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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 신재욱은, 눈빛이 점점 더 깊어졌다.
  • 김유연은 그가 액수가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 어차피 ‘애프터 컬러’ 같은 최상급 클럽의 ‘남자 호스트’면, 몸값이 싸지는 않을 거니까.
  • “6천만.”
  • 좀 더 공평한 거래를 위해 김유연이 먼저 금액을 올려 말했다.
  • “난 즐길 거 즐기고, 넌 돈 벌면 되잖아. 서로 필요한 거 챙기자.”
  • 신재욱이 낮은 소리로 피식 웃었다.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장난기가 스쳤다.
  • “이봐, 아가씨, 내 몸값이 그 정도라고 생각해?”
  • 이를 꽉 앙다문 김유연은 다시 한번 가격을 제시했다.
  • “8천만! 단, 고객은 나뿐이어야 해. 이 정도면 낮은 가격 아니야.”
  • 입꼬리를 살짝 올린 남자는 담담하게 숫자 하나를 툭 내뱉었다.
  • “1억.”
  • ‘1억...’
  • 김유연은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한지현이 돈을 대부분 정도아에게 퍼줬기에, 그녀 손에 남은 건 그리 많지 않았다.
  • 짧은 시간에 5천만을 마련하는 건, 솔직히 좀 빡셌다.
  • “지금 당장은 못 줘.”
  • 김유연은 자기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신재욱 쪽으로 내밀었다.
  • “연락처 좀 쳐봐. 내가 연락할 테니.”
  • 신재욱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휴대폰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그녀 휴대폰 화면에 번호를 입력했다.
  • ...
  • 클럽을 나온 김유연은 곧장 한씨 그룹 본사로 차를 몰았다.
  • 회장실 문을 열자, 넓은 책상 뒤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보고 있는 한지현이 보였다.
  • “왜 왔어?”
  • 그녀를 보자마자 한지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확 스쳤다.
  • “회사로 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 “한 회장, 내 계좌로 3억 보내줘.”
  • 김유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 말에 한지현은 황당한 일이라도 겪은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 “갑자기 그 큰돈을 어디에 쓰려고?”
  • “남자 스폰 좀 하려고.”
  • 김유연은 평소 안부를 묻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 “어젯밤에, 눈에 든 사람이 있어. 한 달에 1억. 석 달 치 선불.”
  • 잠깐 멍해 있던 한지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김유연을 바라봤다.
  • “네가 남자를 스폰할 돈을 나한테 달라고? 김유연, 너 미쳤어?”
  • “나 미치지 않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아주 멀쩡해.”
  •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간 김유연은 책상 모서리에 양손을 짚은 뒤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 “너, 나한테 손대기 싫다면서 애는 원하잖아. 미안한데, 난 정자가 없어서 혼자 임신을 못 해.”
  • 코웃음을 친 한지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유연을 바라봤다.
  •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이유, 결국에는 나한테 한번 안겨 보기 위해서잖아? 내 손길 어떻게든 느껴보려고. 꿈 깨.”
  • “네 손길 느껴보기 위해서라고?”
  • 김유연도 똑같이 비웃었다. 그러고는 넓은 책상을 돌아 그의 옆에 섰다.
  • “네가 내 몸에 손대게 만들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 손끝으로 일부러 그의 슈트 깃을 스치자, 그의 몸이 순간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 “우린 합법적인 부부잖아. 게다가 당신 할아버지께서... 꿈에서도 손주 볼 생각만 하시지, 안 그래?”
  • 한지현은 장난치는 그녀의 손목을 홱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말했다.
  • “연기는 꽤 잘하네. 예전엔 네가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는데?”
  • 김유연은 손을 확 뺀 뒤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러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 “예전에 널 좋아했을 때는 네가 내 전부였어. 근데 이제 아니야. 앞으로는 지금 이 태도일 테니까 너도 빨리 익숙해져.”
  • 한지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이 많이 복잡한 듯했다.
  • 김유연이 남자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자, 따뜻한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 “돈이 아까우면, 네 몸을 줘. 둘 중 하나 골라 봐.”
  • 한지현은 불에 덴 듯 그녀를 확 밀쳐냈다. 얼굴은 먹물보다 더 시커메졌다.
  • 서류 위의 휴대폰을 움켜쥐더니 빠른 속도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 이내, 김유연 휴대폰의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 [3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 김유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 “한 회장, 기억해. 이 돈은 오늘부로 우린 단지 협력 관계일 뿐,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리고, 먼저 포기한 사람은 당신이야.”
  • 말을 마친 뒤 당당하게 뒤돌아 나갔다. 미련 따위 하나도 없었다.
  • 운전석에 앉은 김유연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잔잔했다.
  • 서로를 이어주던 ‘부부’라는 이름의 가느다란 실 같은 인연을, 드디어 그녀 손으로 툭 끊어냈다.
  • 휴대폰을 꺼내 아침에 저장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주소 하나 보낼 테니 짐부터 거기로 옮겨. 계약 기간 동안은 거기서 지내.”
  •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듯 목소리에 낯선 기색이 묻어 있었다.
  • 수화기 너머로, 신재욱의 낮고 느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가씨, 벌써 나 보고 싶은 거야? 어젯밤... 배부르게 못 해줬나?”
  • “계약금 보내려고.”
  • 김유연은 남자가 던진 은근한 농담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톤으로 대답했다.
  • “그리고 계약서 세부 사항도 정해야지. 매번 밖에서 방 잡을 수는 없잖아.”
  • 전화를 끊은 뒤, 한남동에 비어 있는 아파트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 화면을 2초쯤 응시한 뒤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차 시동을 걸었다.
  • 한 시간 뒤, 차가 천천히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훤칠한 남자가 예고도 없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 따가운 오후 햇살이 뒤에서 비춰, 그의 얼굴이 처음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 “왜?”
  • 남자가 몸을 숙이며 다가오자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 “옷을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어?”
  • 익숙한 목소리에 김유연은 이내 확신했다. 눈앞의 이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바로 어젯밤 클럽에서 봤던 ‘남자 호스트’라는 걸.
  •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호기심 어린 뜨거운 시선 또한 곁눈질로 느낄 수 있었다.
  • 급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목을 확 끌어당겨 허둥지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 바로 해당 층에 도착했다.
  •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고 난 후에야, 김유연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 바로 그 순간 고개를 들자,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겉옷부터 벗고 있었다. 이어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
  • “뭐 하는 거야!”
  • 김유연은 성큼 한 걸음 뒤로 가며 그의 손을 눌렀다.
  • 그러자 동작을 멈춘 신재욱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가감 없이 훑었다.
  • “아가씨, 이렇게 급하게 나를 끌고 들어온 이유가... 하고 싶어서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