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차재혁은 6년 전, 그 여자를 계속 찾고 있었다. 6년 전 그날 아침. 차재혁은 차일범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호텔에서 나오며 곁에서 단잠을 자는 여자를 굳이 깨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사람을 호텔로 보내 그녀를 찾으려고 했을 땐, 여자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6년 동안 차재혁은 수도 없이 그날 밤과 여자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런지 6년이라는 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차재혁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래, 그 여자는 할아버지가 내 곁에 보낸 여자가 맞아.’
“띠띠띠...”
차일범은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다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다. 차일범의 몸에 꽂은 기기에서 귀를 자극하는 경보음이 울려왔다.
“할아버지, 알겠어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한 씨 가문 큰아가씨와 결혼할게요.”
차재혁은 차일범이 자기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안심하기를 바랐다.
경보음을 듣고, 설우빈과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또 한차례의 사투를 거친 후, 차일범은 다시 중환자실에 옮기게 되었다.
같은 시각, 중환자실 병동.
“선생님, 제 딸은 언제면 괜찮아질까요? 제가 곁에 있어도 되나요?”
한이서는 다급히 물었다. 한이서의 눈은 충혈되고 퉁퉁 부었는데 툭 치면 바로 울 것 같았다.
‘아린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 곁을 이렇게 오래 떠나있은 적이 없어. 다 내 탓이야... 내가 아린이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야.’
“하루 정도는 더 관찰해야 하니 보호자는 먼저 집에 돌아가 계세요. 저희가 잘 보살필 테니까 연락드리면 그때 다시 오세요.”
말을 마친 간호사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한이서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간호사가 한이서더러 집에 가 있으라고 했지만, 한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이서는 한아린과 같은 공간에 있고만 싶었다.
삼십 분 뒤.
차재혁이 중환자실 병동에 나타났다.
간호사는 이미 문 앞에서 차재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좀 어떤가요?”
간호사는 환자 차트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답했다.
“어르신은 아직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셨어요. 적어도 24시간은 관찰해야 하니 휴게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원장님께서 따로 휴게실 마련해주셨어요.”
이쪽 간호사들은 차재혁을 잘 알고 있었다. 차재혁은 원장 설우빈의 친구이자, 거의 매일 병원에 자기 할아버지를 보러 찾아오는 아주 효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간호사의 말에 차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휴게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차재혁은 구석 쪽에 쪼그려 앉은 웬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머금은 여자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차재혁의 심장이 움찔했다.
‘어딘가 익숙해... 어디에서 봤지?’
한이서는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은 채 얼굴을 무릎에 깊이 파묻고 있었다.
벌거벗은 발이 그대로 드러나 그런지 한이서는 무척이나 가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차재혁은 홀린 듯이 자기 옷을 벗어 한이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묵직한 무언가가 드리우고 포근한 느낌이 들자, 한이서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펴보았다.
조용한 병동에 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한이서가 외쳤다.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옷은 어디로 갚아야 하죠?”
차재혁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뒤, 문이 닫히기 전에 말했다.
“갚을 거 없어. 그리고 누가 아프든지 자기 자신부터 잘 챙겨야 해.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어떻게 환자를 보살필 수가 있겠어?”
평소 말수가 적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차재혁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한다니, 차재혁 본인 역시 적잖이 놀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차재혁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이서는 옷을 꽁꽁 여미며 생각했다.
‘아직 저분의 체온이 옷에 남아있는 것 같아. 아주 따뜻해...’
옷에 남아있는 남자의 체취를 맡으며 한이서가 생각했다.
‘맑고 시원한 느낌이야. 어디서 분명 맡아본 냄새 같은데...’
그때, 한이서의 사색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장서 걸어오고 있는 남자아이는 검은색 옷을 입고 품에는 하얀색 롱 패딩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남자아이는 회색 야구잠바에 손에는 털신을 들고 있었다.
두 아이는 키즈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생겼는데 서로 똑같게 생겨 누가 봐도 쌍둥이였다.
큰아이 한지후는 한이서 곁으로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옷 입어.”
한지후는 한이서 몸에 걸치고 있는 웬 남자의 옷을 보며 어느 마음씨 따뜻한 분이 자기 엄마를 도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둘째 아이 한시후는 엄마에게 도움지 되지 못한 것 같아 자책했다.
“엄마, 나랑 형도 같이 와야지! 우리도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이야!”
한시우는 차가운 한이서의 발을 자기 몸을 감싸며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리고 그 뒤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회색 외투를 입은 아주 잘생긴 남자, 소익현이었다.
소익현은 보온병에서 더운물을 따라 한이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서야, 아린이가 아프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내가 너랑 아이들 잘 케어하겠다고 했잖아.”
한이서는 소익현이 건넨 더운물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몸도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이서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익현아, 너는 이미 우리 목숨을 구해줬어. 그동안 충분히 잘해주기도 했고.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자꾸 부탁해.”
소익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한이서를 바라보았다.
‘바보... 내 마음도 모르고.’
6년 전, 한이서는 T 국으로 유학하러 가는 길에 도희가 매수한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어딘가로 팔려 갔다. 그리고 도중에 도망치다 그만 소익현의 차에 치이고 말았다.
그때의 소익현은 자기 때문에 다친 한이서에게 죄책감을 가졌기 때문에 한이서를 병원에 데려가고 퇴원한 그녀에게 집도 얻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한이서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소익현은 한이서를 이성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한이서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그녀와 아이를 잘 보살펴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이서를 살뜰히 보살폈다.
하지만 한이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피하기만 했다.
“아린이 괜찮아?”
“응,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도 조금 더 관찰해야 한대.”
소익현은 한이서를 부축해 그녀를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너 회사 그만뒀다며?”
한이서는 인천에 있는 회사에 발령 갔다가 며칠 되지도 않아 사직서를 제출하고 A 시티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그런 회사는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 관뒀어. 순 사기꾼들이잖아. 가뜩이나 없는 사람들 돈이나 사기 치고!”
한이서는 성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안 해!”
그러자 소익현이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서야, 그럼 우리 회사로 와. 나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소익현은 자기 시선이 닿는 곳에 한이서를 두어 그녀를 계속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이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다른 회사 알아보는 중이야. 그리고 내 학력으로 너희 회사에 가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잖아.”
한지후와 한시후는 힘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이들은 주식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그 사실을 한이서에게 알리지 않았다.
만약 한이서에게 자기들이 돈을 벌었다고 이야기한다면 한이서는 아이들이 나쁜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하고 하지 못하게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번 돈을 몰래 한이서의 통장에 계속 보냈지만, 한이서는 그것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신근한 노동력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세 아이를 키웠다.
홀로 애쓰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가슴이 아팠다.
……
며칠 후, 차현 그룹 대표 사무실.
차재혁은 널따란 사무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비서 정수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대표님, 한 씨 가문 큰 아가씨에 대해 알아봤어요. 이름 한여빈, 24세, 한진우 씨 외동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