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역광을 등에 지고 키 큰 실루엣이 병실로 들어왔다. 온몸에 차갑고 단단한 기운을 두른 남자. 공기가 순간, 뚝 하고 무거워졌다.
- 박도훈이었다. 가족 모임 때마다 늘 무심한 눈길로 김지수를 한번 훑고 지나가던 그 남자.
- “지수 누나! 깨어나서 진짜 다행이다. 우리 형, 거의 미쳐가고 있었거든.” 박태민의 목소리는 가짜로 부드러웠다. 예전처럼 친하게 부르던 호칭도 일부러 피했다.
- 바로 그다음, 첼로처럼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 박태민에게 했던 냉담함은 싹 지우고,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친 음색이었다. “지수야, 깼어?”
- 김지수는 박도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정돈된 검은 머리, 칼처럼 날카로운 짙은 눈매. 턱에 난 가느다란 흉터가 거친 분위기를 더했다. 겉보기엔 절제된 듯하지만 값비싸 보이는 진회색 수트. 뿜어내는 압박감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 예전의 그녀는 이 위압적인 박가 장남 앞에서는 언제나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상상도 못 했지.
- “지수 누나, 혹시 사람을 못 알아보겠어? 괜찮아, 내가 천천히 설명할게.” 두 사람 사이의 얼어붙은 공기를 눈치 챈 박태민이 급히 끼어들었다. “이 분은 우리 형, ‘박도훈’. 그리고… 네 남자친구.”
- 그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문쪽을 가리켰다. 목소리에는 달달함을 억지로 발랐다. “그리고 여기는 ‘강세리’. 내 여자친구이자, 네가 가장 친한 절친.”
- 손끝이 저절로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김지수는 손바닥에 손톱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 콕콕 쑤시는 고통이라도 있어야 정신이 퍼덕 깨어 있으니까. 당장 이 개같은 두 사람의 가면을 찢어발기지 않으려면.
- 박태민이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한층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태민. 도훈 형 동생, 그리고 네가 평소에 아주 잘 아는 사람.”
- 김지수는 그를 무시하고, 혼란으로 가득한 눈길을 박도훈에게로 돌렸다. 목소리는 약하고, 확신이 없어 떨렸다. “당신… 진짜 내 남자친구 맞아요?”
- “자기야.” 박도훈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 매끈한 손가락이 그녀의 볼을 스치고,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확신에 찬 어조였다. “너, 교통사고를 당했어. 그래서 기억이 일부 사라졌지.”
- 손끝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사람을 홀릴 만큼 낮고 깊었다.
- 김지수의 심장이 이유 없이 턱 하고 한 박자 놓쳤다. 이 남자, 연기 너무 리얼한 거 아니야?
- “의사 말로는 아마 일시적일 거래. 천천히 돌아올 거라고.” 박태민이 서둘러 붙여 말했다. 재촉이 섞인 어투였다. “도훈 형, 너무 걱정하지 마. 지수 누나는 분명 괜찮아질 거야.”
- 박도훈이 곁에 있던 보호자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안정적으로 앉았다. 기세는 더 눌러왔다.
- 둘은 말없이 눈을 맞췄다. 그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얼굴이 화끈 저릿해져서, 김지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피하고 싶어졌다.
-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떠보는 기색이 엿보였다.
- 김지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눈가에 엷은 물기가 번지고, 잃어버린 사람처럼 연약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정말 사귀는 사이예요?”
- 박도훈이 불쑥 앞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눈앞에서 설송과 단목이 섞인 듯한 서늘한 향이 훅 끼쳤다.
- “그래.” 속삭이듯 낮고 깊은 목소리. “지수야, 우리 벌써 5년을 만났어. 우리 사이… 이미 아주 깊지.”
- 김지수는 허겁지겁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규칙을 잃고 뛰었다. 더는 그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 다음 순간, 그의 큰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게, 강하게.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 거칠고 소유욕이 잔뜩 실린 키스였다. 이빨이 아랫입술을 긁어 터뜨렸고, 입안은 금세 그 남자 특유의 맑고 차가운 향으로 가득 찼다. 낯선데, 위험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 김지수는 흠칫 숨을 들이켰고, 손은 무의식중에 그의 수트 앞섶을 꽉 움켜쥐었다.
- “도훈 형!” 박태민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음까지 뒤집혔다. “우리 약속했잖아, 그냥…”
- 박도훈은 천천히 김지수에게서 입술을 뗐다. 피가 배어나온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살짝 훑었다. 박태민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태민아, 기억해. 지금 그녀는 내 연인이야.”
- 이 키스는 박태민의 형식적인 입만 닿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박도훈의 키스는 통제욕에 물든 장악이었다. 거부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
- 두 사람의 기 싸움이 팽팽해지는 찰나, 강세리가 의사를 데리고 문을 밀고 들어와 버렸다. 딱 굳어진 분위기가 갈라졌다.
- “김지수 님은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큰 문제 없습니다. 이후엔 집에서 충분히 휴식하세요. 익숙한 환경이 기억 회복에 더 도움 됩니다.”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 의사가 나가자, 박도훈의 시선이 다시 김지수에게 고정됐다. 그녀가 읽어내지 못할 어떤 불꽃이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올랐다.
- “태민아, 방금 의사도 말했지? 익숙한 환경이 좋다고.” 그는 박태민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어조에는 거절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 집이, 지수에게 가장 잘 맞아.”
- 박태민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었다. 파리라도 삼킨 듯 표정이 영 불편했다. 그래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이 맞춰둔 각본대로라면, 지금 박도훈은 김지수의 공식 남자친구. 이 상황에서 그가 돌보는 게 명분상 맞으니까.
- “지수야, 일단 푹 쉬어.” 박도훈이 다시 몸을 기울였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불을 스쳤다. “난 퇴원 수속하고 올게. 내일 우리 집으로 가자.”
- “네.” 김지수는 나직이 대답했다. 눈동자엔 여전히 멍한 당혹만 그득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 연기는 완벽했다.
- 마음속 결심은 이미 섰다.
- 그래, 연극하고 싶다 이거지?
- 좋아, 끝까지 놀아주지 뭐.
- 적어도, 내 자산이 어디로 빠졌는지 낱낱이 파헤칠 때까지.
- 그녀는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세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병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 문밖이 잠잠해진 걸 확인하자, 김지수는 눈을 번쩍 떴다. 눈속의 멍함은 싹 사라지고, 차가운 증오만 서늘하게 떠올랐다.
-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푸는 순간, 은행 미확인 문자들이 주르르 쏟아졌다.
- 그녀의 피가 순간 얼어붙었다.
- 개인 계좌 몇 개가 이미 싹 비워져 있었다. 마지막 고액 이체는 사고 다음 날이었다.
- 떨리는 손끝으로 은행 앱을 열었다. 부모님이 남겨준 100억 원 신탁기금. 사고 전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지금 잔액란엔 눈을 콕 찌르는 ‘0’ 하나만 덜렁 떠 있었다.
- 목이 꽉 조여왔다. 급히 이메일함을 열고, 강세리 로펌에서 온 첨부파일을 눌렀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김지수 님의 정신적 상태가 불안정한 점을 고려하여 자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명의자 전 재산을 임시 동결하며, 박태민 씨에게 전권 관리·처분을 위임한다…]
- “아 씨발!” 김지수는 이를 갈며 낮게 내뱉었다. 소리는 낮았지만, 독기가 서려 있었다.
- 메일함에 ‘긴급’ 표시가 선명한 미확인 메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발송일 역시 사고 다음 날. 발신인은 라제리 스튜디오의 어시스턴트, 한소정. 제목은 빡빡하게 날카로웠다. “지수 대표님, 금고 비밀번호가 바뀌었어요!”
- 메일을 열었다.
- [지수 대표님, 얼른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큰일입니다! 오늘 아침 박태민 씨와 강세리 변호사, 그리고 로펌 직원들이 스튜디오에 왔습니다. 대표님 서명이 들어간 위임장을 들고요.
- 강 변호사 말로는, 이건 사고 전에 대표님이 직접 결정한 거라고 했습니다—결혼식 준비에만 집중하려고요. 완벽한 신부가 되기 위해 스튜디오의 모든 사무를 잠시 내려놓고,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본인을 브랜드 관리책임자로 전권 위임하셨다고요.
- 그 자리에서 대표님의 개인 금고 비밀번호를 바꿔버렸고, 디자인 원본, 핵심 고객 리스트와 공급업체 계약서… 심지어 예비 도장까지 전부 가져갔습니다!
- 제발 빨리 돌아와 주세요. 이대로면 우리 스튜디오 정말 버티지 못합니다!]
- 메일은 거기서 툭 끊겼다.
- 김지수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입안에 짭짤한 피맛이 퍼질 때까지.
- 강세리는 그녀의 상속 변호사였다. 그녀의 모든 위임장을 쥐고 있었다. 그건 사고 전에, 달콤한 말로 그녀를 구슬려 사인받은 서류들이었다.
- 그때의 김지수는, 이 여자를 평생 가장 믿는 절친이라 여겼다. 바보같이.
- 바로 그때, 예약 발송된 메일이 자동으로 뜨며 영상 파일 하나가 첨부되었다. 부모가 그녀에게 남겨준 빈티지 티뷰론 스포츠카. 그 차의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 영상 날짜는 사고 당일. 시간은
- 오후 3시 17분.
- 그리고 그녀의 사고는, 3시 26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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