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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아

  • 이빈은 옥에 닿기만 해도 벌겋게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는 멀쩡한 모습이었으니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빈을 모함하기 위한 덫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이빈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그나저나 저야말로 아주머니한테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유나 씨한테 갑자기 4천만을 입금한 이유가 뭐예요?”
  • 그 말에 유나와 이 여사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이빈은 별다른 설명 없이 휴대전화 액정을 두 사람을 향해 내밀었다. 액정에는 이 여사가 유나에게 입금한 내역서가 찍힌 사진이 담겨 있었다.
  • “방금 물어봤는데 고용인들 한 달 월급이 600만밖에 안 된다던데요? 그런데 왜 4천만이나 입금하셨을까요?”
  • 한낱 고용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모함할 리 없었다. 누군가한테 매수되지 않는 이상.
  • 유나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녀의 명의로 된 계좌 내역서를 조사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범인의 정체는 다소 싱겁게 밝혀졌다.
  • 처음부터 이 여사의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 내역서를 훑어보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달은 듯했다.
  •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혹을 품고 있는 사람은 오직 온서준뿐이었다. 이빈이 무슨 수로 이체 내역을 찾아낸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 “그게… 유나 모친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월급을 가불해 준 거야.”
  • 이 여사가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 상황이 그녀의 예상 범주에서 훨씬 벗어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빈을 온 가에서 내보내려는 일념 하나로 벌인 일인데 오산이었다.
  • 이빈이 옥 알레르기가 있을 줄이야.
  • 온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 “유나 처음 면접 볼 때 고아하고 했잖아. 그 자리에 나도 있었어. 빈아, 이 일은 아저씨가 꼭 해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온서준을 바라보았다.
  • “서준아, 빈이 손목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으니까 네가 같이 병원에 다녀와.”
  •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빈은 이내 온서준을 따라 온 가를 나섰다.
  •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온서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해.”
  • 이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온서준이 이서원을 대신해 그녀에게 사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괜찮아.”
  • 그러고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기대했을 텐데 실망했겠어. 아주머니 계획이 성공하셨다면 당당하게 날 온 가에서 내보낼 수 있었는데. 참, 결과가 나오기 전에 내가 훔친 거라고 의심했어?”
  • “아니, 넌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진 않아.”
  • 그 말에 이빈의 입꼬리가 유려하게 말려 올라갔다.
  • “맞아. 온 씨 가문 사모님이 되면 그런 보석쯤은 널리고 널렸을 텐데 내가 뭐 하러.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 “…”
  • 병원에 도착하여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손목을 보이자 의사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 “옥 알레르기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착용하셨어요? 남자친구분도 그렇고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거 아니에요? 심각한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앞으로는 꼭 주의하세요. 처방한 약을 며칠 바르다 보면 부기가 빠질 거예요.”
  • 이빈이 무어라 변명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두 사람은 진단서를 받아들고서 약을 수령하기 위해 약국으로 향했다.
  • 이빈이 약국 앞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대신 약을 받으러 갔던 온서준이 돌아왔다.
  • “손 줘.”
  • 그 말에 이빈이 순순히 손목을 내밀자 온서준이 약 포장지를 뜯어 그녀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 “아파?”
  • 차갑고 따끔따끔한 고통스러운 감각이 뇌리에도 전해졌지만 이빈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상하네. 나 그쪽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
  • 이빈의 짓궂은 목소리에 온서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말했잖아. 난 널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 “쳇, 재미없어.”
  • 그렇게 말하며 이빈이 싱긋 웃었다. 방금 전 얘기는 당연히 농담이었다. 아직 온 씨 가문 다섯 형제를 향한 그녀의 저울질은 끝나지 않았다…
  •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서준의 마음속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