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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또 무슨 수작이야?

  • 3개월 뒤, 한때 잘 나갔던 송씨 가문은 이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이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오고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기분 좋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 박시완은 거울 앞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 셔츠와 재킷은 주름 하나 없이 다려져 있었고 넥타이는 그녀에게서 받은 유일한 선물인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로 골랐다.
  • 남자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는 꽤 걷혀 있었다.
  • 마치 데이트를 나가는 소년같이, 그는 차를 몰고 그녀를 위해 만든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 새빨간 장미들이 한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그 꽃들로 가득한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었고, 언덕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꽂혀있었다.
  • 사랑받는 아내 신가윤의 묘. 그 글자들은 그가 단도로 한 자 한 자 직접 새겨 넣은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 짙은 초록색의 넝쿨들이 비석을 에워싸고 있었고 그 넝쿨들 위에 장미 몇 송이가 탐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 박시완은 버림받은 아이처럼 그녀의 비석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 그때 갑자기 정적을 깨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박 대표님, 전에 지시하신 각막 이식 수술에 대해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 한참을 침묵하던 박시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취소하세요.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
  • 그런 그의 말에 상대는 안도했다. 그로서는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었다.
  • 그렇지 않고 정말로 박씨 가문 도련님의 눈을 그 여자에게 이식해 주었더라면 박씨 가문에서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신가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체도 느껴지지 않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 ‘박시완이 나한테 눈을 주려 했다니! 나한테 자신의 두 눈을 주려 했다니! 왜 나한테 그토록 잘해주는 거야? 왜 나한테 눈을 주려고 했던 거야? 내가 번번이 당신을 이용하고 속이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왜 그걸 기꺼이 당해준 거야? 송준혁이 날 미끼로 썼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왜 목숨 걸고 날 구하려 했던 거냐고! 바보 같은 사람! 박시완 당신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야!’
  • “성현아, 3월 6일이 윤이 부모님 기일이야. 앞으로 매년 네가 나 대신 무덤 앞에 꽃 좀 놔줘.”
  • “대표님…”
  • 박시완은 손끝으로 비석 위의 새겨진 ‘윤’ 자를 매만졌다. 그의 두 눈에 얼핏 다정함이 스쳤다.
  • “날 그녀와 함께 묻어줘.”
  • 신가윤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 “안돼… 박시완! 안돼!”
  •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무언가 느낀 듯 박시완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윤아, 날 보러 온 거야?”
  • 신가윤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 한참 뒤, 그가 검은색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자신의 머리에 겨눈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겁내지 마. 우리… 금방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 탕-!
  • 단발의 총성과 함께 박시완이 묘비 앞에 쓰러졌다.
  •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별들이 그 빛을 잃은 것만 같았다.
  • 그녀의 장미꽃을 사랑했던 소년은 이제 가장 사랑하는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 신가윤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영혼도 서서히 투명해져 가기 시작했다.
  • ‘박시완,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내가 꼭 당신을 아껴줄게…’
  • ……
  • “허, 넌 정말이지 송준혁 그 사람을 위해 못하는 짓이 없군!”
  • 차갑고도 익숙한 목소리에 신가윤은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 그녀는 넋이 나간 채 눈앞의 낯선 호텔 방을 훑어보았다.
  • 머리는 지끈거리며 아파왔고, 숙취로 인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 “박시완, 당신 팔이…”
  • 신가윤은 멍하니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체격에 차가운 얼굴, 그리고 예쁜 두 눈은 어둡고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그 수많은 배신과 상처에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 중요한 건, 그의 왼팔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 신가윤은 자신이 잘못 본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 그리고 그 이상하리만치 현실적인 촉감에 그녀는 미칠 듯이 기뻤다.
  • 그녀는 어딘가 신이 난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팔 괜찮은 거야?”
  • 이에 박시완은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있는 그녀를 밀어냈다.
  • “또 무슨 수작이야?”
  • 신가윤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 박시완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더니 날카로운 두 눈을 살짝 내리깐 채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네가 원하는 대로 인천 프로젝트는 신씨 가문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송씨 가문과 새로 계약하도록 할 테니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 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더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그곳을 떠나갔다.
  • 그는 파렴치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송씨 가문은 사업 파트너로서 절대적으로 좋은 선택지가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송씨 가문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었고, 그녀는 그들을 거의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다.
  • 그렇기에 그는 계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는 차마 그녀를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 이에 박시완은 자신의 얼굴 위에 드러난 자조적인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떨구었다.
  • ……
  • 한편 신가윤은 한참을 넋이 나간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 ‘인천 프로젝트라니? 신씨 가문이라니? 그건 10년 전이잖아… 설마 신씨 가문이 아직 존재한다는 거야?’
  • 양아버지인 송진호는 그녀가 신씨 가문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딸이었다고 계속 그녀를 속였었다. 그녀의 친어머니가 신씨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그녀는 고아원에 버려진 것이었다고 말이다.
  • 이에 전생에서 그녀는 신씨 가문과 박시완이 사업적으로 꽤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에 대한 복수로 송씨 가문과 함께 암암리에 여러 부당한 수단을 동원해 일찍이 신씨 가문을 무너뜨렸었다.
  • 하지만 현재는 그 모든 일들이 아직 벌어지기 전이었다.
  • 신가윤은 화장실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 속 앳된 얼굴의 예쁘장한 소녀를 마주한 그녀의 예쁜 두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져 갔다.
  • 그녀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새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칼자국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리고 두 눈은… 맑게 반짝이고 있었고… 눈앞의 모든 것이 너무 똑똑하게 잘 보였다!
  • ‘되살아난 건가?’
  • 그녀는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 하늘이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 신가윤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 “송준혁, 송수민! 딱 기다려. 이번에는 내가 꼭 당신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까!”
  • 감정을 추스른 신가윤은 물건을 챙겨 곧장 박시완을 쫓아 나갔다.
  • 그녀는 인천 프로젝트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송씨 가문은 박시완과 신씨 가문의 협력을 깨트리기 위해 그녀에게 술을 먹여 박시완의 침대로 보냈었다.
  • 그 일로 그녀는 자신이 박시완에게 범해진 것이라 오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를 그토록 증오하게 된 것이었다.
  •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혐오감을 억지로 참은 채 이를 빌미로 그를 협박했었다.
  • “박 대표님, 인천 프로젝트를 송씨 가문에게 넘긴다면 지난밤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요. 이 일은 이렇게 서로 합의 보는 걸로 하시죠.”
  • 그리고 그 한마디 때문에 박시완이 그녀를 너그럽다며 조롱했던 것이었다.
  • 여기까지 생각하던 신가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 ‘너그러운 게 맞잖아? 그 모든 게 다 계략이었던 것도 모르고 송씨 가문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내 순결을 내놓았으니 말이야.’
  •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지난밤 박시완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던 것이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신가윤은 순간 마음 한편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 그는 그녀를 대할 때면 늘 그렇듯 그녀를 아꼈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었다.
  • 하지만 그녀는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른 채 번번이 그의 진심을 이용했었고, 갖은 계략을 부렸었다.
  • ‘결국 시체도 못 건지는 죽음을 맞이하게 돼도 싸지! 하지만 그토록 좋은 사람인 박시완은,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인 그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되는 거였어…’
  • 하지만 겨우 1층 로비까지 쫓아내려 온 신가윤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 다급하면서도 익숙한, 또한 역겨움이 밀려오는 그 목소리에 신가윤은 사색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