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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한 씨 가문 큰 아가씨, 한여빈

  • 차재혁은 두 눈을 반짝였다.
  • 사실 차재혁은 6년 전, 그 여자를 계속 찾고 있었다. 6년 전 그날 아침. 차재혁은 차일범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호텔에서 나오며 곁에서 단잠을 자는 여자를 굳이 깨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사람을 호텔로 보내 그녀를 찾으려고 했을 땐, 여자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 6년 동안 차재혁은 수도 없이 그날 밤과 여자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런지 6년이라는 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차재혁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 ‘그래, 그 여자는 할아버지가 내 곁에 보낸 여자가 맞아.’
  • “띠띠띠...”
  • 차일범은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다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다. 차일범의 몸에 꽂은 기기에서 귀를 자극하는 경보음이 울려왔다.
  • “할아버지, 알겠어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한 씨 가문 큰아가씨와 결혼할게요.”
  • 차재혁은 차일범이 자기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안심하기를 바랐다.
  • 경보음을 듣고, 설우빈과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 또 한차례의 사투를 거친 후, 차일범은 다시 중환자실에 옮기게 되었다.
  • 같은 시각, 중환자실 병동.
  • “선생님, 제 딸은 언제면 괜찮아질까요? 제가 곁에 있어도 되나요?”
  • 한이서는 다급히 물었다. 한이서의 눈은 충혈되고 퉁퉁 부었는데 툭 치면 바로 울 것 같았다.
  • ‘아린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 곁을 이렇게 오래 떠나있은 적이 없어. 다 내 탓이야... 내가 아린이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야.’
  • “하루 정도는 더 관찰해야 하니 보호자는 먼저 집에 돌아가 계세요. 저희가 잘 보살필 테니까 연락드리면 그때 다시 오세요.”
  • 말을 마친 간호사는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 한이서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 간호사가 한이서더러 집에 가 있으라고 했지만, 한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이서는 한아린과 같은 공간에 있고만 싶었다.
  • 삼십 분 뒤.
  • 차재혁이 중환자실 병동에 나타났다.
  • 간호사는 이미 문 앞에서 차재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할아버지는 좀 어떤가요?”
  • 간호사는 환자 차트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답했다.
  • “어르신은 아직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셨어요. 적어도 24시간은 관찰해야 하니 휴게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원장님께서 따로 휴게실 마련해주셨어요.”
  • 이쪽 간호사들은 차재혁을 잘 알고 있었다. 차재혁은 원장 설우빈의 친구이자, 거의 매일 병원에 자기 할아버지를 보러 찾아오는 아주 효성스러운 사람이었다.
  • 간호사의 말에 차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게요.”
  • 휴게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차재혁은 구석 쪽에 쪼그려 앉은 웬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커다란 눈에 눈물을 머금은 여자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차재혁의 심장이 움찔했다.
  • ‘어딘가 익숙해... 어디에서 봤지?’
  • 한이서는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은 채 얼굴을 무릎에 깊이 파묻고 있었다.
  • 벌거벗은 발이 그대로 드러나 그런지 한이서는 무척이나 가여워 보였다.
  • 그 모습을 본, 차재혁은 홀린 듯이 자기 옷을 벗어 한이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어깨에 묵직한 무언가가 드리우고 포근한 느낌이 들자, 한이서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펴보았다.
  • 조용한 병동에 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한이서가 외쳤다.
  •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옷은 어디로 갚아야 하죠?”
  • 차재혁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뒤, 문이 닫히기 전에 말했다.
  • “갚을 거 없어. 그리고 누가 아프든지 자기 자신부터 잘 챙겨야 해.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어떻게 환자를 보살필 수가 있겠어?”
  • 평소 말수가 적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차재혁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한다니, 차재혁 본인 역시 적잖이 놀랐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차재혁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한이서는 옷을 꽁꽁 여미며 생각했다.
  • ‘아직 저분의 체온이 옷에 남아있는 것 같아. 아주 따뜻해...’
  • 옷에 남아있는 남자의 체취를 맡으며 한이서가 생각했다.
  • ‘맑고 시원한 느낌이야. 어디서 분명 맡아본 냄새 같은데...’
  • 그때, 한이서의 사색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엄마!”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앞장서 걸어오고 있는 남자아이는 검은색 옷을 입고 품에는 하얀색 롱 패딩을 안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남자아이는 회색 야구잠바에 손에는 털신을 들고 있었다.
  • 두 아이는 키즈 모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생겼는데 서로 똑같게 생겨 누가 봐도 쌍둥이였다.
  • 큰아이 한지후는 한이서 곁으로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엄마, 옷 입어.”
  • 한지후는 한이서 몸에 걸치고 있는 웬 남자의 옷을 보며 어느 마음씨 따뜻한 분이 자기 엄마를 도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 둘째 아이 한시후는 엄마에게 도움지 되지 못한 것 같아 자책했다.
  • “엄마, 나랑 형도 같이 와야지! 우리도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이야!”
  • 한시우는 차가운 한이서의 발을 자기 몸을 감싸며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 그리고 그 뒤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회색 외투를 입은 아주 잘생긴 남자, 소익현이었다.
  • 소익현은 보온병에서 더운물을 따라 한이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 “이서야, 아린이가 아프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내가 너랑 아이들 잘 케어하겠다고 했잖아.”
  • 한이서는 소익현이 건넨 더운물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몸도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 한이서는 씩 웃으며 말했다.
  • “익현아, 너는 이미 우리 목숨을 구해줬어. 그동안 충분히 잘해주기도 했고.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자꾸 부탁해.”
  • 소익현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한이서를 바라보았다.
  • ‘바보... 내 마음도 모르고.’
  • 6년 전, 한이서는 T 국으로 유학하러 가는 길에 도희가 매수한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어딘가로 팔려 갔다. 그리고 도중에 도망치다 그만 소익현의 차에 치이고 말았다.
  • 그때의 소익현은 자기 때문에 다친 한이서에게 죄책감을 가졌기 때문에 한이서를 병원에 데려가고 퇴원한 그녀에게 집도 얻어주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한이서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 소익현은 한이서를 이성으로 좋아했다.
  • 그래서 그는 한이서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그녀와 아이를 잘 보살펴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이서를 살뜰히 보살폈다.
  • 하지만 한이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피하기만 했다.
  • “아린이 괜찮아?”
  • “응,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도 조금 더 관찰해야 한대.”
  • 소익현은 한이서를 부축해 그녀를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 “너 회사 그만뒀다며?”
  • 한이서는 인천에 있는 회사에 발령 갔다가 며칠 되지도 않아 사직서를 제출하고 A 시티로 다시 돌아왔다.
  • “그래, 그런 회사는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 관뒀어. 순 사기꾼들이잖아. 가뜩이나 없는 사람들 돈이나 사기 치고!”
  • 한이서는 성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나는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안 해!”
  • 그러자 소익현이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이서야, 그럼 우리 회사로 와. 나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소익현은 자기 시선이 닿는 곳에 한이서를 두어 그녀를 계속 보호하고 싶었다.
  • 하지만 한이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지금 다른 회사 알아보는 중이야. 그리고 내 학력으로 너희 회사에 가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잖아.”
  • 한지후와 한시후는 힘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사실 아이들은 주식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그 사실을 한이서에게 알리지 않았다.
  • 만약 한이서에게 자기들이 돈을 벌었다고 이야기한다면 한이서는 아이들이 나쁜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하고 하지 못하게 할 게 뻔했다.
  •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번 돈을 몰래 한이서의 통장에 계속 보냈지만, 한이서는 그것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신근한 노동력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세 아이를 키웠다.
  • 홀로 애쓰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가슴이 아팠다.
  • ……
  • 며칠 후, 차현 그룹 대표 사무실.
  • 차재혁은 널따란 사무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 그때, 그의 비서 정수가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 “대표님, 한 씨 가문 큰 아가씨에 대해 알아봤어요. 이름 한여빈, 24세, 한진우 씨 외동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