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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사람이라면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지

  • 박시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신가윤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도망치듯 급히 그곳을 떠났다.
  • ‘정말이지 창피해 죽겠어!!!’
  •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막 문을 나선 그녀는 문 앞 계단에 앉아 있는 박우현을 마주치게 되었다.
  •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예쁘고도 요염한 두 눈은 어딘가 사악해 보였고 약간의 불량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긋 쳐다보던 그는 상대가 그녀인 것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 “쯧,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삼촌도 안 되겠네.”
  • 이에 신가윤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다못해 아무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숨고만 싶었다.
  • ‘정말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네!’
  • 박현우는 웃음을 터트리며 입가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왜 그렇게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무덤을 파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자 때문이었네.”
  • 박현우는 놀리듯 말을 내뱉었다. 체면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언사였다.
  • 하지만 박시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네가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아무도 널 벙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 이에 박현우는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 “인천 프로젝트는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그 늙은이들이 협력 상대를 신씨 가문에서 송씨 가문으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어졌다고. 자기들은 감히 삼촌한테 찾아와 묻지 못하고 한사코 나더러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보낸 거 아니야.”
  • 일 얘기가 나오자, 박시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신가윤이 했던 그 말들이 떠올랐다.
  •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떨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안 바꿔.”
  • 그 말에 박현우는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 “좋아. 그렇게 말했다고 전하면 다들 안심할 거야. 하지만 삼촌, 한 여자의 순결을 그렇게 빼앗아 놓고 바로 모른 척하는 건, 쯧, 별로 좋게 보이진 않는데 말이야.”
  • 그러자 박시완이 탁자 위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 “닥쳐.”
  • 그럼에도 박현우는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손을 뻗어 사과를 받아내며 말을 내뱉었다.
  • “사려가면서 놀아. 송씨 가문의 그 양녀 말이야. 예쁘긴 하던데 내 숙모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이지 싶어.”
  • “꺼져!”
  • 박현우는 그런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사과를 던지고 놀며 자리에서 일어서 그곳을 떠나갔다.
  • 그도 그럴 것이, 박시완은 비록 그에게는 명의상 어른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고작 몇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지난 몇 년간 박시완은 신가윤의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어딘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왔었다.
  • 어디가 어떻게 일반적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말하라면 박현우도 딱히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것은 대충 한 천재가 갑자기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신가윤은 송준혁에게서 걸려 온 수많은 부재중 전화를 힐긋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 그리고는 샤워를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를 마친 뒤에야 컴퓨터를 켜고 박시완의 컴퓨터에서 빼내온 자료들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았다.
  • 그런 다음, 그녀는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 송파구의 부지는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전생에 윤씨 가문에서 사들였던 것으로, 그 위에 쇼핑몰을 지었지만 지하철 노선이 바뀌며 본전을 날린 꼴이 되었었다.
  • ‘그래, 좋은 일 한번 하자. 이건 송씨 가문에게 주는 게 좋겠어.’
  • 신가윤은 송파구 부지의 입찰 내용을 그럴듯하게 바꾸어 박시완의 타깃 프로젝트 리스트에 추가했다.
  • ‘음, 거제도의 리조트는 전생에 임씨 가문의 손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 거제도는 해마다 수많은 백로가 서식하는 곳이라, 이로 인해 리조트의 기획 단계부터 꽤 기대를 모았던 프로젝트였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침 임씨 가문이 자신만만한 채 크게 한 건 터트리려던 그때 거제도의 해수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 수백 마리의 백로들이 그로 인해 죽어 나갔고, 이 문제가 크게 논란거리가 되면서 거제도의 리조트 건설 프로젝트도 그대로 망해버렸었다.
  • ‘그래, 이것도 송씨 가문에게 선물하자. 사람이라면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지.’
  • 거제도 프로젝트도 리스트에 추가한 뒤, 신가윤은 또 박시완의 리스트에 있는 강호테크놀로지라는 회사에 주의를 돌렸다.
  • 그 회사는 환경 보호 분야에서의 혁신을 주 무기로 밀어붙이는 회사였다.
  • 강호테크놀로지는 비록 유명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이 회사에서 개발해 낸 오수 정화 설비는 성본을 낮추는 동시에 효율을 대폭 올릴 수 있었고, 마침 정책까지 새로 나오게 되면서 박시완의 투자를 받아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결과, 빠른 속도로 시장에 원래 있던 오수 정화 설비를 대체하며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었다.
  • 이 강호테크놀로지와 동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우성테크놀로지라는 환경 보호 회사는 회사의 창립자인 진우성의 국가 정책에 호응한 노련한 홍보 덕에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회사였는데, 개발해 낸 설비는 강호테크놀로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자는 그저 허풍쟁이일 뿐이었고, 설계해 낸 물건 역시 겉만 번지르르했을 뿐 실속이 없어 많은 사람이 손해를 봤었다.
  • 신가윤은 지난 생에 송진호도 우성테크놀로지에 투자를 하려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아쉽게도 고씨 가문을 꺾지 못해 투자를 하지 못했었고, 이로 인해 우성테크놀로지의 파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송씨 가문은 꽤나 오랫동안 고소해했었다.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박시완의 투자 계획을 우성테크놀로지로 변경했다.
  • ‘그래, 사람이라면 덕도 쌓고 선행도 베풀어야 하는 법이지.’
  • 그렇게 30분가량 바삐 보낸 신가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정 후의 문서를 바라보다 송준혁에게서 걸려 온 몇십 번째인지도 모를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바로 그 문서를 그의 이메일로 전송했다.
  • 그러자 그 시점부터 잠잠해진 휴대폰에 신가윤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 그 프로젝트들이면 송씨 가문은 몰락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절대로 그들이 호의호식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송준혁인 줄 알고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화면 위에 뜬 이름은 유민지였다.
  • 이에 순간 얼떨떨해하던 신가윤의 얼굴 위에 자조적인 빛이 스쳤다.
  • 유민지는 전생에서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였었지만 또한 그녀의 신분을 도용하고, 그녀의 가족들을 해친 것도 모자라 그녀 몰래 송준혁과 시시덕거렸던 인물이기도 했다.
  • 신가윤은 시선을 내리깔며 전화를 받았다.
  • “윤아, 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너 괜찮아? 너 어젯밤에… 어젯밤에…”
  •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초조해 보였다.
  • 하지만 다시 자세히 들어보면 그 속에 어렴풋이 담겨있는 그녀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신가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이에 유민지는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거리감을 느꼈지만 유민지는 그저 그녀가 충격을 받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라 치부해 버렸다.
  • “준혁 오빠한테 들은 거야… 윤아,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거야? 너… 너 괜찮아? 걱정돼서 그래. 네가 지금 심적으로 힘들다는 거 알아. 이따가 퇴근하고 너한테 갈게.”
  • “내일 저녁에 보자.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 신가윤의 두 눈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연약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에 유민지가 대답했다.
  • “그래, 그럼 내일 만나러 갈게. 윤아, 그런 일 별거 아니야.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준혁 오빠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해. 우리가 너 대신 정의를 실현해 줄게!”
  • 계속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신가윤의 얼굴 위로 순간 조롱이 스쳤다.
  • 전생에서 그녀는 자신과 박시완이 밤을 보냈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에 유민지의 반응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못했었다.
  •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사실 많은 일들에는 다 실마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 전화를 끊은 뒤, 신가윤은 무언가 생각 난 듯 서랍 안에서 윤기가 도는 옥패를 하나 꺼냈다.
  • 자물쇠 모양으로 조각된 옥패는 전체적으로 맑은 흰색을 띠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투명한 초록색이 섞여 있었다.
  • 그리고 그 위에는 두 마리의 까치가 정교한 기법으로 새겨져 있었다.
  • 신가윤은 손끝으로 가볍게 옥패 위의 까치를 매만졌다.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 이 옥패는 당시 고아원에 버려졌던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었고 그녀의 신분을 증명해 줄 증표이기도 했다.
  • 전생에서 유민지의 갑작스러운 방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옥패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 하지만 당시에 그녀는 이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었다.
  • 하지만 신씨 부부가 자신의 친부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유민지가 그로부터 며칠 뒤 갑자기 신씨 가문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던 일을 다시 생각하니 신가윤은 모든 것들이 다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