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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하던 거 계속 해

  • 신가윤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러는 당신은? 당신은 왜 번번이 내 요구를 들어준 건데?”
  • ‘나한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매번 눈 감아 준 건데?’
  • 전생의 그녀는 내내 그것이 자신의 협박이 통했기 때문에 자신과 송씨 가문의 계략대로 된 것이라 생각했었다.
  • 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던 것이었다.
  • 박시완은 말문이 막혔다.
  • 놀란 듯 굳어버린 그의 얼굴을 뒤로 하고, 신가윤은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이 위치에 거즈를 붙여두면 밀리기 쉬우니까 붕대를 허리에 감아줄게. 조금만 일어나서 앉아 봐.”
  • 박시완은 말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다만 시선만은 내내 신가윤에게서 떼지 못한 채였다.
  • 그는 이런 다정함이 좋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신가윤은 별생각 없이 붕대를 길게 빼 들고 그의 허리에 감았다.
  • 하지만 등 뒤로 넘긴 붕대를 다시 감아오기에는 한 손만으로는 부족했던 터라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른 손으로 붕대를 잡았다.
  • 그런 그녀의 행동에 박시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 그리고 그제야 신가윤 역시 현재 자신의 동작이 너무 야릇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동작은 마치 자신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 이에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동시에 바짝 긴장한 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 그녀의 얼굴은 그의 허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 이에 신가윤은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 그의 몸매가 굉장히 좋다는 것은 그녀도 항상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늘씬해 보이지만 벗으면 근육이 잘 잡혀있는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 전생에서도 딱히 신경 쓴 적은 없었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몸매 말이다.
  • 하지만 지금… 그런 그의 복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명확하게 갈라져 있는 탄탄한 복근과 하얀 피부, 헤쳐진 셔츠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예쁜 치골, 그리고 자세에 따라 느슨하게 허리 위에 걸쳐진 긴 양복바지까지, 모든 것들이 섹시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 “어때?”
  • 박시완이 새까만 두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신가윤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 드러나 있는 조롱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 그녀의 두 볼이 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귀를 타고 목까지 번져 목덜미 전체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 “괜… 괜찮네.”
  • 신가윤은 급히 그의 등 뒤에서 오른손으로 넘긴 붕대를 잡아 앞쪽으로 감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얼굴은 잔뜩 빨개져 있었다.
  • “단지 괜찮은 정도야?”
  • 박시완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빨개진 귓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의 말투는 꽤 나긋나긋했다. 하지만 신가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동그란 두 눈에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한 송이의 탐스러운 장미 같았다.
  • ‘더워…’
  • 곧이어 또 한 바퀴 붕대를 감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녀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 이에 잠시 망설이던 신가윤은 눈 딱 감고 다시 한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숨을 참은 채 그의 등 뒤로 붕대를 감았다.
  • ‘에잇, 죽으면 죽는 거지 뭐!’
  • 남자의 몸에서는 굉장히 기분 좋은 싱그러운 소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 지금에야 피비린내와 약 냄새에 가려져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여전히 그토록 뚜렷한 향기가 코끝에 번져왔다.
  • 이에 신가윤은 저도 모르게 아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전생에서의 마지막 몇 년간 그녀는 여전히 진실을 모른 채 그를 증오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존재에 익숙해져 버린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오직 그의 체취만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 그와 함께했었던 그 시간들에도 그녀는 증오에 눈이 멀어 있었고, 그를 마지막 한줄기 지푸라기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소중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 그 생각에 신가윤은 또 한 번 침울해졌다. 그녀는 스스로가 실패자같이 느껴졌다.
  • 몇 분 뒤, 그녀는 조심스레 붕대를 감은 뒤 작고 귀여운 매듭을 하나 묶었다.
  • “됐다.”
  • 그러다 말을 하는 사이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 약병을 줍기 위해 신가윤은 고개를 숙였다. 하
  • 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머리카락 한 줌이 그의 벨트 위에 있는 버클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 “앗…”
  • 이에 순간 헛숨을 들이키던 신가윤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어 되는 대로 그의 벨트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 그런 그녀의 행동에 박시완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가 커가란 손으로 여기저기 함부로 만져대는 그녀의 작은 손을 제지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 그리고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신가윤,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 신가윤은 울고만 싶었다.
  • “머리카락이…”
  • 하지만 바로 그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껄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삼촌, 설마 정말로 그 인천 프로젝트…”
  • 내뱉은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박현우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 항상 금욕적이기만 하던 자신의 막내 삼촌은 옷섶을 반쯤 열어젖힌 상태로 소파 위에 기대앉아있고, 그런 그의 앞에는 가녀린 몸매의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 하나가 꿇어앉아 있는 광경을 말이다.
  • ‘대박!’
  • 박현우는 빙그레 웃더니 어딘가 껄렁한 모습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며 미심쩍게 한마디 내뱉었다.
  • “두 사람 하던 거 계속해… 계속해!”
  • 이에 박시완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신가윤은 마냥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 “???”
  • 몇 초 뒤, 신가윤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그 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 “그… 그런 게 아니라…”
  • 그녀는 상황을 설명하려 하며 더 다급하게 끼어버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 하지만 각도가 이상했던 터라 그녀는 머리카락이 당겨진 상태임에도 도저히 머리를 숙일 수가 없었다.
  • 게다가 박현우는 이미 가버린 상태였기에 신가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 하지만 박시완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은 듯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런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런 게 어떤 건데?”
  •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신가윤은 피하려 몸을 움직였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움직이지 마… 아파…”
  •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예전의 차가움과 가식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간드러지면서도 진실한 목소리였다.
  • “머… 머리카락 좀 빼줘.”
  • 신가윤은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행여 어떠한 불꽃이라도 튕길까 다시 그의 벨트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 이에 깊고도 짙은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몇 초간 뚫어져라 바라보던 박시완은 의외로 손을 뻗어 그녀의 걸린 머리카락들을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신가윤은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 조심스러운 동작에 그녀는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 “됐어.”
  • 몇십 초 뒤, 남자의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신가윤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급히 바닥에서 일어섰다.
  • 하지만 조금 전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불편한 자세로 카펫 위에 꿇어앉아 있었던 그녀는 같은 자세를 너무 오래 유지하고 있었던 탓인지 몸을 일으키자 다리가 저려와 순간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넘어지려 했다.
  • 그러자 박시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뻗어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주었다.
  • 이에 신가윤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급히 다시 중심을 잡고 바로 섰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에 향해 있었다.
  • 예쁜 손이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 손마디는 너무 도드라져 있지 않았고, 정갈하게 자른 손톱 밑의 은은한 핑크색을 띤 반월도 볼 수 있었다.
  • 피부에 닿는 그의 손끝은 조금 차가웠고, 산뜻하면서도 말끔한 감촉이었다.
  • 신가윤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전생에서 그렇게 잃어버렸던 그의 왼팔과 그 이후 또 그렇게 자신의 비석 앞에서 죽어갔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박시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 그렇게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차린 신가윤은 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고마워.”
  • 박시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손끝을 가볍게 매만졌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백옥같이 매끄럽고도 보드라운 그 감촉이 그는 손을 떼기가 아쉬울 만큼 탐이 났다.
  • “난… 난 먼저 가볼게. 인천 프로젝트는 절대 송씨 가문한테 넘기면 안 돼!”
  • 신가윤은 고개를 들어 올려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진지하고도 정중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