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9화 그냥 가지고 논 거야

  • 그 말에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유민지 역시 웃으며 말했다.
  • “괜한 소리 마세요. 전 가윤이 같은 애를 고용하지는 못하겠네요. 걘 어려서부터 송씨 가문에서 오냐오냐해주기만 한 터라 차를 따라주는 일 같은 걸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해지더니 다들 유민지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 그러더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든 채 억지스러운 웃음으로 난처한 기색을 숨기려 했다.
  • 유민지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 채 곧 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된다는 사실에 취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가 고용인이었으니 걔한테도 분명 어느 정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신가윤은 이제껏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곤 했으니 이제 와서 고개를 숙이려 할 리가 없겠죠.”
  • 그런데 다음 순간, 신가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민지 아가씨께서 제가 뭘 해주길 바라시는지 궁금하네요? 차를 따라드릴까요, 아니면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밥도 떠먹여 드릴까요?”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갑고도 산뜻한 목소리에 유민지의 표정이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가윤이 이곳에 올 줄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신씨 가문이 어떠한 실마리라도 찾아낼까 이 사실을 꼭꼭 숨겨왔었다.
  • 그렇게 이 소식이 신가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 “가윤아, 오해야…”
  • 유민지가 다급히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 이에 신가윤은 새빨간 입술을 말아 올려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민지 아가씨께서 그렇듯 성급하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는 몰락한 집안사람들의 모습과 똑 닮아있네요. 하루아침에 득세하고 거만하게 설쳐대는 모습이 말이에요.”
  • 신가윤이 이렇듯 다짜고짜 거리낌 없는 말들을 쏟아낼 줄은 몰랐던 유민지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가윤아,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정말로 네가 오해한 거야…”
  • 그녀는 아직은 신가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을 훔쳤으니, 잠시간은 많은 일을 위해 신가윤이 곁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신가윤은 싱긋 미소 지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 “오해라면 어디 한 번 설명해 보든지.”
  • 그 말에 유민지는 조금은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 역시나 다음 순간, 신가윤이 웃으며 물었다.
  • “그런데 민지야, 내가 뭘 질투한다는 거야? 네가 분명 빈털터리이면서도 한 번에 일을 여러 개 해가면서까지 명품을 사는 거? 아니면 달동네에 살면서도 잘난 집안 출신인 척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술꾼인 너희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너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거?”
  • 신가윤은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뱉는 말마다 유민지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 이에 유민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신가윤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것들을 들추어낼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 ‘신가윤은 언제나 속여먹기 가장 쉬운 애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 유민지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억지로 분노를 참아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가윤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 “그래? 그럼 내 귀가 잘못된 거네? 아니면 여기 있는 분들도 다들 꿈을 꾸고 계신 건가?”
  • 신가윤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난 한기에 유민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 더는 가식이 통할 것 같아 보이지 않자, 유민지는 차라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신가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그래봤자 얼굴 좀 반반하고 운이 좀 좋은 것뿐이잖아! 송씨 가문이 널 거둬주지 않았다면 너 같은 사생아의 처지는 나보다도 더 못했을 거야! 아참,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송씨 가문에서 널 거둬줬다고 해도 넌 어차피 박시완이 놀다 버린 헌신짝에 불과해! 한쪽으로 준혁 오빠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또 박시완과 놀아나려고? 박시완 같은 사람이 널 성에 차 하기나 할 것 같아? 잘 들어, 그 사람은 그냥 널 가지고 논 거야! 당연히 준혁 오빠도 더는 널 원하지 않을 거고…”
  • 유민지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오랫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분노를 쏟아냈다.
  • 그러자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 그럼에도 신가윤은 화난 기색 하나 없었다.
  • 그런 그녀가 입을 열려던 그때, 한 남자의 낮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 있는 손님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 “아가씨께서는 제 취향을 꽤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 이에 신가윤은 순간 놀란 듯하더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터주었고, 그 사이로 훤칠한 체격의 박시완이 보였다.
  • 그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그 새하얗고 잘생긴 얼굴 위의 날카로운 두 눈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미간에는 뼛속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한 독기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예쁜 두 눈은 현재 엄청난 기세로 유민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의 등장과 함께 소란스럽던 사람들까지도 한결 조용해졌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고,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박 대표님이 오셨네요.”
  • “박 대표님도 오실 줄 몰랐어요.”
  • “박 대표님과 신씨 가문은 이제껏 사이가 꽤 좋았잖아요. 신 회장님 생신이니 박 대표님께서도 분명 얼굴을 비추시려고 오신 걸 거예요.”
  • “그런데 저 유민지라는 여자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래요? 감히 박 대표님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미친 거 아니에요?”
  • “어쩌면 일부러 소란을 피워 박 대표님의 관심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 “……”
  • 남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차가운 두 눈을 마주한 유민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그녀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 “박… 박 대표님… 저… 그게…”
  • 그녀는 자신의 말을 박시완이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는 평소에도 감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 유민지는 최대한 자신을 격식 있고 침착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남자의 두 눈만 마주하면 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졌고, 다리도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왔다.
  • 박시완이 가볍게 입술을 달싹여 재밌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왜 그러시죠? 차라리 아가씨께서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의 자리에 앉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들인 저에게 신붓감을 골라주시게 말입니다.”
  • 그 한마디에 유민지의 얼굴은 더 새하얗게 질려갔다.
  • 주위 사람들이 순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유민지 씨는 어린 나이에 걱정거리도 많으시네요. 박 대표님의 일에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하시다니 말입니다.”
  • “어느 유씨 가문이랍니까? 어쩜 저렇게 교양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이 되고 싶대요? 무슨 자격으로?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은 온 서울을 뒤흔든 미인이시라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사모님이라고 굽신거리게 되는 분이시란 말입니다.”
  • “……”
  • 유민지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불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그런 농담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앞으로는 꼭 주의할게요…”
  • 이에 박시완은 냉소를 터트렸다.
  • “성현아, 박씨 가문 산하의 모든 산업의 블랙리스트에 이 여자의 이름을 올려놔.”
  • 그러자 유민지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하지만 박시완은 그런 그녀와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 옆에 있는 신가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갔다.
  • 이에 신가윤 역시 유민지를 내버려둔 채 돌아서서 그를 쫓아갔다.
  • ‘신가윤,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유민지는 핏발이 선 눈으로 분노에 차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신가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 그녀는 자신이 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될 첫날이자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에서 이 서울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 ……
  • “박시완.”
  • 신가윤은 쫓아가 작은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 이에 박시완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검은색의 끈 나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유달리 돋보였고 드레스 위에 수놓아져 있는 수많은 자수가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며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박시완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 그는 억지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 그런 그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예뻤다. 무턱대고 마르기만 한 것이 아닌 살집과 골격이 균형 잡혀 있는 손이었다.
  • 생채기 하나 없는 그 손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 “놔.”
  • 박시완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