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진실은 항상 굉장히 잔인하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신가윤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 유민지는 옥패를 훔쳐 가 그녀의 신분을 도용했고, 한편으로 신씨 가문의 사랑을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송준혁과 시시덕거리며 신씨 가문을 수렁에 빠트릴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번 생에서는 다시는 유민지의 간사한 계략대로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 신가윤은 생각을 접고 휴대폰을 꺼내 강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재준아, 옥패 제작해 주시는 분 아는 사람 있어? 옥패 하나 주문 제작하려고.”
- 강씨 가문은 서울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가였다. 강재준은 비록 강씨 가문의 사생아이기는 했지만 강씨 가문이라는 신분 덕에 재벌가 자제들이나 여러 직종의 사람들과 꽤 괜찮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 “옥의 재질하고 디자인, 그리고 색감을 나한테 문자로 보내줘.”
-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신가윤은 어딘가 얼떨떨했다.
-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강재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윤아?”
- “별거 아니야, 그냥…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아서.”
- ‘전생에… 강재준은 어떻게 됐었지?’
- 전생에서 강재준은 그녀와 박시완 사이의 일을 알게 된 이후로 사사건건 박시완을 걸고넘어졌었다.
- 비록 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박시완에게 적잖은 성가신 문제들을 일으켰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 그 이후, 그녀가 실명을 하고 얼굴 역시 망가지게 되자 강재준은 그녀를 데리고 떠나고 싶어 했지만 박시완은 그녀와 결혼할 것을 고집하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었다.
-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고, 결국 강재준은 그녀와 박시완의 결혼식이 있던 그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었다.
- 또한 그 일로 인해 그녀는 그 모든 책임을 박시완에게 떠밀었고, 그때부터 박시완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 “누가 괴롭혔어?”
-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한 강재준은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룸을 나와 조용하고 탁 트인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문득, 진실은… 항상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신가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 그녀는 자신의 곁에 송준혁이나 송수민, 그리고 유민지 같은 비열한 인간들 말고도 강재준과 고유빈 같은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처럼 느껴졌다.
- 강재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 “무슨 일이야, 윤아?”
- 이에 잠시 침묵하던 신가윤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저 송씨 가문이 나한테 잘해줬던 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치밀하게 설계된 사기극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뿐이야…”
- 그녀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강재준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거라 믿었다.
- 전화를 끊은 뒤, 신가윤은 창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있었다.
- 전생에서 그녀는 나쁜 이들과 손을 잡고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또한 가장 믿었던 송씨 가문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었다.
- ‘그럼 박시완은? 그 사람은 내가 그 잔인한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내가 남은 삶을 끝없는 후회와 원망 속에 살아갈까 봐, 그래서 단 한 번도 설명다운 설명을 해주지 않았던 건가?’
- 그는 차라리 자신이 그녀의 모든 증오를 감내하고서라도 그토록 조심스레 그녀가 쏟았던 진심을 지켜주었던 것이었고, 그녀를 위해 하나의 아름답지만 허황한 꿈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다.
- “바보.”
- 신가윤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난 뒤, 그녀는 박시완의 전화번호를 찾아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상처에 물 닿지 않게 하고, 약 제때 갈아줘.]
- 한창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박시완은 그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 그러던 그때, 진성현이 새로운 계약서 몇 장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 “대표님, 신가윤 아가씨가 대표님 컴퓨터에서 빼간 파일들은…”
- 하지만 진성현은 그 뒷말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 필경, 박시완은 신가윤에 대한 일에서는 항상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만약 신가윤이 정말 그것들을 송씨 가문에게 넘겼다면 그들에게는 적지 않은 손실인 것이 분명했다.
- 박시완은 시선을 떨구었다. 머릿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또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렇게 다시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양쪽으로 다 준비해 둬.”
- “알겠습니다.”
- ……
- 일주일 뒤, 신씨 가문의 가장인 신한식의 생일파티.
- 강재준에게 부탁해 초대장을 구한 신가윤은 일찍이 파티장에 도착해 있었다.
- 전생이었다면 지금 그녀는 여전히 박시완에게 범해졌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 이곳에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녀는 바로 이 파티에서 신씨 가문은 모두에게 유민지가 신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을 공표하며 모든 이들에게 그녀가 신씨 부부가 수년 전 잃어버렸던 딸이라고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지금 유민지가 또다시 내 신분을 도용해 내 가족들을 해치려 한다? 꿈 깨라 그래!!!’
- 파티장은 서울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호텔로 골랐다.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호화로운 유럽 스타일이었고 오고 가는 술잔들 사이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다발과 선물들이 가득 보였다.
- 신가윤이 도착했을 때 파티장 안에는 이미 손님들이 적잖이 와있는 상태였다.
- 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꽤나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민지를 찾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드레스 차림의 한껏 꾸민 여자가 손에 술잔을 든 채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이에 신가윤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번뜩였다.
- ‘쯧, 역시 단단히 준비하고 왔네. 돈 꽤나 썼겠어.’
- 유민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술꾼이었다.
- 변변치 않은 가정형편에 그녀는 재벌들 틈에 섞여 들기 위해 동시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세일하는 명품들을 자주 사들이며 자신을 가정형편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 꾸며냈다.
- 하지만 오늘 그녀가 몸에 두른 것들을 보니 드레스는 C 브랜드의 신상이었고, 착용하고 있는 몇 개의 장신구들도 유달리 정교해 보였다.
- 그리고 그것들이 그녀를 꽤나 통이 크고 안목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해 주었다.
- 신가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샴페인을 한 잔 가져다 한입에 다 털어 넣은 뒤, 빈 잔을 다시 트레이 위에 올려놓고 유민지를 향해 걸어갔다.
- “민지 씨, 소문에 의하면 민지 씨가 신씨 가문이 오래전 잃어버렸던 딸이라던데, 사실이에요?”
- 유민지와 사이가 꽤 괜찮은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다들 신한식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파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에 유민지는 부정하지 않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저 역시 생각도 못 했어요.”
- 그 말에 곧바로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그녀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 “민지 씨는 항상 어디에서도 눈에 띄고, 분위기도 범상치 않다 했는데, 신씨 가문의 따님이셨을 줄을 몰랐네요. 그러니 모든 면에서 다 뛰어나셨던 거군요.”
- “그러게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에 저희를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 그러자 유민지는 기분이 썩 좋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야 당연하죠. 상황이 어떻게 변했던지 우린 항상 친구예요.”
-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 위에 떠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 “아참, 신가윤 씨는 왜 안 온 거예요? 민지 씨가 친가족을 찾은 이처럼 기쁜 날에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칠 수가 있는 거죠?”
- 이에 유민지는 한숨을 내쉬며 속상한 듯 말을 내뱉었다.
- “아마도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죠… 자기는 신씨 가문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딸인데, 전 이제 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됐잖아요. 아마… 마음이 불편한 걸 거예요…”
- “정말이지,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 “하지만 말하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가윤 씨는 가정부가 낳은 사생아이고, 그저 운이 좋아 송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것뿐이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민지 씨 같은 진짜 부잣집 아가씨와 함께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겠어요.”
- 이에 유민지가 속상한 듯 입을 열었다.
- “비록 전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가윤이가 이 일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을 몰랐어요. 하지만 질투가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죠. 필경 그 애는 자존심이 강한데 여러 면에서 저보다 못했었고, 이제 유일하게 저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신분까지 바뀌었으니…”
- 그러자 누군가가 맞장구쳤다.
- “그래도 친구였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죠. 하지만 말하고 보면 가윤 씨는 신씨 가문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딸이니 이후 가윤 씨도 민지 씨의 가정부로 일하면 되겠네요. 어머니가 하던 일을 딸이 이어받아서 하는 것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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