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와 재킷은 주름 하나 없이 다려져 있었고 넥타이는 그녀에게서 받은 유일한 선물인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로 골랐다.
남자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는 꽤 걷혀 있었다.
마치 데이트를 나가는 소년같이, 그는 차를 몰고 그녀를 위해 만든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새빨간 장미들이 한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 꽃들로 가득한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고, 언덕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꽂혀있었다.
사랑받는 아내 신가윤의 묘. 그 글자들은 그가 단도로 한 자 한 자 직접 새겨 넣은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의 넝쿨들이 비석을 에워싸고 있었고 그 넝쿨들 위에 장미 몇 송이가 탐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박시완은 버림받은 아이처럼 그녀의 비석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정적을 깨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 대표님, 전에 지시하신 각막 이식 수술에 대해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던 박시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소하세요.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
그런 그의 말에 상대는 안도했다. 그로서는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박씨 가문 도련님의 눈을 그 여자에게 이식해 주었더라면 박씨 가문에서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신가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체도 느껴지지 않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박시완이 나한테 눈을 주려 했다니! 나한테 자신의 두 눈을 주려 했다니! 왜 나한테 그토록 잘해주는 거야? 왜 나한테 눈을 주려고 했던 거야? 내가 번번이 당신을 이용하고 속이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왜 그걸 기꺼이 당해준 거야? 송준혁이 날 미끼로 썼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왜 목숨 걸고 날 구하려 했던 거냐고! 바보 같은 사람! 박시완 당신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야!’
“성현아, 3월 6일이 윤이 부모님 기일이야. 앞으로 매년 네가 나 대신 무덤 앞에 꽃 좀 놔줘.”
“대표님…”
박시완은 손끝으로 비석 위의 새겨진 ‘윤’ 자를 매만졌다. 그의 두 눈에 얼핏 다정함이 스쳤다.
“날 그녀와 함께 묻어줘.”
신가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안돼… 박시완! 안돼!”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무언가 느낀 듯 박시완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윤아, 날 보러 온 거야?”
신가윤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한참 뒤, 그가 검은색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자신의 머리에 겨눈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내지 마. 우리… 금방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탕-!
단발의 총성과 함께 박시완이 묘비 앞에 쓰러졌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별들이 그 빛을 잃은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장미꽃을 사랑했던 소년은 이제 가장 사랑하는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신가윤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영혼도 서서히 투명해져 가기 시작했다.
‘박시완,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내가 꼭 당신을 아껴줄게…’
……
“허, 넌 정말이지 송준혁 그 사람을 위해 못하는 짓이 없군!”
차갑고도 익숙한 목소리에 신가윤은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눈앞의 낯선 호텔 방을 훑어보았다.
머리는 지끈거리며 아파왔고, 숙취로 인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박시완, 당신 팔이…”
신가윤은 멍하니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얼굴, 그리고 예쁜 두 눈은 어둡고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그 수많은 배신과 상처에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중요한 건, 그의 왼팔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신가윤은 자신이 잘못 본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이상하리만치 현실적인 촉감에 그녀는 미칠 듯이 기뻤다.
그녀는 어딘가 신이 난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팔 괜찮은 거야?”
이에 박시완은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있는 그녀를 밀어냈다.
“또 무슨 수작이야?”
신가윤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박시완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더니 날카로운 두 눈을 살짝 내리깐 채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인천 프로젝트는 신씨 가문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송씨 가문과 새로 계약하도록 할 테니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더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그곳을 떠나갔다.
그는 파렴치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송씨 가문은 사업 파트너로서 절대적으로 좋은 선택지가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씨 가문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었고, 그녀는 그들을 거의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계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는 차마 그녀를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박시완은 자신의 얼굴 위에 드러난 자조적인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떨구었다.
……
한편 신가윤은 한참을 넋이 나간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인천 프로젝트라니? 신씨 가문이라니? 그건 10년 전이잖아… 설마 신씨 가문이 아직 존재한다는 거야?’
양아버지인 송진호는 그녀가 신씨 가문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딸이었다고 계속 그녀를 속였었다. 그녀의 친어머니가 신씨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그녀는 고아원에 버려진 것이었다고 말이다.
이에 전생에서 그녀는 신씨 가문과 박시완이 사업적으로 꽤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에 대한 복수로 송씨 가문과 함께 암암리에 여러 부당한 수단을 동원해 일찍이 신씨 가문을 무너뜨렸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모든 일들이 아직 벌어지기 전이었다.
신가윤은 화장실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 속 앳된 얼굴의 예쁘장한 소녀를 마주한 그녀의 예쁜 두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져 갔다.
그녀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새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칼자국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눈은… 맑게 반짝이고 있었고… 눈앞의 모든 것이 너무 똑똑하게 잘 보였다!
‘되살아난 건가?’
그녀는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하늘이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신가윤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송준혁, 송수민! 딱 기다려. 이번에는 내가 꼭 당신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까!”
감정을 추스른 신가윤은 물건을 챙겨 곧장 박시완을 쫓아 나갔다.
그녀는 인천 프로젝트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송씨 가문은 박시완과 신씨 가문의 협력을 깨트리기 위해 그녀에게 술을 먹여 박시완의 침대로 보냈었다.
그 일로 그녀는 자신이 박시완에게 범해진 것이라 오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를 그토록 증오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혐오감을 억지로 참은 채 이를 빌미로 그를 협박했었다.
“박 대표님, 인천 프로젝트를 송씨 가문에게 넘긴다면 지난밤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요. 이 일은 이렇게 서로 합의 보는 걸로 하시죠.”
그리고 그 한마디 때문에 박시완이 그녀를 너그럽다며 조롱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신가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너그러운 게 맞잖아? 그 모든 게 다 계략이었던 것도 모르고 송씨 가문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내 순결을 내놓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지난밤 박시완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신가윤은 순간 마음 한편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는 그녀를 대할 때면 늘 그렇듯 그녀를 아꼈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른 채 번번이 그의 진심을 이용했었고, 갖은 계략을 부렸었다.
‘결국 시체도 못 건지는 죽음을 맞이하게 돼도 싸지! 하지만 그토록 좋은 사람인 박시완은,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인 그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겨우 1층 로비까지 쫓아내려 온 신가윤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다급하면서도 익숙한, 또한 역겨움이 밀려오는 그 목소리에 신가윤은 사색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