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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모함

  • 5년 후.
  • 드넓은 푸른 바다 위, 한 척의 럭셔리한 크루즈의 휴게실.
  • 온시윤은 짙은 갈색의 바이올린을 안고 조용히 음을 조율하고 있었다.
  • 그녀의 옆에는 악단의 다른 멤버들이 자리했다.
  • 다들 이 크루즈의 주인인 반 가의 꼬마 도련님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 소문에 따르면 꼬마 도련님은 네 살이 조금 넘었는데 몸값이 수 조원에 이른다고 했다. 반 가 어르신은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통 크게 이 크루즈를 사서 생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 “어휴, 왜 반 가에서 우리 악단을 지명해 꼬마 황태자님의 생일 축하 공연을 하도록 한 걸까? 우리보다 유명한 악단이 쌔고 빠졌는데.”
  • “누가 알겠어. 반 가의 꼬마 황태자님이 직접 우리 악단을 지명했다고 듣긴 했는데!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럭셔리한 크루즈에 타서 공연도 하잖아. 게다가 출장비가 몇 배를 뛴 건지 몰라!”
  • 그 얘기가 나오자 악단의 멤버들은 모두들 부럽다는 듯 혀를 찼다.
  • “우리가 그 반 가의 꼬마 황태자님 집안의 10분의 1만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렇게 생계 때문에 뺑이 칠 일도 없을 텐데.”
  • “환생을 잘 한 거지. 우리는 질투하고 부러워할 수밖에 없어!”
  • 그 말을 들은 온시윤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종착지에 서 있다. 그 반 가의 꼬마 도련님처럼.
  • 그녀는 달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배은망덕한 개자식이었고 사업이 가장 성공했을 때 그와 함께 고생했던 어머니를 버렸다.
  •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녀와 남동생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 동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직접 자신의 혈육을 ‘팔았다’. 심지어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녀의 아이도 올해 네 살이 되었을 것이다. 반 가의 꼬마 황태자님과 나이가 같았다.
  • 그녀의 아이는 멋진 남자아이인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 눈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 “온시윤, 네가 왜 여기 있어?”
  • 갑자기 날카롭고 까칠한 목소리가 온시윤을 상념에서 벗어나게 했다.
  • 온시윤은 눈물을 참아내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평생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 온서아였다!
  • 그녀는 정교하고 럭셔리한 드레스를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는데 턱을 쳐들고 고고한 표정으로 온시윤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6년 전과 똑같았다.
  • 온시윤은 혐오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그녀를 만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하, 정말 너구나!”
  • 휴게실에 있는 여자가 온시윤인 것을 확인한 온서아는 하이힐을 밟고 도도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섰다.
  • “네가 살아있을 줄 몰랐는데. 너랑 네 그 병신 같은 남동생이 진작에 죽어버린 줄 알았지 뭐야!”
  • 남동생…
  • 만약 그때 그들 모녀가 모진 마음으로 남동생의 치료비를 끊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사람에게 아이를 낳아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이별의 아픔을 견디지도 않았을 것이다!
  • 모든 비극은 그들 모녀에서 비롯되었다!
  • 온시윤은 증오가 서린 눈빛으로 비아냥거렸다.
  • “너랑 그 비열한 네 엄마도 아직 안 죽었는데 우리도 당연히 잘 살아있어야지. 다른 사람 피 빨아먹은 악독한 여자가 언제 벼락을 맞아서 비참한 말로를 맞을지 두 눈 뜨고 똑똑히 봐야 하니까!”
  • “너!”
  • 고분고분하던 온시윤이 말대꾸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온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못 본 사이에 입이 독해졌네.”
  • “그럭저럭. 너희 모녀처럼은 독하지 못해.”
  • 온시윤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무사히 공연을 하는 것이다. 온시윤은 공연 전에 뜻밖의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 그녀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을 상대하기가 귀찮아 조용한 곳을 찾아 연습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 담담한 그녀의 모습이 더욱 온서아의 눈에 거슬렸다.
  • 그때 그녀가 어머니와 손을 잡고 갖은 방법으로 그들 남매를 온 가에서 내쫓고 나서 자신이 제일 큰 위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지금 온시윤의 앞에 서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작아진 기분이었다.
  • 온시윤은 얼굴도 예쁘고 분위기도 좋아서 그녀는 완전히 발리고 있었다!
  • 그녀의 눈 밑에 질투가 스쳤다.
  • 상갓집 개는 개처럼 살아야지 왜 재벌들이 모이는 연회장에 화려하게 나타난 거야!
  • 그녀의 시선이 값비싼 온시윤의 바이올린으로 향했다. 온서아의 눈 밑으로 악독함이 스치더니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몰래 다리를 뻗었다.
  • “아!”
  • 다리에 걸린 온시윤의 몸이 손쓸 새 없이 앞으로 쏠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 이내 바이올린도 바닥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 ‘팅팅’, 바이올린 현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끊어졌다.
  • 휴게실에 들어선 악단 매니저 이동준은 그 광경을 보고 순간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온시윤! 네가 바이올린을 망가뜨린 거야! 이건 반 가의 사모님이 잠시 우리 악단에 빌려주신 거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우리 악단을 팔아도 물어줄 수가 없어!”
  • 온시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 “아니, 제가 아니라…”
  •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이 사단을 만든 온서아를 노려보았다.
  • “얘가, 얘가 일부러 넘어뜨린 거예요!”
  • “내가 언제. 남을 함부로 모함하지 마!”
  • 온서아는 억울한 듯 손을 내저었다.
  • “네가 넘어진 걸 나한테 덮어씌울 생각하지 마!”
  • “지금 빨리 반 가 사모님께 사죄하고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비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스스로 악단을 그만둬. 악단에까지 누를 끼치지 말고.”
  • 온서아는 팔짱을 낀 채 깨고소해 하며 말했다.
  • “맞아, 맞아. 얼른 나랑 반 가 사모님께 사죄하러 가자!”
  • 이동준은 온시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 “그리고, 무대에 오를 필요 없어. 우리 악단에는 너처럼 경솔한 단원은 필요 없거든. 오늘 공연이 끝나면 악단을 떠나!”
  • 악단을 떠나라고?
  • 온시윤은 그대로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해졌다.
  • 안 돼! 이 일자리를 잃으면 그녀는 남동생을 책임질 수입이 없었다. 그녀는 악단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단장님,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 온시윤이 간절히 변명하려던 그때, 시크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목소리가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 “왜 그분이 사과하러 가야 해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이 여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