디에 가뜩이나 싸늘한 진유월의 눈빛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순간 염우영은 목이 싹둑 잘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 결혼하기 전 진유월이 염우영에 전한 마지막 한 마디였다.
  • 그로부터 10 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혼인 신고서를 손에 든 채 구청을 나섰다.
  • 혼인 신고를 접수하고 마칠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 내내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진유월의 모습에 구청 직원은 두 사람이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 혼인신고하러 온 게 아니라 이혼하러 온 거 아냐?
  • “전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쪽이랑 결혼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결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물론 저한테도 신경을 끄시고요. 저도 그쪽의 사생활에는 일절 터치할 생각이 없으니 하던 대로 하시면 돼요.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 차갑고 건조한 어조에 염우영은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주체가 되지 않았다.
  • 이런 얘기는 보통 남자들이 여자한테 하는 말 아닌가?
  •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자가가 없다고 했죠?”
  • 진유월이 불쑥 물었다.
  • “네.”
  • 염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진유월이 돌연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 천강 그룹 오너답게 진유월은 빈틈없고 주도면밀했다.
  • “이건 무슨 뜻이죠?”
  • 염우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남성우월주의 사상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결혼하면 당연히 신랑 측 집에서 살아야 하지만 전 절대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이 집을 우리 신혼집으로 하죠. 거기서 지내요. 난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편안하게 지내도 돼요.”
  • 에누리 없는 말에 염우영은 진유월이 얼마나 도도하고 차가운 사람인지 철저히 깨달았다.
  • “왜 이렇게 스폰을 받는 기분이 들까요?”
  • 괜히 자존심 상한 염우영은 열쇠를 받기가 망설여졌다.
  • “받아요!”
  • 하지만 이내 날아와 꽂히는 매서운 눈초리에 염우영은 순순히 열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누가 대기업 고위 임원 아니랄까 봐, 카리스마 쩌네!
  • “그래요. 스폰 받으라면 받아야지! 잘 쓸게요!”
  • 염우영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혼인신고까지 마친 마당에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는 건 사서 고생이었다.
  • “그럼 전 이만 갈게요.”
  • 시크한 한 마디와 함께 진유월은 곧장 몸을 돌렸다.
  • “진유월 씨, 잠시만요!”
  • 염우영이 다급히 외치며 진유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 하지만 진유월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칼날 같은 시선에 손이 토막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염우영은 화들짝 놀라며 손목을 놓아주었다.
  • “할 말 있어요?”
  • 진유월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유월은 꾸물대는 사람, 특히 꾸물대는 남자를 제일 싫어했다.
  • “세 가지! 확실시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 결혼하면 서로 닮는다더니, 어느샌가 염우영은 진유월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 “첫째, 우리 서로 연락처 교환하죠.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게. 거절은 안됩니다. 진유월 씨가 할아버지의 요구를 들어드리기 위해 이 결혼에 동의한 것처럼 저도 저희 어머니 요구를 들어드리기 위해 결혼한 겁니다. 만일 저희 어머니께서 물어보실 경우를 대비해 아무래도 연락처는 알고 있는 게 좋겠죠?”
  • 차갑고 까칠한 성격인 건 맞지만 막무가내는 아니었기에 일리가 있는 말이라 진유월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휴대전화를 꺼내고서 명령조로 말했다.
  • “스캔해요.”
  • 띵!
  • 카카오톡을 추가하고서 염우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둘째, 매달 제 월급에서 20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집세라고 생각하셔도 되고 일전에 선 볼 때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요.”
  • 그 말에 진유월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유월에게 200만 원은 새 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했다.
  • 하지만 진유월은 염우영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 “그리고 마지막, 부부생활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그때, 염우영이 돌연 안색을 굳히며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