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 소리 마세요. 전 가윤이 같은 애를 고용하지는 못하겠네요. 걘 어려서부터 송씨 가문에서 오냐오냐해주기만 한 터라 차를 따라주는 일 같은 걸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해지더니 다들 유민지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든 채 억지스러운 웃음으로 난처한 기색을 숨기려 했다.
유민지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 채 곧 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된다는 사실에 취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가 고용인이었으니 걔한테도 분명 어느 정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신가윤은 이제껏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곤 했으니 이제 와서 고개를 숙이려 할 리가 없겠죠.”
그런데 다음 순간, 신가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지 아가씨께서 제가 뭘 해주길 바라시는지 궁금하네요? 차를 따라드릴까요, 아니면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밥도 떠먹여 드릴까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갑고도 산뜻한 목소리에 유민지의 표정이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가윤이 이곳에 올 줄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신씨 가문이 어떠한 실마리라도 찾아낼까 이 사실을 꼭꼭 숨겨왔었다.
그렇게 이 소식이 신가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가윤아, 오해야…”
유민지가 다급히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에 신가윤은 새빨간 입술을 말아 올려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민지 아가씨께서 그렇듯 성급하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는 몰락한 집안사람들의 모습과 똑 닮아있네요. 하루아침에 득세하고 거만하게 설쳐대는 모습이 말이에요.”
신가윤이 이렇듯 다짜고짜 거리낌 없는 말들을 쏟아낼 줄은 몰랐던 유민지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가윤아,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정말로 네가 오해한 거야…”
그녀는 아직은 신가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을 훔쳤으니, 잠시간은 많은 일을 위해 신가윤이 곁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가윤은 싱긋 미소 지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오해라면 어디 한 번 설명해 보든지.”
그 말에 유민지는 조금은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다음 순간, 신가윤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민지야, 내가 뭘 질투한다는 거야? 네가 분명 빈털터리이면서도 한 번에 일을 여러 개 해가면서까지 명품을 사는 거? 아니면 달동네에 살면서도 잘난 집안 출신인 척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술꾼인 너희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너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거?”
신가윤은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뱉는 말마다 유민지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이에 유민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신가윤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것들을 들추어낼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신가윤은 언제나 속여먹기 가장 쉬운 애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유민지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억지로 분노를 참아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윤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래? 그럼 내 귀가 잘못된 거네? 아니면 여기 있는 분들도 다들 꿈을 꾸고 계신 건가?”
신가윤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난 한기에 유민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더는 가식이 통할 것 같아 보이지 않자, 유민지는 차라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가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그래봤자 얼굴 좀 반반하고 운이 좀 좋은 것뿐이잖아! 송씨 가문이 널 거둬주지 않았다면 너 같은 사생아의 처지는 나보다도 더 못했을 거야! 아참,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송씨 가문에서 널 거둬줬다고 해도 넌 어차피 박시완이 놀다 버린 헌신짝에 불과해! 한쪽으로 준혁 오빠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또 박시완과 놀아나려고? 박시완 같은 사람이 널 성에 차 하기나 할 것 같아? 잘 들어, 그 사람은 그냥 널 가지고 논 거야! 당연히 준혁 오빠도 더는 널 원하지 않을 거고…”
유민지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오랫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자 순간 말로 다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신가윤은 화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려던 그때, 한 남자의 낮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 있는 손님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아가씨께서는 제 취향을 꽤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이에 신가윤은 순간 놀란 듯하더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터주었고, 그 사이로 훤칠한 체격의 박시완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그 새하얗고 잘생긴 얼굴 위의 날카로운 두 눈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미간에는 뼛속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한 독기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쁜 두 눈은 현재 엄청난 기세로 유민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소란스럽던 사람들까지도 한결 조용해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고,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박 대표님이 오셨네요.”
“박 대표님도 오실 줄 몰랐어요.”
“박 대표님과 신씨 가문은 이제껏 사이가 꽤 좋았잖아요. 신 회장님 생신이니 박 대표님께서도 분명 얼굴을 비추시려고 오신 걸 거예요.”
“그런데 저 유민지라는 여자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래요? 감히 박 대표님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미친 거 아니에요?”
“어쩌면 일부러 소란을 피워 박 대표님의 관심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
남자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차가운 두 눈을 마주한 유민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박… 박 대표님… 저… 그게…”
그녀는 자신의 말을 박시완이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는 평소에도 감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유민지는 최대한 자신을 격식 있고 침착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남자의 두 눈만 마주하면 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졌고, 다리도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왔다.
박시완이 가볍게 입술을 달싹여 재밌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왜 그러시죠? 차라리 아가씨께서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의 자리에 앉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들인 저에게 신붓감을 골라주시게 말입니다.”
그 한마디에 유민지의 얼굴은 더 새하얗게 질려갔다.
주위 사람들이 순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유민지 씨는 어린 나이에 걱정거리도 많으시네요. 박 대표님의 일에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하시다니 말입니다.”
“어느 유씨 가문이랍니까? 어쩜 저렇게 교양 없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이 되고 싶대요? 무슨 자격으로? 박씨 가문의 셋째 사모님은 온 서울을 뒤흔든 미인이시라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사모님이라고 굽신거리게 되는 분이시란 말입니다.”
“……”
유민지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불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그런 농담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앞으로는 꼭 주의할게요…”
이에 박시완은 냉소를 터트렸다.
“성현아, 박씨 가문 산하의 모든 산업의 블랙리스트에 이 여자의 이름을 올려놔.”
그러자 유민지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박시완은 그런 그녀와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 옆에 있는 신가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갔다.
이에 신가윤 역시 유민지를 내버려둔 채 돌아서서 그를 쫓아갔다.
‘신가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유민지는 핏발이 선 눈으로 분노에 차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신가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될 첫날이자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에서 이 서울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
“박시완.”
신가윤은 쫓아가 작은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에 박시완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은색의 끈 나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유달리 돋보였고 드레스 위에 수놓아져 있는 수많은 자수가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며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박시완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억지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예뻤다. 무턱대고 마르기만 한 것이 아닌 살집과 골격이 균형 잡혀 있는 손이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그 손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