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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어?

  • 박시완은 눈을 찡그리더니 시선을 들어 올려 경고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 이에 신가윤은 살짝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더니 꽤나 나긋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인천 프로젝트 말인데…”
  • “다시 한번 말할게. 내려!”
  •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차 안의 온도마저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고 그 압박감에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 신가윤은 바짝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 “정말로 당신이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
  • 그녀의 두 눈은 맑고도 깨끗했다. 그리고 현재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 두 눈에는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감, 그리고 보일 듯 말 듯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 박시완이 가볍게 입술을 달싹였다.
  • 그의 칠흑 같은 두 눈은 최후의 통첩을 내리고 있었다.
  • 이에 신가윤은 통제할 수 없이 손끝이 떨려왔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을 내뱉었다.
  • “한 번만 날 믿어주면 안 돼?”
  • 믿음이라는 두 글자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 전생과 이번 생에 했던 짓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기가 너무 힘들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말해야 했다.
  • 이 계약을 저지하고 자신 때문에 시작될 모든 잘못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말해야만 했다.
  • 박시완은 새까만 두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
  •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두 눈에는 약간의 기대가 담겨있었다.
  • 한참 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신가윤, 너 후회하지 마.”
  • 신가윤은 그의 말뜻이 이해되지 않는 듯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박시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출발해.”
  • 이에 진성현은 알겠다 답한 뒤,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 박시완이 더는 자신더러 내리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 신가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사실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어떻게 눈앞의 이 남자가 송씨 가문과의 계약을 취소하도록 설득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를 만난 순간, 그 모든 생각들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 필경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녀는 어젯밤의 ‘불장난’을 빌미로 그를 협박해 그 프로젝트를 송씨 가문에게 넘기라고 했었는데 고작 반나절 만에 다시 번복을 한다니, 다른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송씨 가문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꾸민 일이라고 할까?’
  • 하지만 그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 ‘송씨 가문은 수단도 악랄하고, 일 처리도 대충 겉치레만 한다고 해야 하나?’
  • 하지만 그는 이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 뻔했다.
  •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애초에 엄청난 명성과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는 것을 말이다.
  • 그녀와 송씨 가문의 수작질을 사실 그는 다 알고 있었음에도 번번이 눈 감아 주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그 이유는… 단지 기꺼이 그러고자 했던 것, 그뿐이었다.
  • 신가윤이 더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차는 이미 천천히 멈춰 서고 있었다.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한 단독 저택의 정원이 있었는데 낯선 듯하면서도 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 전생에서 그녀는 박시완과 결혼한 이후 이곳에서 몇 년간 생활했었다.
  •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이미 시력을 잃은 뒤였기에 비록 익숙한 곳이기는 했지만, 이곳의 풀과 나무들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 정원 안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있던 신가윤은 목이 메어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기억하고 있던 소리와 굉장히 비슷했지만, 또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 전생에 박시완에게 시집온 뒤 그녀를 보살펴주었던 고용인이 그가 이 마당에 치자나무를 한가득 심었다고 말해주었었다.
  • 그래서 바람이 불면 사그락거리는 풀잎 소리와 함께 은은한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 그것이 당시의 그녀에게는 얼마 없는 기쁨 중 하나였다.
  • 신가윤은 이곳이 좋았다. 오늘의 이곳에는 수많은 치자꽃도 없었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 한참을 앞서 걸어가고 있던 박시완은 그녀가 꾸물거리며 따라오고 있지 않자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 셀 수도 없이 많은 별빛들이 내려앉아 있는 정원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바람을 마주한 채 서있는 흰 원피스 차림의 소녀의 예쁜 얼굴에는 생동함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 그 맑고 깨끗한 모습은 마치 인간 세상에 떨어진 요정 같았다.
  • 박시완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천천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 어째서… 그는 이미 몇 번이고 물러섰는데, 그녀는 어째서 또다시 찾아와 자신을 자극하는 것일까.
  •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신가윤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 훤칠한 몸매의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현관 조명 아래 서있었다. 바닥 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그의 그림자는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나날을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 “후회돼?”
  • 박시완이 천천히 입을 열자, 그의 나직한 음성이 밤의 정원에 울려 퍼졌다.
  •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신가윤이 물었다.
  • “뭐?”
  • ‘뭘 후회한다는 거지?’
  • 신가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박시완의 눈빛은 어둡기만 했다.
  • 그는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역시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 “박시완… 인천 프로젝트 말인데, 다시 한번 생각해 봐.”
  • 신가윤은 다소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실에 서있었다.
  • 박시완은 침착한 얼굴로 태연하게 정장 재킷을 벗어 한쪽에 던져놓더니 곧이어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낸 뒤 손목시계까지 벗었다.
  • 그는 그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송씨 가문은… 사실 나한테 잘해주지 않아… 그 사람들을 그냥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당신과의 계약을 성사시켜 이득을 챙기고 싶은 것뿐이야.”
  • 신가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그녀는 그의 의중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 그녀의 말에 박시완의 늘씬한 손가락이 순간 멈칫하는 듯하더니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려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
  • 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를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또 무슨 수작인 거지?”
  • 한기가 감도는 그의 두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신가윤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당신은 사업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 어떤 게 당신한테 가장 이득인지도 잘 알고 있겠지. 송씨 가문은 절대로 좋은 협력 상대가 아니야. 감정적으로 결정하면 그 감정에 말려들게 될 뿐이야.”
  • 신가윤은 침착하려 애썼다.
  • 사실 송씨 가문은 그녀에게 꽤 잘해주었다. 적어도 이미지 메이킹은 꽤 잘 되어있었다.
  • 이에 송씨 집안이 그녀에게 잘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 ‘하지만 박시완은 믿어줄 거야. 그라면 내 말을 믿을 거야. 분명 믿을 거야!’
  • 사실 신가윤도 그렇게까지 확신은 없었다.
  • 이에 그저 앞에 있는 남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박씨 가문에는 수많은 가족구성원이 있었고 박시완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꼼수와 수법들도 분명 일반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 송씨 가문 같은 도움도 안 되는 상대와 사업을 한다는 건 말 그대로 다른 가족들의 손에 직접 빌미를 쥐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신가윤은 또 한 번 마음이 아려왔다.
  • 전생에서 그는 확실히 송씨 가문 때문에 여러 사건에 말려들었었고, 거기에 기자회견장에서 그녀의 증언까지 더해진 상황에서도 그는 오래도록 침묵했었다.
  • 그 이후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박씨 가문의 권력 다툼에서 모든 경쟁자를 꺾고 끝내 승기를 잡았었다.
  •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겪은 그 고난들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박시완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새까만 두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신가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 신가윤은 복잡한 마음을 억누른 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 “당신이 송씨 가문과 협력하지 않기를 원해.”
  • 이에 박시완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 같아?”
  • 순식간에, 그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이에 그녀는 그의 속눈썹 한 가닥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속눈썹까지도 굉장히 예뻤다.
  • “네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고, 신가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얼굴 좀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날 쥐락펴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박시완의 손에 더욱더 힘이 실렸고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 그녀가 그 스위트룸에서 나온 뒤 송준혁을 만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이에 그는 그들이 또 무언가 새로운 계략을 꾸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거 아니야…”
  • 신가윤은 자신이 이미 오래전 그의 신뢰를 잃었음을 알고 있었다.
  • 이에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 어떻게 해야 그가 다시 자신을 믿게 할 수 있을지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 하지만 다음 순간, 박시완이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댄 채 낮고도 매혹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게 아니라면,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