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막 문을 나선 그녀는 문 앞 계단에 앉아 있는 박우현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예쁘고도 요염한 두 눈은 어딘가 사악해 보였고 약간의 불량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긋 쳐다보던 그는 상대가 그녀인 것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쯧,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삼촌도 안 되겠네.”
이에 신가윤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다못해 아무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숨고만 싶었다.
‘정말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네!’
박현우는 웃음을 터트리며 입가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무덤을 파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자 때문이었네.”
박현우는 놀리듯 말을 내뱉었다. 체면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언사였다.
하지만 박시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가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아무도 널 벙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에 박현우는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인천 프로젝트는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그 늙은이들이 협력 상대를 신씨 가문에서 송씨 가문으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어졌다고. 자기들은 감히 삼촌한테 찾아와 묻지 못하고 한사코 나더러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보낸 거 아니야.”
일 얘기가 나오자, 박시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신가윤이 했던 그 말들이 떠올랐다.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떨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바꿔.”
그 말에 박현우는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좋아. 그렇게 말했다고 전하면 다들 안심할 거야. 하지만 삼촌, 한 여자의 순결을 그렇게 빼앗아 놓고 바로 모른 척하는 건, 쯧, 별로 좋게 보이진 않는데 말이야.”
그러자 박시완이 탁자 위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닥쳐.”
그럼에도 박현우는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손을 뻗어 사과를 받아내며 말을 내뱉었다.
“사려가면서 놀아. 송씨 가문의 그 양녀 말이야. 예쁘긴 하던데 내 숙모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이지 싶어.”
“꺼져!”
박현우는 그런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사과를 던지고 놀며 자리에서 일어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박시완은 비록 그에게는 명의상 어른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고작 몇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지난 몇 년간 박시완은 신가윤의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왔었다.
어디가 어떻게 일반적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말하라면 박현우도 딱히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충 한 천재가 갑자기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신가윤은 송준혁에게서 걸려 온 수많은 부재중 전화를 힐긋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는 샤워를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를 마친 뒤에야 컴퓨터를 켜고 박시완의 컴퓨터에서 빼내온 자료들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송파구의 부지는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전생에 윤씨 가문에서 사들였던 것으로, 그 위에 쇼핑몰을 지었지만 지하철 노선이 바뀌며 본전을 날린 꼴이 되었었다.
‘그래, 좋은 일 한번 하자. 이건 송씨 가문에게 주는 게 좋겠어.’
신가윤은 송파구 부지의 입찰 내용을 그럴듯하게 바꾸어 박시완의 타깃 프로젝트 리스트에 추가했다.
‘음, 거제도의 리조트는 전생에 임씨 가문의 손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거제도는 해마다 수많은 백로가 서식하는 곳이라, 이로 인해 리조트의 기획 단계부터 꽤 기대를 모았던 프로젝트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침 임씨 가문이 자신만만한 채 크게 한 건 터트리려던 그때 거제도의 해수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수백 마리의 백로들이 그로 인해 죽어 나갔고, 이 문제가 크게 논란거리가 되면서 거제도의 리조트 건설 프로젝트도 그대로 망해버렸었다.
‘그래, 이것도 송씨 가문에게 선물하자. 사람이라면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지.’
거제도 프로젝트도 리스트에 추가한 뒤, 신가윤은 또 박시완의 리스트에 있는 강호테크놀로지라는 회사에 주의를 돌렸다.
그 회사는 환경 보호 분야에서의 혁신을 주 무기로 밀어붙이는 회사였다.
강호테크놀로지는 비록 유명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이 회사에서 개발해 낸 오수 정화 설비는 성본을 낮추는 동시에 효율을 대폭 올릴 수 있었고, 마침 정책까지 새로 나오게 되면서 박시완의 투자를 받아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결과, 빠른 속도로 시장에 원래 있던 오수 정화 설비를 대체하며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었다.
이 강호테크놀로지와 동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우성테크놀로지라는 환경 보호 회사는 회사의 창립자인 진우성의 국가 정책에 호응한 노련한 홍보 덕에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회사였는데, 개발해 낸 설비는 강호테크놀로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자는 그저 허풍쟁이일 뿐이었고, 설계해 낸 물건 역시 겉만 번지르르했을 뿐 실속이 없어 많은 사람이 손해를 봤었다.
신가윤은 지난 생에 송진호도 우성테크놀로지에 투자를 하려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씨 가문을 꺾지 못해 투자를 하지 못했었고, 이로 인해 우성테크놀로지의 파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송씨 가문은 꽤나 오랫동안 고소해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박시완의 투자 계획을 우성테크놀로지로 변경했다.
‘그래, 사람이라면 덕도 쌓고 선행도 베풀어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30분가량 바삐 보낸 신가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정 후의 문서를 바라보다 송준혁에게서 걸려 온 몇십 번째인지도 모를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바로 그 문서를 그의 이메일로 전송했다.
그러자 그 시점부터 잠잠해진 휴대폰에 신가윤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프로젝트들이면 송씨 가문은 몰락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절대로 그들이 호의호식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송준혁인 줄 알고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화면 위에 뜬 이름은 유민지였다.
이에 순간 얼떨떨해하던 신가윤의 얼굴 위에 자조적인 빛이 스쳤다.
유민지는 전생에서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였었지만 또한 그녀의 신분을 도용하고, 그녀의 가족들을 해친 것도 모자라 그녀 몰래 송준혁과 시시덕거렸던 인물이기도 했다.
신가윤은 시선을 내리깔며 전화를 받았다.
“윤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너 괜찮아? 너 어젯밤에… 어젯밤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초조해 보였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들어보면 그 속에 어렴풋이 담겨있는 그녀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신가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에 유민지는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거리감을 느꼈지만 유민지는 그저 그녀가 충격을 받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라 치부해 버렸다.
“준혁 오빠한테 들은 거야… 윤아,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거야? 너… 너 괜찮아? 걱정돼서 그래. 네가 지금 심적으로 힘들다는 거 알아. 이따가 퇴근하고 너한테 갈게.”
“내일 저녁에 보자.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신가윤의 두 눈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연약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유민지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일 만나러 갈게. 윤아, 그런 일 별거 아니야.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준혁 오빠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해. 우리가 너 대신 정의를 실현해 줄게!”
계속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신가윤의 얼굴 위로 순간 조롱이 스쳤다.
전생에서 그녀는 자신과 박시완이 밤을 보냈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에 유민지의 반응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사실 많은 일들에는 다 실마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신가윤은 무언가 생각 난 듯 서랍 안에서 윤기가 도는 옥패를 하나 꺼냈다.
자물쇠 모양으로 조각된 옥패는 전체적으로 맑은 흰색을 띠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색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두 마리의 까치가 정교한 기법으로 새겨져 있었다.
신가윤은 손끝으로 가볍게 옥패 위의 까치를 매만졌다.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이 옥패는 당시 고아원에 버려졌던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었고 그녀의 신분을 증명해 줄 증표이기도 했다.
전생에서 유민지의 갑작스러운 방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옥패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녀는 이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씨 부부가 자신의 친부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유민지가 그로부터 며칠 뒤 갑자기 신씨 가문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던 일을 다시 생각하니 신가윤은 모든 것들이 다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