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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무릎을 꿇거나, 죽거나

  • “막… 막았어?”
  • 영주혁은 웬만한 사람 허벅지만큼이나 두툼한 왕주원의 팔을 흔들림 없이 잡고 있었고 그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 얇고 마른 몸을 한 청년에게 이렇게 폭발적인 힘이 감춰져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 왕주원 역시 많이 놀랐는지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 그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지만 영주혁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어서 꿈쩍할 수 없었다.
  •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무슨 수로...”
  • 왕주원은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마음이 급했던 그는 다시금 주먹을 쥐고 영주혁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 그러나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영주혁은 전혀 움찔하지 않았고 더없이 침착했다.
  • 그는 왕주원의 오른손을 틀어쥔 채로 그의 왼팔을 앞자리 등받이에 누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 “또 다른 팔이 있으면 때려봐.”
  • 왕주원의 두 손은 교차한 채로 결박되어 있었고 마치 시멘트에 갇힌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 아무리 애를 써도 영주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정말 의외군. 나 왕주원이 상대의 실력을 보아내지 못하다니. 형씨, 좀 봐주지.”
  •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 영주혁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 “첫 번째는 당신 여자가 말한 대로 두 사람 다 창밖으로 던져지는 거고 두 번째는 여기 무릎 꿇은 채로 종착점까지는 가는 거야.”
  • 그 말에 왕주원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고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 지금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밖으로 던져진다면 몸이 으스러질지도 몰랐다.
  • 그러나 두 번째 선택지는 더더욱 싫었다.
  • “형씨, 좋게 좋게 해결해야 앞으로 사는 게 쉬워지지. 당신도 경안구로 가는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어쩌면 우리 또 만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 왕주원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은근히 그를 위협했다.
  • “당신은 앞으로 경안구에서 날 만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야 할 거야.”
  • 영주혁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덤덤히 대꾸했다.
  • “셋 셀 때까지 선택하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선택해주지.”
  • “이…”
  • 왕주원은 그가 자신에게 그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그에게는 그 말이 뺨을 맞는 것보다 더욱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 “셋.”
  • “둘.”
  • 영주혁은 그에게 고민할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목을 죄어오는 듯한 저주처럼 영주혁은 낮게 읊조렸다.
  • “사… 사과하겠습니다.”
  • 영주혁의 분위기에 압도된 왕주원은 숨조차 쉬기 힘들어 황급히 말했다.
  • “미안합니다. 여기 앉지 않을 겁니다.”
  • “하나.”
  • 영주혁은 무덤덤한 얼굴로 마지막 숫자를 내뱉었다.
  • “내가 말했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라고.”
  • 그 말과 함께 영주혁은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고 왕주원의 팔은 육안으로도 보아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빠각.”
  • 왕주원의 팔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순간 왕주원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차 안에서 재생되는 노랫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컸으며 마치 지옥에 떨어져 혀가 뽑히는 이의 비명처럼 절박하고 처절했다.
  • “악! 아파 죽겠네!”
  • 영주혁이 그를 놓아주자마자 왕주원은 팔을 끌어안으며 바닥에서 뒹굴었고 그 처절한 모습은 실수로 쥐약을 먹은 떠돌이 개처럼 보였다.
  • 처참하기 그지없지만 누구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듯 말이다.
  • “두…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게요…”
  • 지나치게 생생한 고통에 왕주원은 뒤늦게 깨달았다. 눈앞의 청년은 절대 그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무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짜 그를 창밖으로 내던질 수도 있었다.
  • 굳이 좋은 길 놔두고 힘든 길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왕주원은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서 일어났고 허겁지겁 영주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그리고 줄곧 그의 옆에 서 있던 요염한 여자는 형세가 좋지 않자 몸을 떨며 무릎을 꿇었고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했다.
  •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이 사라지자 영주혁은 싱긋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오랜만에 돌아와서 보는 고향의 풍경을 즐겼다.
  • “헉… 왕주원이 진짜 무릎을 꿇었어…”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천하의 망나니 왕주원이 무릎 꿇는 날이 다 오네…”
  • 영주혁은 왕주원과 여자를 철저히 무시했고 다른 사람들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에 왕주원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평생을 극악무도하게 제멋대로 살던 왕주원은 지금처럼 굴욕적인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 그는 경안구로 돌아가면 일단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을 모욕한 영주혁을 혼쭐 내주리라 속으로 맹세했다.
  • “승객분들은 소지품을 챙기시고 순서대로 하차해주시길 바랍니다.”
  • 정거장에 도착하자 왕주원은 허둥지둥 여자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렸고 그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던 영주혁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는 택시를 잡은 뒤 나임 보육원으로 향했다.
  • 나임 보육원은 경안구의 올드타운 구역에 있었는데 십수 년 동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거리의 풍경은 10년 전 그가 이곳을 떠났을 때와 별반 차이 없었다.
  • 영주혁은 녹이 쓴 대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문을 열자 ‘끼익’하는 쇳소리가 들려왔고 영주혁은 흥분에 겨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 “교윤태 할아버지, 누나들, 저 왔어요.”
  • 정원 안에는 마르고 작은 몸집을 한 아이들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개미를 관찰하고 있었다. 누군가 온 것을 확인한 아이들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 한 남자아이는 달리는 와중에 큰 소리로 외쳤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누가 왔어요!”
  • 잠시 뒤 흰색의 태극권 도복을 입은 노인이 낡은 건물의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흰 수염을 쓸어내리던 그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 “이놈들, 너희 때문에 낮잠도 편히 자지 못하겠구나.”
  • 다시 노인을 만난 영주혁은 순간 눈가가 시큰해지면서 목이 메어 그를 불렀다.
  • “교윤태 할아버지.”
  • 꼿꼿한 자태로 입구에 서 있는 청년을 보자 교윤태의 흰 수염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고 눈을 비비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넌… 넌 영주혁이 아니냐?”
  • “네, 저예요. 할아버지.”
  • 영주혁은 노인을 덥석 끌어안으면서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 돌아왔어요.”
  • “그래, 그래. 돌아왔으면 됐다…”
  • 교윤태는 영주혁의 단단한 등을 두드렸다. 뭔가 더 얘기하려는데 한 남자아이가 그에게 다가와 울먹이며 말했다.
  • “할아버지, 백우리가 쓰러졌어요!”
  • “큰일이구나. 그 아이는 심장이 좋지 않은데 아까 너무 격하게 놀아서 또 병이 도졌나 보다.”
  • 교윤태는 조급한 얼굴로 말했다.
  • “주혁아, 우선 그 아이부터 병원에 보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일곱 누나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