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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

내 사랑 내 곁에

립스틱디바

Last update: 2024-11-23

제1화 설령 그것이 증오일지라도

  • 신가윤은 죽었다.
  • 그것은 한 차례 의도적으로 설계된 폭발이었다.
  • 하지만 마지막 순간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한 사람이 오랜 시간 그토록 증오했던 자신의 남편일 줄은 그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 그녀는 영혼이 되어 허공 중에 반쯤 떠 있는 상태로 한쪽 팔이 다 떨어져 나간 채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남자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 박시완은 한 팔로 몸을 지탱해 가며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집요하게 산산조각 나 버린 몸뚱이를 향해 기어갔다.
  • 그의 목소리는 다 갈라져 있었고 절망으로 가득했다.
  • “윤아!”
  • “박시완…”
  • 신가윤의 흐릿한 목소리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 미친 듯이 안으로 뛰어 들어온 그의 부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 “대표님, 진정하세요. 사모님께선…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 ……
  • 박시완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전체에 몇 번이고 코드블루가 울려 퍼졌다.
  • 신가윤은 넋이 나간 채 수술대 옆에 떠서 남자가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 눈가가 시큰거렸다.
  •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수도 없이 속고, 당하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던 이 남자가 왜 마지막 순간에 기꺼이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하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다만 그녀는 안도했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죽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장장 스무 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박시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는 왼팔을 잘라내야 했다.
  •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시완은 퇴원을 했다.
  • 신가윤은 눈앞의 정장 차림의, 하지만 왼쪽 소매가 비어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순간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박시완을 증오했었다.
  • 어릴 적 송씨 가문에게 거두어져 송씨 가문에서 자란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서 송씨 가문의 장자인 송준혁과 사랑에 빠졌다.
  • 허물없이 지내는 소꿉친구 사이이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로 발전했었다.
  •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녀는 예기치 못하게 박시완에게 범해졌던 것이었다.
  • 이에 복수하기 위해, 또한 송씨 가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는 수차례 박시완을 이용하고 모함했었고 그가 진행하는 많은 프로젝트를 망쳐놓았으며 그의 명성 또한 망가뜨려 놓았었다.
  • 그리고 아마도 이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그는 사람을 시켜 그녀의 눈을 멀게 했고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렸으며 결국에는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었다.
  • 신혼 첫날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가장 악랄한 저주를 내뱉었었다.
  • “박시완, 언젠가 당신도 함께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거야!”
  • 당시에는 그 말이 이렇듯 씨가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하지만 사실 신가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이에 계속 외면하고 피해 왔었다.
  • 어차피 박시완은 그런 그녀의 막무가내인 태도를 용인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 그러다 송준혁이 자신의 몸에 폭탄을 매달던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 그랬다. 그녀는 잘못된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송씨 가문에게 속아 박시완을 오해했고 송씨 가문의 앞잡이가 되어 나쁜 짓들을 해왔었던 것이다.
  • 그러는 동안 그녀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더욱이는 내내 자신의 곁을 지켰던 박시완에게 번번이 상처를 주었던 것이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직접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
  • “그자들을 나한테 데리고 와.”
  • “알겠습니다.”
  •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신가윤은 정신을 차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너저분한 몰골의 남녀 한 쌍이 결박된 상태로 방안에 끌려 들어왔다.
  • 몇 초간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신가윤은 뒤늦게야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 눈앞의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여자는 바로 송씨 가문의 애지중지하는 아가씨였고, 그 옆의 이미 엄청나게 시달린 듯 바지를 적시고 있는 남자는 바로 한때 밝고 당당했던 송준혁이었다.
  • 두 사람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연신 큰절을 해대며 횡설수설 용서를 구걸했다.
  • “박시완 씨,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저희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저희를 그냥 보내주세요…”
  • “보내달라?”
  • 박시완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단검을 송수민의 얼굴 위에 들이댔다. 그의 잘생긴 두 눈에 검은 광기가 일렁였다.
  • “내가 네놈들을 보내주면, 그녀는 누가 보내주지?”
  • 자신에게 닥칠 일을 직감한 듯 송수민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안돼… 싫어… 박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뭐에 홀렸었던 거예요. 가윤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애의 두 눈을 멀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요! 전 그냥 시완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저 시완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시완 씨는 왜 얼굴이 망가진 장님을 기꺼이 신부로 맞으려 하면서도 저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나요!!!”
  • 박시완은 냉소를 터트렸다.
  •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 순간 서늘한 빛 한줄기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선혈이 낭자한 귀 하나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 “아악-!”
  • 비명 소리가 온 방 안을 울렸다. 송수민은 극심한 고통에 피범벅이 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 온몸에는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같은 장면에 신가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 그녀는 당시 자신을 해쳤던 사람이 이제껏 자매처럼 지내왔던 송수민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 그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내내 박시완이 범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신가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완전히 바보처럼 느껴졌다.
  • 한때 자신이 박시완에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 “날 사랑한다?”
  • 박시완이 여자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 “그럼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도록 하지.”
  • 말을 마친 그는 단검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송수민의 얼굴을 그어 내려갔다. 매 한 번이 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 끊임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열몇 차례나 얼굴을 그어내려 간 박시완은 또 자비 없이 그녀의 두 눈을 도려냈다.
  • 송수민은 피 칠갑이 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었다.
  • 한편 송준혁은 구석에 웅크린 채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 박시완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그런 그에게 다가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그의 한쪽 팔을 잘라내 멀리 던져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 같아 보였다.
  • “이건 내 몫이야. 하지만 그녀의 몫은 영원히 다 갚을 수 없을 거야!”
  • 그 말에 신가윤은 텅 빈 두 눈을 끔뻑였다.
  • ‘그러게, 어떻게 다 갚을 수가 있겠어?’
  • 절대 변치 않을 것 같던 그 맹세들, 그 마음들, 그리고 그녀의 목숨까지, 송준혁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 “박시완! 죽일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죽여봐!”
  • 송준혁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극심한 통증이 자극이 된 것인지, 그는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 “박시완, 당신이 그 계집애한테 아무리 많은 것들을 해줬다 한들 뭐 어쩔 건데! 차마 그 계집애한테 진실을 얘기해 주지 못했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 그래봤자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계집애는 기꺼이 날 위해 모든 걸 내놓았을 거야!!! 신가윤 그 계집애는 그냥 내 호구라고. 그러는 당신은 뭔데! 아, 그렇지. 당신은 그 계집애한테는 영원히 불구대천의 원수겠지! 하하하하!!!”
  • 그 한마디는 남자의 마음속 가장 약한 곳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 이에 박시완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 그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설령 그것이 증오일지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내 자리가 하나쯤은 있는 거잖아.”
  • 신가윤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 ‘박시완, 이 바보… 멍청이!!!’
  •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박시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너 같은 건 개한테 먹이로 던져 줘야 해.”
  • 그의 목소리 너머로 마당 쪽에서 사나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배고픔에 눈이 시뻘게진 티베탄 마스티프들은 피비린내를 맡고 자극을 받은 것인지 이미 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이에 신가윤은 불안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를 바랐다.
  •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 그는 이미 혼자서만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 “안돼…”
  • 송준혁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 살려달라고 애원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 피 냄새를 맡은 티베탄 마스티프들이 허기에 두 눈을 번뜩이며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