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훈을 낳을 당시 강연화는 이제 막 스물네 살의 나이였다. 이후 그녀는 딸을 하나 더 원했고, 서른다섯 살 때 백지연을 낳았다.
그렇다 보니 백도훈은 백지연보다 열한 살이 많았고, 현재는 꽤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그는 백지연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남매의 첫 만남이었다.
백지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백도훈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생아, 오빠도 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제야 우리 가족이 완전해졌어!”
그렇게 백지연은 백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
눈 깜빡할 사이에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서울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백씨 가문의 잃어버린 공주님이 18년 만에 드디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백씨 가문은 그 공주님을 베일 속에 꼭꼭 감춰둔 채 보호했고, 지금까지도 그녀를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아마도 그 “공주님”이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상태라 백씨 가문에서 그녀를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 소문을 퍼트렸다.
백정호는 심씨 가문에게 그 프로젝트를 맡기기로 승낙했고, 그럼으로써 심씨 가문은 큰돈을 벌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또 사람을 시켜 선물들을 보내 호의를 표했다.
심씨 가문은 백씨 가문의 선물을 받고도 백지연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씨 가문이 자신들을 좋게 보고 친분을 쌓고 싶어 사람을 시켜 값비싼 선물들을 보내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 보름 동안 심윤아 역시 심씨 가문에서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만족감에 젖어 심씨 가문의 모든 것을 누렸고, 심지어 방 안의 백지연의 물건들은 전부 쓰레기로 취급하고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세뇌로 인해 심현규와 윤혜선은 이미 진즉에 백지연은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백지연이라는 이미 떠나버린 양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윤아는 여전히 속으로 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천한 계집애는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거지? 설마 돌아오지 않을 건가? 그럴 리가 없어. 돌아오지 않으면 어딜 갈 수 있겠어? 상관없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계집애를 찾아가면 돼! 어쨌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계집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심윤아는 심현규와 윤혜선에게 자신도 한세대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요구했고, 한바탕 애교를 부린 끝에 심현규와 윤혜선은 이를 허락했다.
강연화는 백지연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고 싶어 했지만, 백지연은 이를 거절했다. 삶을 다시 한번 사는 백지연으로서는 진즉에 그런 겉치레들에는 질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금 그저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강연화는 교통사고를 겪고 난 백지연에게는 아직 몸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이날, 강연화와 백지연은 함께 뒷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강연화가 백지연에게 리치를 발라주며 물었다.
“지연아, 대학교는 어디로 원서 넣었어?”
“한세대학교 연극영화과요.”
백지연에게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삶에서는 내내 심윤아가 그녀를 방해하고 있었던 터라 데뷔 이후 몇 년 동안 그저 단역밖에는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 보니 유명해지기는커녕 먹고사는 것조차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 나가야 했던 상황이었다.
백지연은 성적으로 한세대학교에 붙은 것이었지만 심윤아는 심현규와 윤혜선이 돈으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로 심윤아는 자신의 패거리를 만들어 학교에서 그녀를 따돌렸고, 게다가 커뮤니티에 그녀에 관한 루머도 퍼트렸었다.
이로 인해 백지연의 몇 년간의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도 그녀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 모든 역경을 뚫고 백지연은 지난 삶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이후 첫 작품에 캐스팅되었었다.
그 작품은 여자 주인공이 메인인 작품으로 원래대로라면 백지연은 그 작품에 출연한 이후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심윤아가 끼어들어 그녀의 대본을 빼앗아 갔고, 그로 인해 백지연은 그 첫 번째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는 또한 그녀가 그 뒤로 수년간 연예계에서 열심히 활동했음에도 진정으로 그녀의 것인 괜찮은 배역 하나 따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회만 생기면 심윤아가 모두 빼앗아 가기 일쑤였다.
백지연이 연예계에 발을 들인 이후, 심윤아가 몰래 그녀가 심씨 가문의 가짜 딸이며, 본인이 진짜 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탓에 그 몇 년간 미디어들은 틈만 나면 그녀들을 이슈 거리로 삼았고, 백지연을 헐뜯기 바빴다.
매체들은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은 기사로 내보냈다. 심윤아가 돌아온 뒤로 백지연이 주인 행세를 하며 몰래 심윤아를 헐뜯었다는 둥, 그녀를 악독한 언니의 이미지로 만들었고 심윤아는 그런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순진무구한 동생이었다.
백지연이 아무리 설명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심윤아의 팬들은 매일 같이 인터넷을 통해 그녀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그 몇 년 동안은 백지연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심윤아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들었고, 그렇게 그녀는 백지연의 인생을 빼앗아 갔다.
지난 삶에서 심윤아에게는 심현규와 윤혜선이라는 백이 있었지만, 이번 삶에서는 백지연은 더는 심윤아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심현규와 윤혜선의 사랑은 이미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한세대학교? 그 학교 꽤 괜찮은 곳이야! 내가 한세대 뮤지컬 학과 졸업생인데, 지연이 네가 나랑 동문일 줄은 몰랐네!”
강연화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하며 다정하게 발라낸 리치를 백지연에게 건넸다. 그러자 백지연은 입을 벌려 이를 야무지게 받아먹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요, 엄마! 엄마도 한세대 졸업생이에요? 제 선배님이네요!”
이에 강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지연이 넌 연기자가 되고 싶은 거니?”
백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연화는 본인이 뮤지컬 배우였기에 자신의 딸도 배우의 꿈을 품고 있다는 말에 당연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좋아! 이 강연화의 딸이니까 분명 내 예술 쪽 재능도 물려받았을 거야. 엄마가 온 힘을 다해 네가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줄게. 우리 딸은 나중에 분명 훌륭한 연기자가 될 거야!”
“고마워요, 엄마. 저 노력할게요.”
……
개학 첫날, 일 때문에 백지연을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주지 못하게 된 강연화와 백정호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사촌 오빠인 백지훈에게 대신 그녀를 데려다주도록 부탁했다.
백지훈 역시 한세대학교 학생으로, 그는 컴퓨터공학과 3학년이었다.
저택을 나선 백지연은 약속한 장소에서 백지훈을 기다렸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던 터라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백지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그때, 검은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벤틀리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이내 뒷좌석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차가운 표정의 얼굴 하나가 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새까만 두 눈으로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백지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백지연?”
백지연은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편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는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의 코드들뿐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백지연은 휴대폰을 끄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임재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임재현을 본 백지연은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 백지훈이라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예쁜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띠며 임재현을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오빠.”
백지연의 조그만 얼굴과 그녀의 달콤한 미소, 그리고 그 오빠라는 소리까지. 임재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
원래대로라면 백지훈이 그녀를 데리러 왔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붙잡혀 올 수 없었던 백지훈은 하는 수 없이 임재현에게 그녀를 데리러 가달라고 부탁했고, 오고 싶지 않아 하는 임재현에게 아버지라고 한번 부르기까지 한 백지훈의 성의를 생각해 임재현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는 이를 그저 성가신 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수확에 동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