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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 사촌 여동생은 딱 임재현의 취향이었다

  • 백도훈을 낳을 당시 강연화는 이제 막 스물네 살의 나이였다. 이후 그녀는 딸을 하나 더 원했고, 서른다섯 살 때 백지연을 낳았다.
  • 그렇다 보니 백도훈은 백지연보다 열한 살이 많았고, 현재는 꽤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 그는 백지연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남매의 첫 만남이었다.
  • 백지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백도훈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동생아, 오빠도 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제야 우리 가족이 완전해졌어!”
  • 그렇게 백지연은 백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눈 깜빡할 사이에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 서울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백씨 가문의 잃어버린 공주님이 18년 만에 드디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 하지만 백씨 가문은 그 공주님을 베일 속에 꼭꼭 감춰둔 채 보호했고, 지금까지도 그녀를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 누군가는 아마도 그 “공주님”이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상태라 백씨 가문에서 그녀를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 소문을 퍼트렸다.
  • 백정호는 심씨 가문에게 그 프로젝트를 맡기기로 승낙했고, 그럼으로써 심씨 가문은 큰돈을 벌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또 사람을 시켜 선물들을 보내 호의를 표했다.
  • 심씨 가문은 백씨 가문의 선물을 받고도 백지연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씨 가문이 자신들을 좋게 보고 친분을 쌓고 싶어 사람을 시켜 값비싼 선물들을 보내온 것이라 생각했다.
  • 그 보름 동안 심윤아 역시 심씨 가문에서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만족감에 젖어 심씨 가문의 모든 것을 누렸고, 심지어 방 안의 백지연의 물건들은 전부 쓰레기로 취급하고 버린 지 오래였다.
  • 그녀의 세뇌로 인해 심현규와 윤혜선은 이미 진즉에 백지연은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백지연이라는 이미 떠나버린 양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 다만 심윤아는 여전히 속으로 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그 천한 계집애는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거지? 설마 돌아오지 않을 건가? 그럴 리가 없어. 돌아오지 않으면 어딜 갈 수 있겠어? 상관없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계집애를 찾아가면 돼! 어쨌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계집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 심윤아는 심현규와 윤혜선에게 자신도 한세대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요구했고, 한바탕 애교를 부린 끝에 심현규와 윤혜선은 이를 허락했다.
  • 강연화는 백지연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고 싶어 했지만, 백지연은 이를 거절했다. 삶을 다시 한번 사는 백지연으로서는 진즉에 그런 겉치레들에는 질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금 그저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 강연화는 교통사고를 겪고 난 백지연에게는 아직 몸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했다.
  • 그리고 이날, 강연화와 백지연은 함께 뒷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강연화가 백지연에게 리치를 발라주며 물었다.
  • “지연아, 대학교는 어디로 원서 넣었어?”
  • “한세대학교 연극영화과요.”
  • 백지연에게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삶에서는 내내 심윤아가 그녀를 방해하고 있었던 터라 데뷔 이후 몇 년 동안 그저 단역밖에는 하지 못했었다.
  • 그렇다 보니 유명해지기는커녕 먹고사는 것조차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 나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 백지연은 성적으로 한세대학교에 붙은 것이었지만 심윤아는 심현규와 윤혜선이 돈으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로 심윤아는 자신의 패거리를 만들어 학교에서 그녀를 따돌렸고, 게다가 커뮤니티에 그녀에 관한 루머도 퍼트렸었다.
  • 이로 인해 백지연의 몇 년간의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도 그녀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했다.
  • 그 모든 역경을 뚫고 백지연은 지난 삶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이후 첫 작품에 캐스팅되었었다.
  • 그 작품은 여자 주인공이 메인인 작품으로 원래대로라면 백지연은 그 작품에 출연한 이후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심윤아가 끼어들어 그녀의 대본을 빼앗아 갔고, 그로 인해 백지연은 그 첫 번째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 이는 또한 그녀가 그 뒤로 수년간 연예계에서 열심히 활동했음에도 진정으로 그녀의 것인 괜찮은 배역 하나 따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 사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회만 생기면 심윤아가 모두 빼앗아 가기 일쑤였다.
  • 백지연이 연예계에 발을 들인 이후, 심윤아가 몰래 그녀가 심씨 가문의 가짜 딸이며, 본인이 진짜 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탓에 그 몇 년간 미디어들은 틈만 나면 그녀들을 이슈 거리로 삼았고, 백지연을 헐뜯기 바빴다.
  • 매체들은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은 기사로 내보냈다. 심윤아가 돌아온 뒤로 백지연이 주인 행세를 하며 몰래 심윤아를 헐뜯었다는 둥, 그녀를 악독한 언니의 이미지로 만들었고 심윤아는 그런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순진무구한 동생이었다.
  • 백지연이 아무리 설명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심윤아의 팬들은 매일 같이 인터넷을 통해 그녀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 그 몇 년 동안은 백지연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심윤아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들었고, 그렇게 그녀는 백지연의 인생을 빼앗아 갔다.
  • 지난 삶에서 심윤아에게는 심현규와 윤혜선이라는 백이 있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백지연은 더는 심윤아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심현규와 윤혜선의 사랑은 이미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 “한세대학교? 그 학교 꽤 괜찮은 곳이야! 내가 한세대 뮤지컬 학과 졸업생인데, 지연이 네가 나랑 동문일 줄은 몰랐네!”
  • 강연화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하며 다정하게 발라낸 리치를 백지연에게 건넸다. 그러자 백지연은 입을 벌려 이를 야무지게 받아먹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고마워요, 엄마! 엄마도 한세대 졸업생이에요? 제 선배님이네요!”
  • 이에 강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 “지연이 넌 연기자가 되고 싶은 거니?”
  • 백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강연화는 본인이 뮤지컬 배우였기에 자신의 딸도 배우의 꿈을 품고 있다는 말에 당연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 “좋아! 이 강연화의 딸이니까 분명 내 예술 쪽 재능도 물려받았을 거야. 엄마가 온 힘을 다해 네가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줄게. 우리 딸은 나중에 분명 훌륭한 연기자가 될 거야!”
  • “고마워요, 엄마. 저 노력할게요.”
  • ……
  • 개학 첫날, 일 때문에 백지연을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주지 못하게 된 강연화와 백정호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사촌 오빠인 백지훈에게 대신 그녀를 데려다주도록 부탁했다.
  • 백지훈 역시 한세대학교 학생으로, 그는 컴퓨터공학과 3학년이었다.
  • 저택을 나선 백지연은 약속한 장소에서 백지훈을 기다렸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던 터라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 그녀는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기 그지없었다.
  •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백지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 그러던 그때, 검은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벤틀리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이내 뒷좌석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차가운 표정의 얼굴 하나가 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날카로운 인상의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새까만 두 눈으로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백지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백지연?”
  • 백지연은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편집하고 있었다.
  • 그런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는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의 코드들뿐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백지연은 휴대폰을 끄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임재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 임재현을 본 백지연은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백지훈이라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예쁜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띠며 임재현을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 “오빠.”
  • 백지연의 조그만 얼굴과 그녀의 달콤한 미소, 그리고 그 오빠라는 소리까지. 임재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 “?”
  • 원래대로라면 백지훈이 그녀를 데리러 왔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붙잡혀 올 수 없었던 백지훈은 하는 수 없이 임재현에게 그녀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고, 오고 싶지 않아 하는 임재현에게 아버지라고 한번 부르기까지 한 백지훈의 성의를 생각해 임재현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 그는 이를 그저 성가신 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수확에 동요하고 있었다.
  • 이 사촌 여동생은 마침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임재현의 취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