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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게, 친밀하게

위험하게, 친밀하게

Maggie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서울, 강남구.
  • 늦은 밤, 한씨 가문의 별장이 까만 밤 속에서도 우뚝 솟아 위세를 당당히 떨치고 있었다.
  • 식당 안, 은색 촛대 위 촛불이 살랑거리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 김유연은 꼬박 세 시간을 들여, 한씨 그룹 회장 사모님처럼 완벽하게 자신을 꾸몄다.
  • 오늘은 결혼 1주년이 되는 날, 하지만 식탁 맞은편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 차갑게 마시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뒀던 샴페인의 거품도 이미 다 사라졌다. 마음속 그 가엾은 기대도 샴페인 거품처럼 조용히 짓밟혔다.
  • 벽에 걸린 TV에 갑자기 연예 속보가 떴다.
  • 화면 한가운데에 그녀의 호적상 남편, 한씨 그룹 회장 한지현의 얼굴이 보였다.
  • 비싼 맞춤 슈트를 입은 한지현은 다정한 표정으로, 옆에 선 여자에게 직접 외투를 걸쳐 주고 있었다.
  • 아나운서가 흥분한 톤으로 말했다.
  • “한씨 그룹 한지현 회장이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유명 발레리나 정도아와 늦은 밤 밀회를 즐겼습니다. 두 사람은 사실상 공개 열애를...”
  • 김유연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자신이 아직도 멍청하게 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었지만 한지현을 본 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 이 남자 마음속에 정도아뿐이라는 것을 김유연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체면을 지키며 한씨 가문 며느리 역할을 해 왔다.
  • 하지만 이 결혼은 말 그대로 껍데기뿐이었다.
  • 지금까지도, 김유연은 처녀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 리모컨을 들어 TV를 끈 김유연은 이 순간 뼛속까지 스며드는 깊은 피로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 넓은 소파에 몸을 내던진 후 값비싼 드레스를 벗을 힘도 없이 그대로 웅크린 채 깊이 잠들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거칠고 뜨거운 손이 문득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종아리를 쓸었다.
  • 이상한 느낌에 눈을 벌떡 뜬 김유연은 어둠 속에서 낯선 눈과 마주쳤다.
  • 키 큰 남자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방 안에 떡하니 있었다. 그는 소파 옆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김유연은 드레스 자락이 이미 허벅지까지 걷혀 있었다.
  • “누구야! 당장 나가!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야!”
  • 비명 섞인 소리로 외치며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 “경찰?”
  • 남자가 히죽 웃었다.
  • “사모님, 나는 회장님이 직접 보낸 사람이에요.”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성급히 덮쳤다.
  • 순식간에 목을 조이는 듯한 공포감을 느낀 김유연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냈다. 휘청이며 거실 구석으로 몸을 숨겼지만 온몸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 ‘그럴 리가... 한지현이 날 이렇게 대할 리가 없어...’
  • 바로 그때, 현관에서 찰칵하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한지현이 돌아온 것이다.
  • 이 순간, 김유연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그의 슈트 앞자락을 꽉 움켜쥐고,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지현아... 낯선 사람이 들어왔어. 나 너무 무서워...”
  • 한지현은 순간 몸이 살짝 굳었다. 그러더니 앞에 있던 김유연을 바로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고개까지 살짝 숙였다. 따뜻한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이마 머리카락을 스쳤다. 거의 키스를 할 듯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에 김유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나를... 그나마 조금은 신경 쓰는 건가?’
  • 오래 눌러 둔 사랑과 비루한 바람, 조금 전의 공포까지 뒤섞여 잠깐 판단이 흐려졌다.
  • 눈을 감고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남자의 몸과 가까워진 입술에 입맞춤이라도 해서, 한 줄기의 따뜻함과 안전감을 얻고 싶었다.
  • 그런데 입술이 닿기 직전, 급히 멈췄다.
  • “김유연.”
  • 남자의 목소리는 뼛속까지 차가웠다.
  • “너 정말 역겹다.”
  • 그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김유연은 피마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 “살짝만 잘해주면 이렇게 달라붙냐?”
  • 김유연의 턱을 세게 움켜쥔 한지현은 조롱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 “아까 그 남자, 너랑 자라고 내가 보낸 사람이야.”
  • 한지현은 비웃으며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 “설마 내가 너랑 잘 거라 생각했어?”
  • “왜...”
  • 눈이 휘둥그레진 김유연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 “오빠, 왜 다른 남자를...”
  • “할아버지는 네 배에 아이만 있으면 된대! 하지만 난... 평생 네 몸에 손도 대기 싫어!”
  • 한지현은 독 묻은 칼보다 더 날카로운 말로 김유연의 마음을 후벼팠다.
  • “너, 그때 도아를 하마터면 죽일 뻔한 거 알아? 넌 내 손길 받을 자격 없어! 네가 가진 가치는 딱 하나, 바로 네 자궁이야. 얌전히 후계자나 낳고, 돈 들고 영원히 우리 가문에서 꺼져.”
  • 김유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코앞에 있는 남자, 고개를 들면 바로 풀어진 셔츠 깃 아래, 새로 생긴 키스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 ‘아, 마음이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 사랑도, 서러움도, 변명하고 싶던 마음도... 쓰레기 보는 듯한 그의 눈빛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 이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혼자서 벌인 웃음거리였다.
  • 김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지현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떨리던 몸도 그녀의 마음처럼 차분해졌다.
  • “그래. 그렇게 원하면 임신할게.”
  • 갑작스럽게 순응하는 김유연의 모습에 한지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훑어봤다.
  • 김유연은 그런 시선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러고는 남은 자존심을 지키듯 마지막 기운까지 다 끌어올려 등을 곧게 폈다.
  • “하지만, 애 아빠가 누가 될지는 내가 정해.”
  • “맘대로 해.”
  • 한지현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툭 내뱉었다. 말투엔 경멸이 잔뜩 묻었다.
  • 그에게 김유연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정도아뿐이니까.
  • 그날 밤, 김유연은 강남의 유명한 최고급 멤버십 클럽 ‘애프터 컬러’ 제일 안쪽 부스에 앉아 있었다.
  • 여기 온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남자를 하나 찾는 것!
  • 그런데 자리에 앉고 나니, 소주만 끊임없이 들이켰다.
  • 독한 술이 목을 다 태워버릴 듯 따가웠지만 얼음장 같은 가슴은 전혀 녹지 않았다.
  • 수년간의 동경, 긴 시간의 집착이 완전히 무너졌다.
  • 한지현에게 품었던 모든 감정,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 김유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려 했다.
  • 비틀거리며 일어나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하이힐이 삐끗하며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 하지만 바닥에 쿵 넘어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떤 아픔도 전해지지 않았다.
  •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일으켜 세웠다.
  • 진한 취기와 갑작스럽게 붕 뜬 몸에 심장이 덜컥했다. 무심코 곁에 있는 고급 슈트 천을 꽉 움켜쥐었다.
  • 흐릿하던 정신이 잠깐 맑아진 것 같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깊고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는 얼굴이 아주 잘생겼으며 턱 라인 또한 매끈하고 날카로웠다.
  •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어 넓은 어깨와 튼튼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 그 순간 김유연은 결심을 하게 됐다. 머릿속도 어두운 밤에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는 것처럼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이 사람이다.’
  • 아직 가시지 않은 취기를 빌려, 그녀는 그가 단정히 여민 셔츠 앞자락을 손끝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또렷한 발음으로 직설적으로 말했다.
  • “저기요. 너무 추운데... 따뜻한 데... 같이 가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