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극적인 장면

•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온서준이었다.
• 퇴근 후 친구와 만나기 위해 가까운 술집을 찾은 것인데 자리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웬 낯선 사내와 함께 들어오는 이빈을 발견했다.
• 온서준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
• 그때, 옆에 앉은 친구가 한 방향에만 고정된 온서준의 시선을 눈치채고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온서준의 시선 끝에는 검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목뒤에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웨이브 진 머리칼이 어스름한 조명과 어우러져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 남경우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 “어라? 드디어 소철에도 꽃이 피려나? 우리 서준 도련님, 저 여자가 마음에 들어? 생긴 건 예쁘네. 내가 가서 연락처 따줄까? 잠깐… 저기 옆에 있는 남자 허민우 아냐?”
• 그 말에 온서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허민우?”
• 그러자 남경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있잖아. 그 베일에 싸여있는 LY의 부사장.”
• LY가 베일에 싸여있다고 하는 이유는 실력 있는 상장회사이지만 회사 대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LY 대표 대신 공식적인 업무는 전부 허민우가 도맡았다.
• “걱정하지 마, 서준 형. 허민우보다 형이 훨씬 멋있으니까 저 아리따운 여성분을 꼬셔낼 수 있을 거야.”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 온서준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 다시 아래층으로 향하는 온서준의 눈동자에 탐색하는 빛이 서렸다. 강성 시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빈이 어떻게 허민우와 아는 사이인지 의아했다.
• “진심이야, 서준 형. 허민우 저 자식 겉은 멀쩡해도 소문난 바람둥이야. 옆에 있는 여자만 불쌍하게 됐지…”
• “…”
• 온서준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들고서 한 모금 들이켰다.
• 그때, 허민우가 바를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 사내들의 시선이 이빈에게 쏠렸다.
• 곧이어 웬 사내가 음흉하게 눈을 번뜩이며 술잔을 손에 든 채 이빈에게 다가갔다.
• “혼자 온 거 같은데 나랑 친구할래?”
• “친구 많아요.”
• 그 말에 사내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지더니 이내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오늘 나랑 친구해 주면 술값 계산해 줄게. 어때?”
• “필요 없습니다.”
• 이빈의 담담한 기색을 보며 사내는 술이 올랐는지 돌연 험악하게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내숭 떨지 마. 그렇게 꼴리게 입고 술집을 찾은 건 돈 많은 남자를 낚으려는 거 아냐? 이 오빠 돈 많으니까 말만 해. 얼마면 돼?”
• 같은 시각, 위층 라운지에서 온서준이 이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서 남경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젠장, 서준 형, 얼른 가서 구해줘야 되는 거 아냐?”
• 그 말에 온서준이 설핏 미간을 구기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빈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뒤따라올 온 회장의 분노가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 온서준과 남경우가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극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 사내가 음흉하게 웃으며 이빈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웬 술병 하나가 사내의 머리 위에 날아와 꽂혔다.
• 2 층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지만 온서준은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이빈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똑똑히 보였다.
• “돈은 됐으니까 네 목숨이나 내 놔.”
• 그야말로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그때, 화장실로 갔던 허민우가 돌아왔다.
• 음흉한 사내는 허민우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허겁지겁 줄행랑을 놓았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이빈의 얘기가 농담이 아닌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해진 이유도 있었다.
• 덕택에 기분이 확 잡쳐버린 이빈은 허민우와 작별을 고하고서 술집을 나섰다.
• 휴대전화 앱으로 콜택시를 부르고서 길가에 멍하니 앉아 기다리던 이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빠, 거기서 잘 지내요?
• 그때, 검은색 차량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 이빈은 당연히 예약한 택시가 도착한 것이라 생각하고 들고 있던 단배를 비벼 끄고서 휴지통에 버린 뒤 차 문을 열었다.
• 하지만 뒷좌석에 앉아있는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를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 카풀한 적 없는데?
•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그쪽이 여긴 어쩐 일이야?”
• 이빈은 그제야 차 안의 사내가 온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내 온서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 “타.”
• 잠시 멈칫하던 이빈은 이내 순순히 온서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찔렸다.
• “친구랑 놀러 왔는데 너도 마찬가지였나 봐?”
• 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녀와 같은 술집에 있었다고. 그리고 하필이면 이렇게 기묘한 타이밍에 나타난 온서준.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일부러 그녀를 따라 나왔나.
•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