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혁은 정원으로 달려가 입술이 자줏빛이 된 백우리를 안아 든 뒤 교윤태와 함께 택시를 타고 경안구 상안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백우리와 함께 다급히 진찰실로 들어가는 의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 영주혁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여기 잠시만 계세요. 저 연락 좀 하고 올게요.”
“알겠어. 가서 일 봐.”
응급실에서 나온 뒤 영주혁은 조용한 곳을 찾아 구석 쪽으로 향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천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천괴, 차 한 대 준비해서 경안구 상안 병원으로 보내.”
보육원 입구에서 택시를 잡을 때 영주혁은 차가 없으면 아주 불편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어떤 차를 준비할까요? 세단, 오프로드, 슈퍼 카 아니면 리무진으로 준비할까요?”
“평범한 세단이면 돼. 너무 눈에 띄는 건 말고. 20분 안에 도착해야 해.”
“알겠습니다. 지유가 20분 내로 상안 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보낼 겁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등 뒤에서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비흡연 구역이에요. 담배 끄세요.”
“죄송합니다. 습관이라서요.”
영주혁은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쓰레기통 안에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두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는 더없이 싸늘했지만 순간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눈동자의 주인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수려한 자태는 감출 수 없었다.
“다시는 병원에서 흡연하지 마세요.”
얼음장처럼 쌀쌀맞게 구는 미인은 그를 호되게 꾸짖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만요!”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영주혁은 일부러 방정맞은 어투로 말했다.
“선생님은 어느 과세요? 그 과에서 진찰받을 수 있는 병에 걸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가 보육원을 떠날 때 일곱 명의 누나 중 가장 작은 누나가 13살이었으니 용모가 거의 정형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10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눈앞의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를 뿜어대는 의사는 그의 둘째 누나인 가윤슬이었다.
영주혁은 전장에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시련을 겪었었고 그로 인해 키나 피부색, 분위기 같은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펴봐야 겨우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가윤슬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10년간 그리워했던 남동생이라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가윤슬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장례지도사예요. 그래도 오고 싶으세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돌려 응급실로 향했다. 어쩐지 발걸음이 다급해 보였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 짓던 영주혁은 가윤슬이 커터칼을 들고 그의 복부를 열어보겠다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둘째 누나는 이제 당당하게 칼을 들 수 있었다.
응급실로 돌아와 보니 백우리는 이미 진료를 마쳐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할아버지, 우리 상태는 어떻대요?”
교윤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술해야 한대.”
“아, 참.”
교윤태는 무언가 떠올린 듯 영주혁에게 말했다.
“네 둘째 누나 가윤슬이 이 병원에서 일해.”
“아까 만났어요.”
영주혁은 미소를 띠며 말했고 교윤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다. 수술하는 데 열 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대. 난 다른 아이들도 보살펴야 하니 여기는 너희 둘에게 맡기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수술 마치면 제가 할아버지 데리러 보육원까지 갈게요.”
영주혁은 교윤태를 병원 문 앞까지 바래다주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수술실로 돌아왔다.
수실실 밖의 복도에서 의사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는데 다툼이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윤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제 동생이에요. 이 수술은 반드시 제가 집도해야 해요.”
금빛 테두리의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윤슬 선생, 마음이 급한 건 알겠는데 지금 환자는 나이가 너무 어려. 게다가 이건 보기 드문 선천적인 질환이야. 이 수술은 조규진 선생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네.”
옆에 있던 남자 의사는 ‘조규진’이라는 명찰을 가슴께에 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이렇게 어려운 수술은 제가 더 잘하잖아요. 윤슬 선생님, 수술 빼앗으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더 잘한다고요?”
가윤슬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수술 성공률이 어떤지 제가 굳이 얘기해야 하나요? 당신은 그저 보기 드문 난치병 수술을 맡는 걸 통해 승진하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저도 별말 안 했을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요. 당신 실력으로 진짜 이 수술을 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무슨…”
조규진의 표정이 굳었다.
“윤슬 선생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제가 어떤 신분인지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게다가 주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왜 그렇게 뺏으려고 난리예요?”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영주혁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 틈으로 걸어 나와 가윤슬의 앞에 서서 물었다.
“이 수술, 성공률이 얼마죠?”
가윤슬은 미간을 구기면서 그에게 쓸데없이 관여하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영주혁의 담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귀신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