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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적당히 해

  • 송준혁은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 초조함만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의 멍청함이 증오스럽기만 했다. 왜 그때는 그가 뼛속까지 가식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말이다.
  • 그런 그녀의 핏발이 선 두 눈에 송준혁은 잠시 멈칫했다.
  • “윤아, 네가 속상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됐으니 조금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조금이라도 이익을 더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괜한 손해를 본 꼴이잖아.”
  • “인천 프로젝트 말인데, 박시완이 거절했어.”
  • 신가윤은 고개를 떨구며 얼굴 위에 드러난 혐오를 감추었다.
  • 아직은 송준혁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었다. 그가 그 어떤 대비도 하게 해선 안 되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 송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꽤나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그럼 너더러 복사해 오라고 했던 자료들은…”
  • 그 말에 신가윤은 그제야 자신이 당시 송씨 가문의 헛소리를 믿고 박시완의 컴퓨터에서 적잖은 사업 기밀들을 빼냈었던 것이 기억났다.
  • 그리고 박시완은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한발 물러서 주었었다.
  • 우습게도 당시 그녀와 송준혁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계약이 먹힌 것이라 생각했었다.
  • 자신이 멋대로 그의 진심과 믿음을 짓밟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신가윤은 가슴 한편이 꽉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 “내 휴대폰 안에 있어. 지금은 배터리가 다 돼서, 집에 가서 보내줄게.”
  • 그 말에 송준혁은 곧바로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 “걱정 마, 윤아. 내가 언젠가 너 대신 복수를 해서, 박시완을 단단히 짓밟아줄게!”
  • 이에 신가윤의 얼굴에 순간 조롱이 스쳤다.
  • ‘지난 생에 진 빚, 이번 생에는 갚을 거야. 박시완을 해치고 싶다면 나부터 죽이고 가야 할 거야!’
  • “인천 프로젝트는 나한테 따로 방법이 있어. 어젯밤 너와 박시완이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걸 찍은 사람이 있으니까 차라리 기자회견을 열어서 ‘폴라 나이트클럽’의 표절 건과 박시완의 추행 건을 한꺼번에 폭로하는 거야. 그러면 네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 송준혁의 두 눈이 계략으로 번뜩였다.
  • 이에 신가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폴라 나이트’는 박시완과 신씨 가문이 함께 엄청난 투자금을 들여 지은 최고급 클럽이었다.
  • 설계 초기 단계에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을 들고 박시완을 찾아갔었고, 박시완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디자인을 채택했었다. 애초부터 그를 겨냥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 그렇게 표절에 추행까지 더해져 감히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던 고귀하던 남자는 그 일로 인해 절대 벗어던질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 신가윤은 그가 자신을 범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공개적으로 인정하던 순간 그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 그 실망으로 가득 찬 핏발이 선 두 눈은 한순간 마주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었다.
  • ……
  • 몇 마디 대꾸해 준 뒤 그녀는 더는 그곳에서 송준혁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 그녀는 빨리 박시완을 찾아가야 했다. 그가 정말로 인천 프로젝트를 송씨 가문의 손에 넘겨주게 해서는 안 되었다.
  • 이에 그곳을 떠난 뒤, 신가윤은 이내 휴대폰에서 박시완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 다행히도 당시 그녀가 송씨 가문과 한통속이었을 시기에 미리 작당하고 있었기에, 그의 전화번호가 내내 그녀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그 시각 사무실에 앉아 있는 박시완은 어두운 눈빛으로 책상 위에서 20분 가까이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그리고 그가 끝내는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신가윤이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갑자기 통화가 연결되었다.
  •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알 듯 말 듯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 “신가윤, 너 적당히 해.”
  • 그녀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찾는 건 보나 마나 또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일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자꾸만 모질어지지가 않았다.
  • “박… 박시완.”
  • 갑작스레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애초에 풀이 죽어있는 상태였던 신가윤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 “인천 프로젝트는 신씨 가문이야말로 최적의 협력 상대야. 송씨 가문은 적합하지 않아.”
  •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프로젝트는 당시 그녀의 계략으로 인해 박시완은 송씨 가문과 계약했었던 것이었다.
  • 하지만 송씨 가문은 오래전 이미 뿌리부터 썩어있는 상태였었고, 과하게 자재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낀다거나 가족이나 친척들을 낙하산으로 채용하는 등의 일들을 일삼았었다.
  • 그러다 결국에는 공사장에서 인명사고까지 생기게 되어 덩달아 박시완까지 엄청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었다.
  • 또한 신씨 가문은 이 프로젝트를 잃고 따로 도시 동쪽 변두리의 부지를 개발하려 시도했지만, 하필 그 부지에서 능묘가 발굴되면서 신씨 가문의 프로젝트는 그대로 날리게 되었다.
  • 박시완의 두 눈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는 송씨 가문을 위해 온갖 계략을 꾸며대던 그녀가 이제 와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건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 “인천 프로젝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물러서 준 거야. 그러니까 그쯤 했으면 이제 그만해.”
  • 이 한마디를 끝으로 신호음만 남긴 채 전화는 끊어졌다.
  • “……”
  • 신가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아마도 그를 이용하고 속였던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던 터라 이제 그는 더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리라. 신가윤은 눈시울을 붉히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 ‘하긴, 나라도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바꾸면 안 믿을 것 같아.’
  • 하지만 그녀는 인천 프로젝트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송씨 가문과 계약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 그녀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로얄 타운으로 향했다. 그녀는 박시완의 집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이에 그녀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에 대해 그에게 똑똑히 설명을 해야 했다.
  • ……
  • 신가윤은 로얄 타운 대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 서울의 최상위층 재벌들이 사는 아파트답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경비원 역시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져 감에 따라 날도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 신가윤은 이곳에서 박시완을 만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 저녁 여덟 시쯤이 되자,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천천히 대문 앞에 멈춰 섰다.
  •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신가윤을 알아본 진성현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 하지만 그는 행여라도 그녀가 또 박시완을 귀찮게 할까 걱정되어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 진성현이 그런 반응을 보일만도 한 것이, 필경 그녀가 박시완을 찾아왔을 때마다 좋은 일이 생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진성현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기대앉아 있는 창백한 안색의 박시완을 힐긋 쳐다보았다.
  • 박시완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며 신가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자, 진성현은 곧바로 속도를 올렸다.
  • 얼른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박시완은 종래로 독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가윤 앞에만 서면 그는 마치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행동했다.
  • 차가 순조롭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진성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하지만 진성현은 모르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속도를 올리던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잘생긴 남자가 서서히 눈을 뜨고 백미러를 쳐다보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 눈에 익은 가녀린 인영 하나가 아파트 대문 입구 쪽에 서서 안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이에 박시완은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 그리고 한참 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 “후진해.”
  • 그 말에 진성현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감히 뭐라 하지도 못하고 기어를 바꿔 아파트 대문 앞까지 후진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신가윤은 기다림에 마음이 초조했다.
  • 이 시기에 박시완의 차 번호가 기억나지지 않았던 그녀는 조금 전 미처 번호판을 확인할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린 그 벤틀리 차량 때문에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다.
  • 그러던 그때 그 차가 다시 후진해 돌아온 것이었다.
  • 잠시 뒤, 차 창문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핏기 없이 차가운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남자는 시선을 들어 올려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 이에 놀란 듯 잠시 그 자리에 서있던 신가윤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 ‘웃기지 말라 그래!’
  • 지금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더는 그를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 진성현은 엄청난 붙임성을 보여주는 여자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
  • 박시완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 “내려!”
  •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