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저 남자 친구 사귄 적 없어요. 반지를 받은 적은 더더욱 없고요. 그러니 남자랑 잤을 리가 없겠죠? 처음 만나서 이런 얘기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저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어요.”
말을 마친 한여빈은 속으로 웃었다.
‘훗, 지금 나를 시험하려는 거야? 어때? 아주 잘 대처했지? 내가 남자 친구를 열 명도 넘게 만났어도 사실대로 얘기하겠어?’
한여빈의 대답에 차재혁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6년 전 그날,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여자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깨어나자마자 그를 찾아 한 씨 가문의 큰 아가씨와 결혼하라고 하니 한여빈이 바로 자기가 찾는 여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가 보군.’
차재혁은 평소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한여빈 앞에 웬 서류를 내밀었다.
“한여빈 씨, 나랑 거래하는 거 어때요?”
한여빈은 전혀 생각 밖의 말에 잠깐 멍해 있었다.
‘내가 좋아서 나랑 데이트하자고 한 거 아니야? 갑자기 웬 거래?’
한여빈은 의아한 얼굴로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들어 간단히 훑어보았다.
세 페이지가 되는 서류를 다 읽어본 한여빈이 물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지금 저랑 가짜로 결혼하자는 거예요?”
차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결혼 기간은 1년으로 하죠. 계약 기간을 1년이지만 내 요구에 따라 언제는 이혼할 수 있다는 점 주의해 줘요. 하지만 우리의 혼인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한 한여빈 씨는 제 와이프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어요. 그리고 이혼하게 되면 위자료 60억 줄게요.”
차재혁의 와이프로 누릴 수 있는 갖은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말에 한여빈은 솔깃했다.
‘A 시티에서 차재혁에게 시집가고 싶어 하는 여자는 널리고 널렸어. 그러니 차재혁의 와이프가 되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더 높게 볼 거야. 게다가 내가 만약 차재혁에게 시집가게 되면 가족들도 나를 우러러보겠지? 어쩌면 할아버지는 한 씨 가문의 가업을 내게 물려줄지도 몰라. 게다가 결혼하고 1년 사이에 우리 사이가 좋아지면 앞으로도 쭉 차재혁의 와이프로 살아가도 된다는 소리잖아!’
한여빈은 마음이 들뜨고 은근히 흥분되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런데 재혁 씨. 왜 하필이면 저죠?”
‘훗, 보나 마나 내 미모에 반해서겠지?’
한여빈은 어깨 펴고 꼿꼿하게 앉으며 생긋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위중하시거든요. 할아버지의 소원 들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차재혁은 줄곧 6년 전 그 여자를 찾고 있었으나 여자에 대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는 6년 전에 할아버지 때문에 먼저 호텔을 나서며 방에 반지를 남겼는데 여자가 그것을 보고 가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진심을 담아 반지를 남겼는데 가지고 있을까?’
차재혁은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여자를 보냈기에 그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찾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아. 그 여자를 반드시 찾고 말겠어!’
한여빈은 점점 굳어지는 차재혁의 얼굴을 보며 움찔했다.
‘뭐야? 표정이 왜 점점 더 어두워지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한여빈은 차재혁이 말을 바꿀세라 얼른 서류에 사인했다.
‘그래, 가짜 결혼이면 또 어때. 내가 이런 남자를 또 어디에서 만난다고... 일단 결혼부터 하고 나서 내가 내 노력으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면 되잖아!’
차재혁은 한여빈이 사인한 서류를 잘 챙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한여빈 씨? 다음 주 금요일에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릴 겸 집에 찾아갈게요.”
“네, 그러면 기다리고 있을게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한여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며 격동되는 마음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나는 곧 차 씨 가문 안주인이 될 몸이야. A 시티에서 고개 빳빳이 쳐들고 다녀도 된다고!’
그런데 그때, 한여빈의 눈앞에 한이서와 똑 닮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바람에 한여빈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한이서 이미 죽지 않았어?’
한여빈은 한이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은근슬쩍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이서.”
한이서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엔 의아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한여빈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한이서의 눈에 증오가 차올랐다. 그녀는 마음 같아서는 한여빈에게 달려들어 한여빈의 목을 조르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