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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신을 비껴가다

  • “당연하죠!”
  • 가윤슬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 “저 사람들은 우리가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어려운 수술을 해서 경험을 쌓고 싶은 것뿐이죠. 자신의 승진을 위한 논문에 줄 하나 더하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 “알겠어요.”
  • 영주혁은 그녀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 “그렇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줄게요.”
  • “큰소리치지 마세요! 당신이 뭐라고 당신 마음대로 된다는 겁니까?”
  • 조규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 “이 병원 원장님이 저희 아버지세요. 그런 저도 당신만큼 거만하지는 않아요.”
  • 조규진의 눈치를 보던 주건학은 조규진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한 걸 보고는 미간을 구기며 호통을 쳤다.
  • “윤슬 선생, 얼른 이 사람 데리고 나가. 아니면 험한 꼴 보게 될 거야.”
  • 그의 적나라한 위협에도 가윤슬은 꿈쩍하지 않고 고집스레 수술실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문 건지 당장이라도 피가 흐를 것 같았다.
  • 영주혁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한탄했다. 둘째 누나의 쌀쌀맞고 고집스러운 점은 한결같았고 시간마저 그녀의 모난 부분을 닳게 하지는 못했다.
  • 영주혁은 조규진의 앞에 서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 “그렇게 심장 수술이 하고 싶어요?”
  • 조규진은 잠깐 흠칫하면서 동공이 떨렸지만 고상한 척하며 대꾸했다.
  • “의사라면 환자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을 겁니다.”
  • “알겠어요. 그렇게 심장 수술이 하고 싶으시다니 제가 그 소망 이뤄드릴게요.”
  • “그게 무슨…”
  • 조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주혁은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오른 주먹으로 주건학의 심장을 강타했다.
  •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큭!”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간을 구기고 있던 주건학은 순식간에 가슴께가 움푹 파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세상에나… 주 교수님…”
  •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깜짝 놀라면서 연신 뒷걸음질 쳤다.
  • 온화한 겉모습과 달리 영주혁은 무자비한 사람이었고 그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칼날처럼 서슬 퍼런 살기를 가까운 거리에서 느낀 조규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안색은 그가 입은 흰 가운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해져 있었다.
  • 조금 전 영주혁의 주먹에서 느껴지는 바람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순간, 사신을 비껴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 “심장 수술하고 싶다면서요?”
  • 입꼬리를 끌어올린 영주혁은 바닥에서 신음을 내뱉고 있는 주건학을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기 환자 한 분 생겼네요.”
  • 조규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져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은 보기 껄끄러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 그는 분한 듯 주먹을 말아쥐면서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 “주 교수님을 7층 수술실로 옮기세요.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영주혁은 가윤슬의 옆에 서면서 칭찬해 달라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얼른 들어가서 우리 수술해 주셔야죠. 수술 순조롭게 끝나면 저한테 밥 한턱내시는 거 잊지 말고요.”
  •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가윤슬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우리가 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 일이 한 단락되고 길게 숨을 내쉰 영주혁은 지유가 보낸 차량이 병원에 도착했을 거란 걸 뒤늦게 떠올렸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 주차장으로 향했다.
  •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검은색 옷차림을 한 지유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 지하 주차장의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영주혁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 “다음에는 이렇게 섬뜩한 차림으로 나타나지 마. 차는?”
  • “B704 번에 주차되어 있습니다.”
  • 지유는 두 손으로 차 키를 건네주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 “제울, 경안구에서 지낼 곳으로 도원동 테크노밸리 모던 단지를 사들였습니다.”
  •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제때 연락할게. 신분 노출되지 않게 조심해.”
  • “알겠습니다. 제울.”
  • 영주혁은 손안에 든 키를 만지작거리며 B704로 향했다.
  • 그곳에 가보니 90년대쯤에 출시된 듯한 산타나 한 대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품들이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 “미친…”
  •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천괴에게 연락했다.
  • “이게 네가 준비한 차라고?”
  • 천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 “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세단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죠. 하지만 본부에 있는 차들은 전부 몇억씩 하는 차들이라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경안구 군사 기지까지 뒤져서 겨우 구한 차량입니다.”
  • “그럼… 4,000만 원 정도 하는 차를 알아볼 수도 있었잖아?”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 차량을 구한다면 20분 내로 병원까지 도착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 말을 마친 천괴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됐는지 말을 덧붙였다.
  • “제가 시험 운전해 본 결과 승차감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요 이틀 내로 다시 새 차량 준비해드리겠습니다.”
  • “됐어. 시간 내서 내가 직접 사러 갈게.”
  • 어이없는 채로 전화를 끊은 뒤 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오후였고 가윤슬의 수술은 저녁쯤에야 끝날 것 같았다.
  • 그는 우선 병원 근처에서 배를 채운 뒤 교윤태 할아버지를 모시러 다시 보육원으로 갈 셈이었다.
  • 차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 빨간불이 돼서 멈춰 서 있는데 BMW를 탄 남자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며 영주혁에게 말을 걸었다.
  • “대단하시네요. 이런 차를 타고 다닌다니, 교통경찰이랑 연줄이라도 있어요?”
  • 영주혁은 예의를 차리듯 가식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무안한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 길옆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최근 들어 유성 상인연합회의 다섯 그룹이 동시에 아벨 백화점에 제재를 가했고 그로 인해 아벨 백화점의 주가가 폭락했습니다. 아벨 백화점의 CEO이자 미녀 기업가인 온나리는 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 기자의 말과 함께 온나리의 사진이 대형 스크린에 나타났다.
  • 온나리는 빼어난 이목구비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뼛속부터 귀티가 흘렀다.
  • 영주혁의 시선은 그 사진에 붙박여있었다.
  •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큰누나 관나리였다.
  • 그녀는 온씨 집안의 사람에게 입양되어 온나리로 개명한 듯했다.
  • 차를 길가에 세운 뒤 그는 천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아벨 백화점의 CEO인 온나리를 조사해.”
  • 잠시 뒤 천괴가 보낸 파일이 도착했다.
  • “온나리씨는 18살 때 온씨 집안의 도움으로 경안구의 경영학 과정을 수료했고 같은 해 온지후의 수양딸로 입양되었습니다. 온가네 주인인 온범준은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 온수찬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있고 그의 명의하에 있는 오성 그룹은 유성 상인연합회를 이룬 5대 그룹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은 모두 오성 그룹의 고위 임원이고요. 둘째 아들인 온지후는 친자녀는 없고 집안에서 지위가 아주 낮아 무시당한다고 합니다.”
  • 핸드폰 파일 내용과 조금 전 봤던 뉴스를 연관시킨 영주혁은 눈동자에 한기가 서렸다.
  • “큰누나는 온수찬 가족들에게 당한 게 분명해. 안 봐도 비디오지. 분명 후계자 자리를 쟁탈하기 위해 수작질을 부린 걸 거야.”
  • 그런 생각이 들자 영주혁은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아벨 백화점으로 향했다.
  • 어릴 적 큰누나인 온나리는 가장 따뜻하게 그를 대해주던 사람이었고 일곱 누나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당하는 걸 어찌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 제울의 무신인 그의 누나를 괴롭히다니, 상대는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