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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내 옆에 앉아

  •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이 집 도련님의 규칙이었다. 그 누가 오든지 조수석에 앉는 것만 가능하고, 절대 그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을 수 없다는 것.
  • 이에 백지연이 차에 올라타려던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더니 나직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 “뒤에 타.”
  • 이에 백지연은 조수석에 올라타려던 발을 순간 멈칫했고, 운전기사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의외라는 듯 임재현을 바라보았다.
  • “도련님?”
  • 임재현은 그런 운전기사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백지연을 향해 다시 한번 말을 내뱉었다.
  • “여기 앉아.”
  • “아, 네.”
  • 백지연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잠시 경악하는 듯하더니 묵묵히 차에 올라 차를 출발시켰다.
  • 차에 올라탄 백지연은 예의 바르게 임재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데리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 임재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삐딱하게 눈썹을 추켜올리고 백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거대한 늑대의 그것 같았다.
  • 백지연은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이 불편했다.
  • ‘이 사촌오빠라는 사람, 문제 있는 사람인 건 아니겠지…? 설마 내 옷이 엄청 더럽나?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 백지연은 불편함을 느끼며 자신의 옷을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옷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 “별것도 아닌데 뭘. 고마우면 밥 한 끼 사면 되지.”
  • “……”
  • 백지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척인 데다가, 학교로 가는 길에 함께 데리고 가는 것뿐이었기에, 그다지 시간을 잡아먹는 일 같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그녀더러 밥 한 끼 사라고 하는 그의 지나치게 적극적인 행동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사촌 오빠 성격이 원래 이런가?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가?’
  • “좋아요. 그럼 이따가 점심 같이 먹어요.”
  • “연영과라고 했지?”
  • “네.”
  • “내가 점심에 너한테 찾아갈게.”
  • “네.”
  • 백지연이 단답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딱히 그와 무언가 많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 임재현은 애초에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백지연이 말이 없자, 그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백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네 사촌 여동생 꽤 괜찮은 애 같아.]
  • 이내 백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 [만났어? 나도 아직 돌아온 사촌 여동생을 못 만나봤는데, 어떻게 생겼어?]
  • 임재현의 시선이 힐긋 백지연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던 그는 네 글자로 답했다.
  • [충격적임.]
  • 휴대폰을 들고 있던 백지훈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충격적이라고? 무슨 설명이 이래? 설마 충격적으로 못생겼다는 건가? 헐? 그래서 백씨 가문 사람들이 걔를 공식 석상에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유가 걔가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거구나.’
  • 백지훈은 얼른 임재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 [재현아, 그래도 내 사촌 여동생이니까 잘 대해줘.]
  • ‘절대 못생겼다고 차 밖으로 던져버리면 안 돼! 젠장, 혹시라도 그러면 나더러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하라고!’
  • 임재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딱히 백지훈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한세대학교 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던 백지연은 고개를 돌려 임재현을 한번 쳐다보더니 물었다.
  • “오빠, 같이 갈래요?”
  • 임재현은 사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 이에 운전기사는 얼른 입을 열어 예의 바르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 “아가씨, 저희 도련님께서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
  • “그래. 같이 가자.”
  • 운전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재현이 얼른 말했다.
  • 임재현은 문득 백지연과 함께 차에서 내려, 함께 교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던 것이다.
  •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말에 백지연은 이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운전기사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 ‘도련님께서 오늘 웬일로 이러시는 거지?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시는 거지?!’
  • 임재현과 백지연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백지연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학교 정문에 저도 모르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그렇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옆쪽에서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앗! 임재현 선배다!”
  • “세상에! 임재현 선배가 정문에 나타나다니!”
  • “대박, 옆에 있는 여자애 너무 예쁘다. 설마 여자 친구는 아니겠지… 설마 설마… 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 “아니겠지. 임재현 선배는 여자 친구 같은 거 사귄 적 없어. 그래서 전에 선배가 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었잖아. 저 여자는 아마 친척 아닐까?”
  •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들이 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은 백지연은 고개를 돌려 의심 어린 표정으로 임재현을 바라보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 “그쪽 이름이 뭐예요? 지훈 오빠가 아닌 거예요?”
  • 임재현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선을 내려 옆에 있는 백지연을 바라보았다.
  • 그보다 적당히 머리 하나 정도 작은 백지연은 끌어안으면 마침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 “어, 아니야.”
  • 그가 대답했다.
  • “???!!”
  • 백지연은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 “지훈 오빠가 아니라고요?! 그럼 그쪽은 누군데요?!”
  • ‘아까 들으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을 임재현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설마? 내가 차를 잘못 탄 거야?!’
  • “내가 백지훈이라고 말한 적 있었나?”
  • “그럼 내가 그쪽을 오빠라고 불렀을 때 왜 그렇게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건데요?!”
  • “여동생이 꽁으로 한 명 생기는 건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있어?”
  • “…!??!”
  • ‘젠장, 듣고 보니 꽤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잖아! 이런 후안무치한 사람은 또 처음이네.’
  • 백지연이 물었다.
  • “그럼 지훈 오빠는 어딨는데요? 왜 그쪽이 절 데리러 온 거예요?”
  • 그러자 임재현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 “누가 알겠어. 죽었나 보지.”
  • “…?”
  • 한창 학교로 오는 중인 백지훈은 그렇게 졸지에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 ‘입만 열면 헛소리네!’
  •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백지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임재현은 그런 그녀의 뒤쪽에서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 산들거리는 바람에 소녀의 치맛자락이 날리며 가늘고 흰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 백지연은 뒤에 있는 임재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 지난 삶에 한세대학교에서 4년을 보냈었기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 이에 백지연은 어렵지 않게 접수 창구를 찾아가 필요한 모든 절차를 끝마쳤다.
  • 곧이어 조교가 그녀를 교실로 데려갔다. 익숙한 길을 걸어가던 백지연은 또다시 지난 삶 모진 괴롭힘을 당했던 그 4년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짙은 증오심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지난 삶에서 그녀는 항상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했었다. 그렇기에 번번이 원래는 그녀의 것이었어야 했던 기회들을 심윤아에게 빼앗겼던 것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이번 생에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 심윤아가 그녀의 인생을 빼앗아 갔던 것임을 말이다.
  • 심윤아는 회귀자이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언제나 한걸음 앞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 증오스러웠다.
  •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에 휴대폰을 꺼낸 백지연은 아까 자신이 다크웹에 올린 도전장이 받아들여졌고, 다가오는 주말 도전에 응할 것이라는 소식을 확인했다.
  • 이를 본 백지연은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 ‘상관없어. 하늘도 다 보고 있었으니 나한테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준 거겠지. 이번에는 내가 심윤아보다 먼저 지난 삶에서 이루지 못했던 염원들을 전부 이룰 거야. 걔 경쟁하는 거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걔더러 경쟁하러 와 보라지! 심윤아, 이번에 널 맞이하게 되는 건 지옥의 시작이 될 거야!’
  • ……
  • 백지연이 교실에 도착했을 때, 교실 안의 학생들은 한곳에 뭉쳐 있었다. 이날 오후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백지연이 안으로 들어서자, 학생들은 다들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쟤지? 커뮤니티에 올라온 그 사람 쟤 맞는 것 같은데.”
  • “쟤 맞아.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쟤가 아닐 수가 없어. 너무하네, 신께서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야? 쟤는 저렇게 예쁘게 만들어 줬잖아.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쁜 것 같아. 난 이전까지만 해도 보정 어플로 찍은 사진인 줄 알았는데!”
  • “대박이야. 임재현 선배랑 쟤 너무 잘 어울려.”
  • “……”
  • 그들의 시선이 백지연을 위에서 아래로 샅샅이 훑었다. 교실 안에서 작은 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백지연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지난 삶에서 심윤아와 함께 그녀를 따돌렸었기 때문이었다.
  • 지난 삶에서 백지연은 그래도 그들과 잘 지내보기 위해 그들을 도와 수많은 심부름까지도 해주었었다.
  •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은 뒤에서 그녀를 두고 싸구려 노동력이라면서 미소 하나면 그녀에게 이것저것 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그야말로 백지연을 바보 취급했던 것이다.
  •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백지연은 그들에게 그 어떤 호의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시간을 보니 심윤아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에 백지연은 차라리 맨 뒷줄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