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누나들은 내가 지켜

누나들은 내가 지켜

햄스터마스터

Last update: 2023-01-06

제1화 일곱 명의 누나들이 날 기다려

  • D국의 제1요새, 제울섬.
  • 온통 어두운 황금색으로 칠해진 우뚝 솟은 건물의 정전 안, 영주혁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4대 천강과 8대 지살을 마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전쟁의 불길은 멈췄고 전쟁도 멎었으니 D국은 장차 10년간 평화로울 것이다. 그사이 난 경안구로 돌아가 당시 화재 참사를 조사할 테니까 이곳 일은 너희들한테 맡기겠다.”
  • 4대 천강과 8대 지살은 D국 12개 군사 기지의 봉강대리로 D국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 은빛의 갑옷을 입은 천괴가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 “전쟁의 불길이 멈춘 것은 사실입니다만 믿을 만한 소식에 근거하면 주변의 세 국가에서 D국으로 스파이를 보낼 것이라 합니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 영주혁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 “알고 있다. N국에서 1차로 보내온 스파이들은 이미 경안구에 잠입했다고 하더군. 이번엔 내가 직접 가서 그 암덩어리들을 처단할 것이다.”
  •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검은색의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는 그들의 옆에 서며 나긋하게 말했다.
  • “일곱 명의 누나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10년이나 지났으니 이젠 돌아가야지…”
  • 4대 천강과 8대 지살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10년을 봐왔지만 제울의 무신이 이토록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적은 처음이었다.
  • 영주혁은 뭇사람들을 둘러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 “천괴, 지유.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경안구로 갈 것이다. 남은 자들은 주둔지로 돌아가 변경의 동향을 수시로 살피며 명령을 기다리도록.”
  • “네!”
  • 일제히 대답한 그들은 스파이를 없애기 위해 섬을 떠나는 제울의 무신을 배웅했다.
  • 성운시에 도착하고 난 뒤 영주혁은 천괴와 지유에게 먼저 군용차를 타고 경안구로 향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본인은 버스에 올랐다.
  • 이번에 그가 경안구로 돌아오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 첫 번째는 17년 전의 화재 참사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당시 다섯 살 이었던 영주혁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는 불길 속에서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밧줄로 목이 졸라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 영주혁은 부모님을 죽인 그자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셈이었다.
  • 두 번째는 경안구에 잠입해 들어온 해외 스파이들을 섬멸해 적국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다.
  •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반드시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했다. 그리하여 그는 천괴, 지유와 미리 헤어져 홀러 버스에 올라탔다.
  • “이번 종착점은 경안구 도원동 테크노플라자 북부 터미널로, 총 두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니 승객분들께서는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안내음을 뒤로 하고 영주혁은 창밖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설레는 기분에 좀처럼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영주혁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다섯 살 때 그의 부모님은 무참히 살해당했고 그는 한 보육원으로 보내져 엄마 아빠가 다른 일곱 명의 누나들과 함께 살았다.
  • 열두 살이 되던 해, 영주혁은 자신이 충분히 컸으니 마땅히 부모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몰래 보육원에서 빠져나왔고 그때 한 남자를 만났다.
  • 그 남자는 영주혁을 양자로 삼은 뒤 그를 데리고 제울섬으로 갔고, 영주혁을 하나하나 가르쳐 그가 천하의 병력을 손에 쥔 제울의 무신으로 거듭날 수 있게 이끌어줬다.
  • 지난 10년간, 그는 수천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경험했고 전무후무한 공을 세웠지만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몇 번이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 그때 그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일곱 명의 누나가 그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 살아남아야만 고향으로 돌아가 일곱 누나를 만날 수 있고, 그래야만 그녀들의 보호막이 되어 과거 자신을 지켜줬던 것처럼 그녀들을 지킬 수 있었다.
  • 영주혁이 깊은 상념에 빠져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민머리의 남자가 몸매 좋은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그의 옆에 서며 거만하게 말했다.
  • “어이, 형씨. 이 자리는 내가 앉을 거니까 형씨는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아.”
  • 미간을 살짝 찡그린 영주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 “이건 제 자리입니다. 제가 왜 당신한테 양보해야죠?”
  • 여자는 빨간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 “당신 옆자리는 제 자리예요. 그리고 전 우리 주원 오빠랑 같이 앉아야 하니까 얼른 자리 좀 비켜주세요.”
  • “제가 안 비킨다면요?”
  • 영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선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 “두 분은 두 시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 죽기라도 하나요?”
  • “이 건방진 놈이…”
  • 남자는 화가 난 건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호통쳤다.
  • “당신 잘 모르나 본데 난 경안구의 왕주원이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경안구에 오자마자 어디 끌려가서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 왕주원이라는 이름을 듣자 그때까지 구경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경안구에서 난폭한 망나니로 유명한 왕주원은 2년 전 폭행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최근에야 풀려났다.
  • “주원 오빠, 이 사람 딱 봐도 여자랑 손도 잡아 본 적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 앉고 싶어 하죠.”
  • 요염한 자태를 뽐내던 여자는 영주혁을 향해 눈을 흘기더니 왕주원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 “저 사람이랑 쓸데없이 실랑이할 필요 없어요. 그냥 창밖으로 내던져 버려요.”
  • 왕주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여자의 볼을 꼬집더니 영주혁에게 위협을 가하며 말했다.
  • “당신도 들었지? 내 여자가 비키라고 하잖아. 셋 셀 때까지 안 비키면 진짜 밖으로 내던지는 수가 있어.”
  • “하나, 둘, 셋.”
  • 영주혁은 무심한 얼굴로 덤덤히 대꾸했다.
  • “제가 대신 셌으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 “이…”
  • 왕주원은 눈을 세모꼴로 떴고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 그는 지금껏 살면서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 “X발! 내가 못 할 것 같아?”
  • 왕주원은 사람들 가득한 곳에서 자신이 굴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곧장 영주혁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고 그 순간 차 안에 앉아있던 다른 승객들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왕주원이 주먹을 휘둘렀으니 상대는 최소 뇌진탕을 겪을 것이고, 만약 관자놀이를 강타당한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 “슉!”
  • 겁에 질린 사람들의 시선 아래, 영주혁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바람을 가르며 매서운 소리를 내는 왕주원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는 경멸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