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은 우리가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어려운 수술을 해서 경험을 쌓고 싶은 것뿐이죠. 자신의 승진을 위한 논문에 줄 하나 더하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알겠어요.”
영주혁은 그녀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줄게요.”
“큰소리치지 마세요! 당신이 뭐라고 당신 마음대로 된다는 겁니까?”
조규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이 병원 원장님이 저희 아버지세요. 그런 저도 당신만큼 거만하지는 않아요.”
조규진의 눈치를 보던 주건학은 조규진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한 걸 보고는 미간을 구기며 호통을 쳤다.
“윤슬 선생, 얼른 이 사람 데리고 나가. 아니면 험한 꼴 보게 될 거야.”
그의 적나라한 위협에도 가윤슬은 꿈쩍하지 않고 고집스레 수술실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문 건지 당장이라도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영주혁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한탄했다. 둘째 누나의 쌀쌀맞고 고집스러운 점은 한결같았고 시간마저 그녀의 모난 부분을 닳게 하지는 못했다.
영주혁은 조규진의 앞에 서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심장 수술이 하고 싶어요?”
조규진은 잠깐 흠칫하면서 동공이 떨렸지만 고상한 척하며 대꾸했다.
“의사라면 환자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을 겁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심장 수술이 하고 싶으시다니 제가 그 소망 이뤄드릴게요.”
“그게 무슨…”
조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주혁은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오른 주먹으로 주건학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큭!”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간을 구기고 있던 주건학은 순식간에 가슴께가 움푹 파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세상에나… 주 교수님…”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깜짝 놀라면서 연신 뒷걸음질 쳤다.
온화한 겉모습과 달리 영주혁은 무자비한 사람이었고 그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칼날처럼 서슬 퍼런 살기를 가까운 거리에서 느낀 조규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안색은 그가 입은 흰 가운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해져 있었다.
조금 전 영주혁의 주먹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순간, 사신을 비껴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심장 수술하고 싶다면서요?”
입꼬리를 끌어올린 영주혁은 바닥에서 신음을 내뱉고 있는 주건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환자 한 분 생겼네요.”
조규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져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은 보기 껄끄러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분한 듯 주먹을 말아쥐면서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주 교수님을 7층 수술실로 옮기세요.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영주혁은 가윤슬의 옆에 서면서 칭찬해 달라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얼른 들어가서 우리 수술해 주셔야죠. 수술 순조롭게 끝나면 저한테 밥 한턱내시는 거 잊지 말고요.”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가윤슬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우리가 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일이 한 단락되고 길게 숨을 내쉰 영주혁은 지유가 보낸 차량이 병원에 도착했을 거란 걸 뒤늦게 떠올렸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 주차장으로 향했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검은색 옷차림을 한 지유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지하 주차장의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영주혁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섬뜩한 차림으로 나타나지 마. 차는?”
“B704 번에 주차되어 있습니다.”
지유는 두 손으로 차 키를 건네주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제울, 경안구에서 지낼 곳으로 도원동 테크노밸리 모던 단지를 사들였습니다.”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제때 연락할게. 신분 노출되지 않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제울.”
영주혁은 손안에 든 키를 만지작거리며 B704로 향했다.
그곳에 가보니 90년대쯤에 출시된 듯한 산타나 한 대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품들이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미친…”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천괴에게 연락했다.
“이게 네가 준비한 차라고?”
천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세단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죠. 하지만 본부에 있는 차들은 전부 몇억씩 하는 차들이라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경안구 군사 기지까지 뒤져서 겨우 구한 차량입니다.”
“그럼… 4,000만 원 정도 하는 차를 알아볼 수도 있었잖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 차량을 구한다면 20분 내로 병원까지 도착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천괴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됐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시험 운전해 본 결과 승차감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요 이틀 내로 다시 새 차량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됐어. 시간 내서 내가 직접 사러 갈게.”
어이없는 채로 전화를 끊은 뒤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오후였고 가윤슬의 수술은 저녁쯤에야 끝날 것 같았다.
그는 우선 병원 근처에서 배를 채운 뒤 교윤태 할아버지를 모시러 다시 보육원으로 갈 셈이었다.
차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빨간불이 돼서 멈춰 서 있는데 BMW를 탄 남자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며 영주혁에게 말을 걸었다.
“대단하시네요. 이런 차를 타고 다닌다니, 교통경찰이랑 연줄이라도 있어요?”
영주혁은 예의를 차리듯 가식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무안한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길옆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최근 들어 유성 상인연합회의 다섯 그룹이 동시에 아벨 백화점에 제재를 가했고 그로 인해 아벨 백화점의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아벨 백화점의 CEO이자 미녀 기업가인 온나리는 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기자의 말과 함께 온나리의 사진이 대형 스크린에 나타났다.
온나리는 빼어난 이목구비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뼛속부터 귀티가 흘렀다.
영주혁의 시선은 그 사진에 붙박여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큰누나 관나리였다.
그녀는 온씨 집안의 사람에게 입양되어 온나리로 개명한 듯했다.
차를 길가에 세운 뒤 그는 천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벨 백화점의 CEO인 온나리를 조사해.”
잠시 뒤 천괴가 보낸 파일이 도착했다.
“온나리씨는 18살 때 온씨 집안의 도움으로 경안구의 경영학 과정을 수료했고 같은 해 온지후의 수양딸로 입양되었습니다. 온가네 주인인 온범준은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 온수찬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있고 그의 명의하에 있는 오성 그룹은 유성 상인연합회를 이룬 5대 그룹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은 모두 오성 그룹의 고위 임원이고요. 둘째 아들인 온지후는 친자녀는 없고 집안에서 지위가 아주 낮아 무시당한다고 합니다.”
핸드폰 파일 내용과 조금 전 봤던 뉴스를 연관시킨 영주혁은 눈동자에 한기가 서렸다.
“큰누나는 온수찬 가족들에게 당한 게 분명해. 안 봐도 비디오지. 분명 후계자 자리를 쟁탈하기 위해 수작질을 부린 걸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영주혁은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아벨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릴 적 큰누나인 온나리는 가장 따뜻하게 그를 대해주던 사람이었고 일곱 누나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