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지막 순간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한 사람이 오랜 시간 그토록 증오했던 자신의 남편일 줄은 그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혼이 되어 허공 중에 반쯤 떠 있는 상태로 한쪽 팔이 다 떨어져 나간 채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남자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박시완은 한 팔로 몸을 지탱해 가며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집요하게 산산조각 나 버린 몸뚱이를 향해 기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다 갈라져 있었고 절망으로 가득했다.
“윤아!”
“박시완…”
신가윤의 흐릿한 목소리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미친 듯이 안으로 뛰어 들어온 그의 부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대표님, 진정하세요. 사모님께선…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
박시완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전체에 몇 번이고 코드블루가 울려 퍼졌다.
신가윤은 넋이 나간 채 수술대 옆에 떠서 남자가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수도 없이 속고, 당하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던 이 남자가 왜 마지막 순간에 기꺼이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하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안도했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죽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장 스무 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박시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왼팔을 잘라내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시완은 퇴원을 했다.
신가윤은 눈앞의 정장 차림의, 하지만 왼쪽 소매가 비어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박시완을 증오했었다.
어릴 적 송씨 가문에게 거두어져 송씨 가문에서 자란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서 송씨 가문의 장자인 송준혁과 사랑에 빠졌다.
허물없이 지내는 소꿉친구 사이이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로 발전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녀는 예기치 못하게 박시완에게 범해졌던 것이었다.
이에 복수하기 위해, 또한 송씨 가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는 수차례 박시완을 이용하고 모함했었고 그가 진행하는 많은 프로젝트를 망쳐놓았으며 그의 명성 또한 망가뜨려 놓았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그는 사람을 시켜 그녀의 눈을 멀게 했고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렸으며 결국에는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었다.
신혼 첫날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가장 악랄한 저주를 내뱉었었다.
“박시완, 언젠가 당신도 함께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거야!”
당시에는 그 말이 이렇듯 씨가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신가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이에 계속 외면하고 피해 왔었다.
어차피 박시완은 그런 그녀의 막무가내인 태도를 용인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송준혁이 자신의 몸에 폭탄을 매달던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 그녀는 잘못된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송씨 가문에게 속아 박시완을 오해했고 송씨 가문의 앞잡이가 되어 나쁜 짓들을 해왔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더욱이는 내내 자신의 곁을 지켰던 박시완에게 번번이 상처를 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직접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자들을 나한테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신가윤은 정신을 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저분한 몰골의 남녀 한 쌍이 결박된 상태로 방안에 끌려 들어왔다.
몇 초간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신가윤은 뒤늦게야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눈앞의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여자는 바로 송씨 가문의 애지중지하는 아가씨였고, 그 옆의 이미 엄청나게 시달린 듯 바지를 적시고 있는 남자는 바로 한때 밝고 당당했던 송준혁이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연신 큰절을 해대며 횡설수설 용서를 구걸했다.
“박시완 씨,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저희를 그냥 보내주세요…”
“보내달라?”
박시완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단검을 송수민의 얼굴 위에 들이댔다. 그의 잘생긴 두 눈에 검은 광기가 일렁였다.
“내가 네놈들을 보내주면, 그녀는 누가 보내주지?”
자신에게 닥칠 일을 직감한 듯 송수민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싫어… 박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뭐에 홀렸었던 거예요. 가윤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애의 두 눈을 멀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요! 전 그냥 시완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저 시완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시완 씨는 왜 얼굴이 망가진 장님을 기꺼이 신부로 맞으려 하면서도 저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나요!!!”
박시완은 냉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서늘한 빛 한줄기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혈이 낭자한 귀 하나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아악-!”
비명 소리가 온 방 안을 울렸다. 송수민은 극심한 고통에 피범벅이 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온몸에는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같은 장면에 신가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을 해쳤던 사람이 이제껏 자매처럼 지내왔던 송수민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내내 박시완이 범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가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완전히 바보처럼 느껴졌다.
한때 자신이 박시완에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날 사랑한다?”
박시완이 여자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럼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그는 단검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송수민의 얼굴을 그어 내려갔다. 매 한 번이 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끊임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몇 차례나 얼굴을 그어내려 간 박시완은 또 자비 없이 그녀의 두 눈을 도려냈다.
송수민은 피 칠갑이 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었다.
한편 송준혁은 구석에 웅크린 채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박시완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그런 그에게 다가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그의 한쪽 팔을 잘라내 멀리 던져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 같아 보였다.
“이건 내 몫이야. 하지만 그녀의 몫은 영원히 다 갚을 수 없을 거야!”
그 말에 신가윤은 텅 빈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러게, 어떻게 다 갚을 수가 있겠어?’
절대 변치 않을 것 같던 그 맹세들, 그 마음들, 그리고 그녀의 목숨까지, 송준혁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박시완! 죽일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죽여봐!”
송준혁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극심한 통증이 자극이 된 것인지, 그는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박시완, 당신이 그 계집애한테 아무리 많은 것들을 해줬다 한들 뭐 어쩔 건데! 차마 그 계집애한테 진실을 얘기해 주지 못했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 그래봤자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계집애는 기꺼이 날 위해 모든 걸 내놓았을 거야!!! 신가윤 그 계집애는 그냥 내 호구라고. 그러는 당신은 뭔데! 아, 그렇지. 당신은 그 계집애한테는 영원히 불구대천의 원수겠지! 하하하하!!!”
그 한마디는 남자의 마음속 가장 약한 곳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이에 박시완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설령 그것이 증오일지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내 자리가 하나쯤은 있는 거잖아.”
신가윤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박시완, 이 바보… 멍청이!!!’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박시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같은 건 개한테 먹이로 던져 줘야 해.”
그의 목소리 너머로 마당 쪽에서 사나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픔에 눈이 시뻘게진 티베탄 마스티프들은 피비린내를 맡고 자극을 받은 것인지 이미 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에 신가윤은 불안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 그는 이미 혼자서만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안돼…”
송준혁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피 냄새를 맡은 티베탄 마스티프들이 허기에 두 눈을 번뜩이며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