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이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야
- “무… 무슨 대가?”
- 신가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애초부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꽤 가까웠었기에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녀의 볼과 그의 입술이 가볍게 스쳤다.
- 이에 그녀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차가운 듯하면서도 말캉한 촉감이 볼을 타고 퍼져갔다. 그러더니 이내 불길이 번지듯 한 곳에서 시작된 불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그녀의 얼굴 전체를 뜨겁게 달궜다.
- 박시완의 동공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더니 그녀가 더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그녀의 입술은 말캉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오래도록 꿈꿔 왔던 것만큼이나 달콤했다.
- 이에 박시완은 마음속의 야수가 갇혀있던 철창에서 벗어나 깊은 욕망을 담아 포효하는 것을 느꼈다.
- 신가윤은 순간 바짝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전생에서 그녀는 비록 박시완과 몇 년을 부부로 지냈지만, 그와 동침을 한 적은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의 외모와 두 눈을 잃었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바닥나 있는 상태였고, 또한 그에게 원망을 품고 있었다.
- 그녀는 그를 증오했다. 자신의 모든 불행의 시작인 그를 증오했기에, 그의 손길을 거부했었다.
- 그나마 가장 평화로웠던 시절에는 아마도 그녀가 지쳐있었기에 그와 별일 없이 같은 지붕 아래, 같은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 박시완은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갔다.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감정을 담아 그는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 그의 짙고도 끈적한 체취가 집요하게 그녀를 휘감았다.
- 이에 신가윤은 찌릿한 전류가 꼬리뼈를 타고 손끝 발끝까지 퍼져나가 머릿속마저 온통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 그녀는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싱그러운 소나무 향기가 정면으로 자신을 덮쳐오더니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 이에 신가윤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박시완은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 그녀가 벽 앞에 배치된 서랍장에 부딪혀 위에 놓아둔 자기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을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더욱더 거칠어지는 호흡에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그 순간, 그녀는 문득 그가 차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신가윤, 너 후회하지 마.”
-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말고는 온 세상이 다 고요해지는 것만 같았다.
- 신가윤은 자신을 진정시키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그저 입맞춤일 뿐이잖아?’
- 당시 그가 고집스레 그녀와 한 침대를 쓰겠다 했을 때에도 그녀는 지금 같은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꼈었다.
- 하지만 아무래도 서툴렀던 탓인지 신가윤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 그러던 와중 그녀는 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가 천천히 옷의 지퍼를 내리는 것을 느꼈다.
- 작은 금속이 궤도를 스치는 그 미세한 소리가 유난히도 귀에 거슬렸다.
- 조금씩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가 늘어갈수록, 신가윤은 통제할 수 없이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 “박시완… 읍… 싫어!”
- 신가윤은 무의식적으로 아직 치마 속으로 파고들지 않은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 그녀의 두 눈에는 촉촉하게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 남자의 예쁜 얼굴은 욕망으로 가득했다.
- 그가 시선을 내려 앞에 있는 그녀를 응시하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말했었잖아. 더는 날 자극하지 말라고.”
- 신가윤은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만 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앞에 있는 이 남자를 원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그가 자신의 비석 앞에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던 그때 자신이 느꼈던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지금처럼 그녀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고, 그 역시 그녀에게 극도로 실망해 있는 순간은 아니었다.
- 또한 지금처럼 이런 일이 빌미가 되는 순간 역시 아니었다.
- 그녀는 평생을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었고, 평생을 누군가의 볼모로 살아왔었다.
- 그렇기에 이번 생에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단숨에 박시완을 밀어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고통을 참아내는 듯한 남자의 나직한 신음이 들려오더니 이내 은은한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퍼져갔다…
- 이에 신가윤은 깜짝 놀랐다. 그의 허리 쪽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 새하얀 셔츠가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 다시 시선을 올려 박시완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안색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을 뿐이었다.
- “다친 거야?”
- 신가윤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조금 전 그녀가 그를 밀어내면서 상처가 건드려진 듯했다.
-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져버리자, 박시완은 입술을 꾹 다물며 몸을 돌려 다른 쪽을 향해 걸어갔다.
- “나가.”
- 하지만 신가윤은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그를 따라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 “한번 봐.”
- 이에 박시완은 화가 난 듯 실소를 터트리며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는 하는 거야?”
- 조롱 섞인 그의 눈빛을 마주한 신가윤은 말문이 막혔다.
- 그제야 그의 상처가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 전생에 그가 자신을 위해 했던 모든 것들이 생각난 신가윤은 이내 결단을 내리고 살짝 홍조 띤 얼굴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앉아. 상처 좀 보게.”
- 박시완은 그녀에게 떠밀리다시피 소파 위에 앉혀졌다.
- 이에 그는 탐색하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 신가윤은 그런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새하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 이내 그의 셔츠를 반쯤 헤치자, 왼쪽 허리춤의 붙여놓은 거즈 위로 이미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는 계속해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 “구급상자 어디 있어?”
- 신가윤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묻어있었다.
- 하지만 박시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에 신가윤도 더 묻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한쪽에 놓여있는 몇 개의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 박시완과 결혼한 뒤 몇 년 동안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녀는 자주 다치기 일쑤였고, 이에 구급상자는 항상 서랍장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두곤 했었다.
- 하지만 지금은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 한참 뒤,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박시완이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왼쪽 두 번째 서랍.”
- 이에 신가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구급상자를 찾아냈다.
- 구급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온 그녀는 가위를 꺼내 그의 상처 위에 붙여놓은 거즈를 조심스럽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 그녀의 동작은 굉장히 섬세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코끝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 그러던 그때, 남자의 나직한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 신가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도 들지 않고 조심조심 잘라낸 거즈를 떼어낸 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이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야.”
- 그 말에 박시완은 동요했다.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다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 ‘그녀는 이번에는 또 뭐가 갖고 싶은 걸까…’
- 그런 그의 생각을 모르는 신가윤은 그저 그의 상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 박씨 가문은 가족 구성원들이 많았고 권력을 빼앗기 위한 과정 또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 박시완이 그중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전생에서도 그와 결혼한 뒤, 그녀는 꽤 자주 그에게서 번져오는 은은한 피 냄새를 맡곤 했었다.
- 그에게서 나는 산산한 소나무 향과 함께 섞여 퍼져오는 비릿한 피 냄새에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 은근하던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방안은 유달리 조용했다.
- 신가윤은 꼼꼼하게 그의 상처를 처치해 주었다. 그것은 10센치 정도 되는 칼자국이었다. 비록 보기에는 이미 며칠 된 상처 같았지만 여전히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보아 분명 꽤 깊은 상처였던 듯했다.
- 이에 신가윤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쓰라렸다.
- ‘전생에서… 난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그를 걱정해 준 적이 없었네…’
- 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도록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박시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처를 살피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지금 이 순간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얼핏 사실은 그녀도 자신을 조금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 “왜?”
- 그가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잠겨 있었다.
- 이에 신가윤은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박시완의 깊은 두 눈을 마주했다.
- 박시완의 예쁜 두 눈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 ‘왜? 왜 갑자기 내 생사를 신경 쓰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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