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서는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이 뜨겁고 괴로워 이리저리 뒹굴었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었으며 호흡도 점점 가빠졌다.
한이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고는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몸은 점점 더 괴로워져만 갔다. 심장박동이 빨라 오고 몸에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는데 그 느낌이 소름 돋게 싫어 한이서는 옷을 한 겹 두 겹 벗기 시작했다.
얼마나 간절하게 그 느낌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옷을 벗는 한이서의 행동은 꽤 거칠었다. 한이서는 단추가 떨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옷을 벗었다. 속옷 빼고 다 벗고 나니 차가운 공기가 살에 닿으며 그제야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피부 겉면의 온도는 조금 내려갔으나 속은 여전히 괴로웠다. 한이서는 이불에 자기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처음 느껴보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하... 이상한 기분이야... 이러다 내 몸이 바싹 마르고 말겠어.’
한이서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물을 찾기 시작했다.
‘물... 물이 필요해... 지금 당장 물부터 마셔야겠어.’
한이서는 속옷만 입은 상태로 침대에서 내려와 물이 있는 탁자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병째로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을 적셨다.
은은한 불빛 아래,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웬 남자가 하반신에만 수건을 두른 채 나왔다. 금방 샤워를 마친 남자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은 남자의 단단한 가슴과 굴곡이 선명한 복근에 떨어지기도 했다.
한이서를 본 남자는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그 역시 몸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해. 설마 아까 마신 술에 누가 약을?’
남자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술잔을 힐끗 바라보더니 한이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우리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지?”
남자는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여자를 보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증손주... 증손주... 그놈의 증손주가 보고 싶다고 내게 약까지 타다니...’
한편, 남자가 팔을 힘 있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한이서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그만 남자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수건은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금방 샤워를 마친 터라 남자의 몸은 차가웠는데 한이서는 그 품에 안기자 아주 편안하고 무언가 진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이서는 두 눈을 감고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그에게 바짝 더 붙었다.
차재혁은 가뜩이나 속에서 열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여자가 자기에게 달라붙자, 욕망이 마구 들끓기 시작했다.
한이서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고는 몸을 이리저리 비볐다. 한이서가 몸을 비빌수록 차재혁은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어졌다. 차재혁은 한이서의 입술에 키스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입술끼리 부딪치다가 키스는 점점 격렬해졌다. 차재혁은 한이서의 숨결을 느끼며 더욱 깊숙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침대로 향했고 서로를 뜨겁게 원했다.
“아파요...”
한이서는 작게 신음하며 차재혁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차재혁은 그저 오로지 그녀의 몸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을까,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먼저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건 한이서였다.
다음 날 아침.
한이서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머리가 하얗게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뭐야? 여긴 어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때, 문이 열리고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경찰들도 있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당신을 성매매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두 손 머리 위로 들고 바닥에 쪼그려 앉으세요.”
한이서는 성매매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가면서도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뒤로 경찰은 한 씨 가문에 연락했고 한이서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씨 가문에 돌아오니 더욱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가족들 모두가 한이서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보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대수의 안색이 몹시 안 좋았다.
그는 자기가 평소에 제일 아끼던 손녀딸이 그런 낯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상심했다.
“할아버지...”
한이서는 한대수 앞에 무릎 꿇고 자기 입장을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한이서는 아직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때, 한이서의 계모 도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경찰한테 현장을 잡히고서도 아직 할 말이 남은 거야? 아직도 변명하려고 그래? 경찰이 집에 전화 오지 않았더라면 한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그렇게 황당무계한 일을 벌인 줄 누가 알았겠어? 경찰 말도 처음에는 의심했다니까! 참나! 가문에 먹칠을 하려고 아주 작정했구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한여빈이 얼른 맞장구쳤다.
“언니 정말 역겹다. 아무하고 막 그렇게 자고 다니는 거야? 그러다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한여빈의 말에 한대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다들 그만해! 이서, 너 내일 당장 T 국에 유학 가. 그리고 내 동의가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마.”
말을 마친 한대수는 한이서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지 않은 듯 바로 자리를 떴다.
“할아버지!”
한이서는 한대수를 애타게 불렀으나 한대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한편, 가문에 먹칠한 한이서를 유학 보내려는 한대수의 결정에 도희는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내가 왜 이 모든 걸 계획했는데? 한이서를 집안에서 내쫓아버리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쫓아내기는커녕 유학을 보내?’
도희는 자기 딸 한여빈이 한 씨 가문 큰아가씨의 자리에 당당히 오르길 바랐다. 그런데 그러려면 한이서가 없어져야만 했다.
도희의 눈에는 섬광이 번뜩였다.
‘흥. 유학이라고? 꿈 깨! T 국으로 가는 길에 비명횡사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
6년 후, A 시티 공항.
한이서는 캐리어를 이끌고 공항에서 걸어 나왔는데 그 곁으로 올망졸망 예쁘게 생긴 아이 세 명이 졸래졸래 따라왔다.
어린이 모델 뺨칠 정도로 귀여운 아이들이 세 명씩이나 있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꾸만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세 아이 중 두 남자아이는 거의 똑같게 생겼는데 만화 속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될 만큼 정교하게 잘 생겼다.
그리고 셋 중 유일한 여자아이는 양 갈래머리에 노란색 치마를 입고 있어 그런지 병아리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여자아이는 손에 인형을 쥐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 가던 행인 중 어떤 사람들은 세 아이를 카메라로 몰래 찍으며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연예인 아니야? 외모만 보면 연예인인데?”
“저렇게 사랑스러운 가족이라니! 현실감 없게 잘 생기고 예쁘잖아?”
“오~ 엄마도 아주 미인이네!”
그때, 곁에 있는 VIP 출구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일렬로 쭉 줄지어 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색 바람막이를 입은 연예인급 미모의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신수가 훤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그에게로 옮겨졌다.
한이서 곁에 서 있는 꼬마 여자아이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를 보는 순간, 여자아이는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아빠!”
여자아이가 보기에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남자는 자기 두 오빠와 똑 닮았다.
‘오빠들이랑 똑같게 생겼어! 그러니까 저 사람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의 아빠일 거야!’
여자아이는 아빠라고 부르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갔다.
옆에서 잘 따라오던 딸이 다른 길로 새자, 한이서는 급히 딸을 쫓아가며 두 아들에게 말했다.
“지후, 시후. 너희들은 문 앞에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아린이 금방 찾아서 데려올게.”
남자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 엄마!”
한이서는 한아린이 달려간 쪽으로 부지런히 쫓아갔다.
그리고 바로 멀지 않은 곳에서 한아린을 붙잡고는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한아린, 너 어디 가려고 그래? 엄마랑 오빠도 없이 혼자 달려가다 나쁜 사람한테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래?”
한아린은 활동적이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은 아이였다. 한이서는 세 아이 중 단 한 명이라도 없어진다면 자기 삶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엄마! 이거 놔! 나 아빠 봤단 말이야. 아빠는 오빠들이랑 아주 똑같게 생겼어! 나 아빠 찾아야 해!”
한아린은 자꾸만 한이서의 손을 뿌리치며 멀리 사라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대로 사라지면 안 돼!’
한아린의 말을 들은 한이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정말 그때 그 남자?’
사실 한이서는 그때 호텔에서 만나 첫날밤을 보낸 의문의 남자를 만나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게다가 한아린에게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고집 센 한아린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