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한 씨 가문 큰 아가씨
- 남자는 창문을 반쯤 열고, 웬일인지 눈치를 살폈다.
- 그런데 웬걸, 한아린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남자는 한이서의 아들과 똑같게 생기기는커녕 대머리의 중년 아저씨였다.
- 한아린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 남자가 작게 욕지기를 하자 한이서는 얼른 그에게 사람을 잘못 봤다고 사과했다.
- 그러고는 한아린을 번쩍 들어 품에 안으며 말했다.
- “한아린, 이만하면 됐어. 인제 그만 집에 가자!”
- ……
- 야심한 밤.
- 한이서는 중고로 산 차를 급히 제2병원 입구에 세웠다.
- “이봐요, 여기 주차하시면 안 돼요!”
- 한이서는 경비원의 말에 답할 겨를도 없이 한아린을 안고 응급실 쪽으로 내달렸다.
- 지금 한이서의 귀에는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고 눈에도 한아린 말고는 전혀 보이는 게 없었다.
- 지금 한이서는 오직 딸을 살려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 한이서는 한아린을 안고 응급실에 달려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 “제발 제 딸 좀 살려주세요! 열이 나더니 갑자기 경기하며 기절했어요!”
- 한이서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 의사는 얼른 쇼크로 기절한 한아린을 안고 한이서에게 말했다.
- “저희가 빠르게 살펴볼 테니까 보호자는 밖에 계세요.”
- 의사는 얼른 한아린을 안고 침대에 눕혔다.
- 그러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한이서를 밖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 “먼저 원무과에 가서 진료신청서 작성해 주시겠어요? 상황이 심각하면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수도 있어요.”
- 한이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네, 네. 우리 아린이 잘 좀 부탁드릴게요.”
- ‘우리 아린이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열 때문에 다른 장기나 머리가 영향받는 건 아니겠지? 오늘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열이 나는 거야...’
- 한이서는 울고 싶지 않았으나,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원무과 쪽으로 걸어갔다.
- 그때, 병원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정장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들어왔는데, 제일 중앙에 선 남자가 키도 제일 크고 신수도 제일 훤했으며 남다른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 남자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단추를 끝까지 꼭 잠그고 있어 어딘가 더욱 꼼꼼하고 차가워 보였다.
- 남자가 평범하지 않은 포스를 풍기며 안으로 걸어오자,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 한이서는 골똘히 자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가다 보니 앞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 그러다 갑자기 그녀는 웬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 “아!”
- 한이서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 ‘익숙한 향기야...’
- 남자는 얼른 팔을 뻗어 가느다란 한이서의 허리를 잡았다. 그 덕분에 한이서는 바닥에 볼품없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 “고마워요...”
-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이 마주친 한이서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가뜩이나 겨울이라서 추운데... 저 눈빛 뭐야? 살 얼음장같이 차갑잖아?’
- 차재혁은 얼른 한이서의 허리를 놓아주며 말했다.
- “이봐, 아가씨. 길을 걸을 땐 앞을 잘 보라고.”
- 말을 마친 그는 정장을 입은 사내들과 함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한이서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차재혁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순간, 고개를 돌려 말했다.
- “그쪽도 길을 걸을 땐 앞을 잘 확인하세요.”
- ‘나는 내 길 잘 가고 있었는데 당신이 와서 부딪친 거거든? 자기 쪽에서 난리야...’
- 마침,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남자는 한이서의 말에 문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 자세히 보니 여자는 촌스러운 잠옷 바람에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 ‘아주 초라하기 그지없군.’
-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벌거벗은 여자의 발이 보였다. 발은 얼었는지 빨갛고 여기저기에는 상처도 보였다.
- 그렇게 천천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 차재혁은 시선을 거두고 10층에 있는 VIP 병실로 향했다.
- 6년 전, 차재혁은 웬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었다.
- 그리고 그다음 날 집사로부터 할아버지 차일범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긴박한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병원에 달려가느라 여자와 제정신으로 말도 해보지 못했었다.
- 그 뒤로 차일범은 계속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있었는데 차재혁은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온갖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보고 다녔다.
- 갖은 노력에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차일범은 오늘, 갑자기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깨어났다.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차재혁은 한달음에 병원에 달려왔다.
- 병실 앞에는 흰 가운을 입은 키가 훤칠하고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설우빈, 차재혁의 절친한 친구였다.
- “혁아, 너희 할아버지 깨어나셨어. 지금 너만 찾고 계셔.”
- “고생했다.”
- 차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할아버지한테 가볼게.”
-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갖 장치를 몸에 달고 있는 차일범의 모습이 보였다.
- 그는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차재혁을 보더니 힘겹게 손을 들었다.
- 차재혁은 얼른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할아버지,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 차일범은 차재혁의 손을 잡고 입을 벙긋거렸다.
- ‘나한테 할 말이 있으신가?’
- 차재혁은 얼른 차일범의 입 쪽으로 자기 귀를 가져다 댔다.
- 차일범은 매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겨... 결혼해... 한 씨 가문... 큰 아가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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