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이 집 도련님의 규칙이었다. 그 누가 오든지 조수석에 앉는 것만 가능하고, 절대 그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을 수 없다는 것.
이에 백지연이 차에 올라타려던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더니 나직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뒤에 타.”
이에 백지연은 조수석에 올라타려던 발을 순간 멈칫했고, 운전기사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의외라는 듯 임재현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임재현은 그런 운전기사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백지연을 향해 다시 한번 말을 내뱉었다.
“여기 앉아.”
“아, 네.”
백지연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잠시 경악하는 듯하더니 묵묵히 차에 올라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 올라탄 백지연은 예의 바르게 임재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데리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임재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삐딱하게 눈썹을 추켜올리고 백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거대한 늑대의 그것 같았다.
백지연은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이 불편했다.
‘이 사촌오빠라는 사람, 문제 있는 사람인 건 아니겠지…? 설마 내 옷이 엄청 더럽나? 왜 계속 쳐다보는 거지?’
백지연은 불편함을 느끼며 자신의 옷을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옷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데 뭘. 고마우면 밥 한 끼 사면 되지.”
“……”
백지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척인 데다가, 학교로 가는 길에 함께 데리고 가는 것뿐이었기에, 그다지 시간을 잡아먹는 일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더러 밥 한 끼 사라고 하는 그의 지나치게 적극적인 행동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촌 오빠 성격이 원래 이런가?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가?’
“좋아요. 그럼 이따가 점심 같이 먹어요.”
“연영과라고 했지?”
“네.”
“내가 점심에 너한테 찾아갈게.”
“네.”
백지연이 단답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딱히 그와 무언가 많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임재현은 애초에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백지연이 말이 없자, 그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백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사촌 여동생 꽤 괜찮은 애 같아.]
이내 백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만났어? 나도 아직 돌아온 사촌 여동생을 못 만나봤는데, 어떻게 생겼어?]
임재현의 시선이 힐긋 백지연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던 그는 네 글자로 답했다.
[충격적임.]
휴대폰을 들고 있던 백지훈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적이라고? 무슨 설명이 이래? 설마 충격적으로 못생겼다는 건가? 헐? 그래서 백씨 가문 사람들이 걔를 공식 석상에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유가 걔가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거구나.’
백지훈은 얼른 임재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재현아, 그래도 내 사촌 여동생이니까 잘 대해줘.]
‘절대 못생겼다고 차 밖으로 던져버리면 안 돼! 젠장, 혹시라도 그러면 나더러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하라고!’
임재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딱히 백지훈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한세대학교 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던 백지연은 고개를 돌려 임재현을 한번 쳐다보더니 물었다.
“오빠, 같이 갈래요?”
임재현은 사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운전기사는 얼른 입을 열어 예의 바르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가씨, 저희 도련님께서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
“그래. 같이 가자.”
운전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재현이 얼른 말했다.
임재현은 문득 백지연과 함께 차에서 내려, 함께 교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던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말에 백지연은 이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운전기사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도련님께서 오늘 웬일로 이러시는 거지?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시는 거지?!’
임재현과 백지연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백지연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학교 정문에 저도 모르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옆쪽에서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임재현 선배다!”
“세상에! 임재현 선배가 정문에 나타나다니!”
“대박, 옆에 있는 여자애 너무 예쁘다. 설마 여자 친구는 아니겠지… 설마 설마… 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아니겠지. 임재현 선배는 여자 친구 같은 거 사귄 적 없어. 그래서 전에 선배가 게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었잖아. 저 여자는 아마 친척 아닐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들이 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은 백지연은 고개를 돌려 의심 어린 표정으로 임재현을 바라보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쪽 이름이 뭐예요? 지훈 오빠가 아닌 거예요?”
임재현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선을 내려 옆에 있는 백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적당히 머리 하나 정도 작은 백지연은 끌어안으면 마침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았다.
“어,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
백지연은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지훈 오빠가 아니라고요?! 그럼 그쪽은 누군데요?!”
‘아까 들으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을 임재현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설마? 내가 차를 잘못 탄 거야?!’
“내가 백지훈이라고 말한 적 있었나?”
“그럼 내가 그쪽을 오빠라고 불렀을 때 왜 그렇게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건데요?!”
“여동생이 꽁으로 한 명 생기는 건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있어?”
“…!??!”
‘젠장, 듣고 보니 꽤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잖아! 이런 후안무치한 사람은 또 처음이네.’
백지연이 물었다.
“그럼 지훈 오빠는 어딨는데요? 왜 그쪽이 절 데리러 온 거예요?”
그러자 임재현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누가 알겠어. 죽었나 보지.”
“…?”
한창 학교로 오는 중인 백지훈은 그렇게 졸지에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입만 열면 헛소리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백지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임재현은 그런 그녀의 뒤쪽에서 그녀를 따라 걸어갔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소녀의 치맛자락이 날리며 가늘고 흰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백지연은 뒤에 있는 임재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지난 삶에 한세대학교에서 4년을 보냈었기에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백지연은 어렵지 않게 접수 창구를 찾아가 필요한 모든 절차를 끝마쳤다.
곧이어 조교가 그녀를 교실로 데려갔다. 익숙한 길을 걸어가던 백지연은 또다시 지난 삶 모진 괴롭힘을 당했던 그 4년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짙은 증오심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지난 삶에서 그녀는 항상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했었다. 그렇기에 번번이 원래는 그녀의 것이었어야 했던 기회들을 심윤아에게 빼앗겼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생에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 심윤아가 그녀의 인생을 빼앗아 갔던 것임을 말이다.
심윤아는 회귀자이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언제나 한걸음 앞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증오스러웠다.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에 휴대폰을 꺼낸 백지연은 아까 자신이 다크웹에 올린 도전장이 받아들여졌고, 다가오는 주말 도전에 응할 것이라는 소식을 확인했다.
이를 본 백지연은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상관없어. 하늘도 다 보고 있었으니 나한테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준 거겠지. 이번에는 내가 심윤아보다 먼저 지난 삶에서 이루지 못했던 염원들을 전부 이룰 거야. 걔 경쟁하는 거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걔더러 경쟁하러 와 보라지! 심윤아, 이번에 널 맞이하게 되는 건 지옥의 시작이 될 거야!’
……
백지연이 교실에 도착했을 때, 교실 안의 학생들은 한곳에 뭉쳐 있었다. 이날 오후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지연이 안으로 들어서자, 학생들은 다들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지? 커뮤니티에 올라온 그 사람 쟤 맞는 것 같은데.”
“쟤 맞아.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쟤가 아닐 수가 없어. 너무하네, 신께서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야? 쟤는 저렇게 예쁘게 만들어 줬잖아.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쁜 것 같아. 난 이전까지만 해도 보정 어플로 찍은 사진인 줄 알았는데!”
“대박이야. 임재현 선배랑 쟤 너무 잘 어울려.”
“……”
그들의 시선이 백지연을 위에서 아래로 샅샅이 훑었다. 교실 안에서 작은 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백지연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지난 삶에서 심윤아와 함께 그녀를 따돌렸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삶에서 백지연은 그래도 그들과 잘 지내보기 위해 그들을 도와 수많은 심부름까지도 해주었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은 뒤에서 그녀를 두고 싸구려 노동력이라면서 미소 하나면 그녀에게 이것저것 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그야말로 백지연을 바보 취급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백지연은 그들에게 그 어떤 호의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심윤아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에 백지연은 차라리 맨 뒷줄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