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옷을 돌려주려고요
- 차재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수에게 말했다.
- “약속 잡아줘. 저녁으로. 밥이나 같이 먹지.”
- 차일범은 한 번 깨어났다가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 지금의 상황을 보면 차일범이 다시 깨어나기는 매우 어려워 보였다.
- 그런 차일범의 소원이 차재혁과 한 씨 가문의 큰 아가씨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차재혁은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었다.
- 게다가 차재혁은 6년 전 하룻밤을 보낸 그 여자가 계속 머리에 떠올라 마침 그녀를 찾고 싶기도 했다.
- “저녁 여섯 시 반으로 예약했어요. 약속 장소를 통째로 빌릴까요?”
- 차재혁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 “그럴 거 없어.”
- “네, 대표님.”
- ……
- 편벽한 설화길에 있는 어느 한 평범한 주택.
- 한이서는 한아린의 체온을 재보고 나서 한아린의 열이 완전히 내려간 것 같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린아, 열 다 내렸어! 이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돼!”
- 한이서는 아주 사랑스러운 눈길로 한아린을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6년 전, 한이서는 도희 모녀의 계획으로 순결을 잃고 그 일 때문에 할아버지의 사랑까지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 가는 길에 납치되어 어딘가로 팔려 가는 불행을 겪었다.
- 하지만 팔자는 사나울지언정 목숨은 끈질긴지 한이서는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 그때, 소익현이 한이서를 차로 치기는 했어도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 한이서의 체력이 바닥난 관계로 한이서는 기절하고 말았다.
-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소익현은 책임감을 가지고 한이서와 아이들을 6년 동안 보살폈다.
- 한이서는 인생의 제일 밑바닥에 있을 때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6년 전 그때 한이서는 연달아 매우 불행한 일들을 겪으며 갖은 고생을 했으나 뱃속의 아이는 완강하게 살아남았다.
- 한이서는 작은 생명체의 완강한 생명력에 감화되어 결국 아이를 낳기로 했다.
- 그렇게 10달 후, 한이서는 세쌍둥이를 낳았다.
- 첫째 한지후, 둘째 한시후는 서로 똑 닮은 남자아이였다.
- 그리고 셋째는 유일한 여자아이인데 태어날 때 첫째와 둘째보다 많이 작게 태어났다.
- 겨우 서근으로 태어난 아이는 꼭 마치 원숭이같이 쭈글쭈글하고 아주 작아 한이서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 그리고 셋째 아이는 유독 육아가 더욱 힘들기도 했다. 아주 조금만 바닥에 내려놓아도 셋째는 울어 번지기 일쑤였고 자주 아팠다.
- 그래서 한이서는 맨발 바람으로 병원에 뛰쳐나가는 일이 저번 말고도 여러 번 있었다.
- 매번 한아린이 아플 때마다, 한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는 했다.
- 이번에 고열로 며칠 시달린 한아린의 얼굴은 전보다 홀쭉해졌다.
- ‘가뜩이나 또래보다 작은데... 더 작아진 것 같아.’
- 한이서는 한아린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한아린이 귀엽게 말했다.
- “엄마, 나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쓰고 맛없는 약 안 먹어도 되지?”
- 한이서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그래, 아린이 다 나았으니까 이제 약 안 먹어도 돼. 다음에 또 아프면 안 되니까 사탕이랑 적게 먹어야 해. 알겠지?”
- 한지후와 한시후는 어린이집에 갔고 한아린은 집에 있기에 한이서는 면접하러 갈 수가 없었다.
- ‘이번에 아린이가 아픈 바람에 400만 원도 넘게 썼어. 이제 통장 잔고에 돈도 별로 없고... 어떻게 하나 빨리 일자리 찾아야겠어.’
- 사실 한이서의 통장에는 1억 정도가 되는 돈이 있었지만, 한이서는 돈의 출처를 알지 못했기에 한 푼도 쓰지 않았다.
- 한이서는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몰래 보낸 돈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6년 전의 일로 할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하고 할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한 것 같아 한이서는 그 돈을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집에 돌아가 그를 뵙지도 못했다.
- 씻은 옷을 널려고 베란다로 향한 한이서의 눈에 아주 고급스러운 옷이 보였다.
- 한이서는 남자에게서 빌려 입은 옷을 세탁소에 맡겼다가 오늘 가져온 참이었다.
- ‘그래, 오늘 바로 돌려줘야겠어.’
- 그날 병원에서 차재혁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한이서는 남자가 아주 익숙하나,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경제신문을 보다가 자기에게 옷을 빌려준 남자가 바로 A 시티에서 제일 가문으로 추앙받고 있는 차 씨 가문의 주인, 차재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한이서는 차재혁의 비서 정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상대방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안녕하세요. 한 비서님 전화 맞으세요?”
- 정수가 답했다.
-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 “안녕하세요. 저는 한이서라고 하는데 며칠 전 대표님한테서 옷을 빌렸어요. 그래서 돌려주려고 하는데 오늘 시간이 될까요?”
- 정수는 룸을 힐끗 바라보더니 레스토랑 주소를 그녀에게 알려주며 말했다.
- “이쪽으로 오세요. 대표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식사하고 계세요.”
- 정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한이서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차재혁의 곁에 애매한 관계의 여성은 없기에 어쩌면 전화 온 여성이 차재혁의 친구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 통화를 마친 한이서가 한아린에게 말했다.
- “아린아, 엄마랑 밖에 나갈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며칠 동안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간다고 하니 한아린은 너무 기뻐 방방 뛰며 말했다.
- “좋아요!”
- 한아린은 한이서를 아주 닮았는데 예쁘장한 얼굴에 아주 귀여웠다. 아마 처음 한아린을 보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한아린에게 빠져들 것이다.
- 한아린이 매우 기뻐하자, 한이서도 마음이 흐뭇했다.
- 그녀는 장 아주머니한테 한지후와 한시후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한 뒤, 한아린과 함께 외출했다.
- 한이서는 자기 중고차를 몰고, 한아린을 카시트에 태운 뒤 정수가 보낸 주소로 향했다.
-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한이서는 한아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 “와, 여기 너무 좋아 보여! 엄마, 조금 있다가 오빠랑 장 아주머니 것도 포장해서 가자!”
- 한아린은 또래보다 키도 작고 체중도 적었지만, 먹성만큼은 한지후와 한시후를 능가할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잘 먹는데도 통 키가 크고 체중이 오르지 않아 한이서는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 아린이 메뉴판 보고 있어. 엄마는 옷 돌려주고 올게.”
- 한이서는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앉은 뒤,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옷을 챙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룸으로 다가갔다.
- 그런데 그때, 한이서의 눈에 아주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 ‘한여빈?’
- 6년 만에 보는 한여빈은 변화가 꽤 컸다. 성형을 했는지 예전보다 많이 예뻐졌으나 어딘가 성형미인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 한여빈을 보자, 한이서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분노가 치밀었다.
- ‘한여빈이랑 한여빈 엄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 한여빈이 101번 방으로 들어가자, 한이서도 뒤를 따라가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 “한 비서님이신가요?”
- 조금 전, 한이서가 정수에게 문자로 도착했다고 전하자, 정수는 자기가 101번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었다.
- 한이서를 본 정수의 눈이 일렁였다.
- ‘너무 아름다우신데?’
- 한이서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주 늘씬하고 기품이 넘쳤다.
- 게다가 얼굴은 정교하게 아름답고 몸매 또한 좋아 한눈에 봐도 흔치 않은 미인이었다.
- “네. 한이서 씨 맞으시죠?”
- 한이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정수에게 물었다.
- “그런데 아까 방에 들어가는 저 여자분은... 대표님이랑 어떤 사이인 거예요?”
- 정수는 씩 웃으며 답했다.
- “저분이요? 저분은 저희 대표님 피앙세이십니다.”
- 정수의 말에 한이서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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