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 백화점으로 향하면서 날이 어두워졌고 영주혁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 온가네 사람들이 누나를 그렇게 대하는 데 왜 그냥 참고만 있어? 누나 실력이라면 굳이 참지 않아도 되잖아?”
“예전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에 나한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어. 하나는 계속 학교에 다니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일을 시작하는 거였어.”
온나리는 운전하면서 기억을 떠올렸다.
“난 첫째니까 이기적이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나는 돈 벌어서 다른 애들 계속 학교 다닐 수 있게 뒷바라지할 셈이었어. 그렇게 지망 쓰는 날이 됐고 그때 지금의 내 양아버지께서 날 찾아왔어. 그분은 우리 담임 선생님의 오래된 친구였는데 내 사정을 알고서는 내가 대학 다닐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때 그분은 나한테 신 같은 존재였지. 날 절망의 늪에서 구해주신 분이었으니까.”
영주혁은 답답한 심정에 고개를 돌려 온나리를 바라봤다.
“다른 조건은 없었어?”
“없었어.”
오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자선가 같으셨어. 내가 상업 쪽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셨고 그래서 내가 가난 때문에 빛을 잃는 게 싫으셨던 거야.”
영주혁이 물었다.
“그래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거야?”
“맞아. 그분이 날 왜 도와주셨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분이 내 인생을 바꾼 건 사실이니까.”
온나리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은혜는 은혜고 원망은 원망이야. 난 온가네 사람들을 위해 20년 동안 일하거나 양아버지께 200억을 드릴 거라고 맹세했어. 그래야만 내 인생을 바꿔준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영주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고작 200억인데, 주면 그만이지.”
“뭐라고?”
온나리가 그의 말을 듣지 못해 다시 물으려는데 영주혁이 갑자기 허리를 펴고 앉으면서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길가에 차 세워줘.”
조금 전 그는 천괴에게서 N국 스파이의 행적을 찾아냈다는 문자를 받았다.
“왜 그래?”
온나리는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길가에 차를 세웠고, 영주혁은 곧바로 차에서 내리며 다급히 말했다.
“누나, 나 병원 못 갈 것 같아. 누나가 나 대신 할아버지 모셔다드려.”
“왜 그래, 주혁아? 무슨 일이야?”
“친구가 내 도움이 필요하대.”
영주혁은 아무렇게나 핑계를 댔다.
온나리가 계속 물을 것 같아지자 그는 얼른 말을 보탰다.
“남자 간의 일이야.”
온나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
온나리의 빨간색 BMW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영주혁은 천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상황이야?”
“보스, 조금 전 저희 쪽 비밀 연락원이 N국 사람 중 행적이 이상한 사람이 있다며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마 스파이인 듯합니다.”
“무슨 신분인데?”
“대학 교수인데 학술 세미나 때문에 D국에 왔다고 합니다.”
영주혁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잡아. 잘못 잡는 한이 있더라도 놓쳐서는 안 돼. 정확한 장소는 어딘데?”
천괴가 대답했다.
“북천로 예람 타운 45번 구역이라고 합니다. 지유가 사람을 데리고 그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근처니까 지유더러 날 기다리라고 해.”
영주혁은 택시를 불러 세웠다.
“기사님, 북천로 예람 타운으로 가주세요.”
지유와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람 타운 밖에서 영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제울섬 출신의 정예들이었다.
영주혁은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그늘진 곳으로 향했다.
“지유, 탐색은 끝마쳤어?”
지유는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듯이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교수 이름은 이케다 야스히라입니다. N국에서 아주 존경받는 학자라고 하더군요. 그가 D국에 1차로 잠입해 들어온 스파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예람 타운은 경비가 아주 삼엄해요. 등록한 인원과 차량만 들어갈 수 있어서 강제로 들어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괜히 경계만 강화될 수 있어.”
영주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돼서 1조는 세보플루란으로 경비원을 제압하고 2조는 모든 감시 카메라를 차단해. 3조는 밖에 남아서 대기하고 4조는 나와 함께 들어가서 사람을 잡을 거야.”
지유는 경악하며 말했다.
“제울, 직접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이건 첫 번째 목표물이야. 예상 밖의 일이 터진다면 앞으로 스파이를 찾아내는 게 더 어려워질 수 있어.”
...
달이 중천에 높이 걸렸고 영주혁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손짓했다.
“작전 개시.”
그의 명령에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조용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약 10분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감시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꺼지고 영주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진입한다.”
대문 쪽에 있는 경비실을 지나치자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1조가 안전하다는 손짓을 해 보였고 영주혁 일행은 순조롭게 입구를 통과했다.
가는 길 내내 아무런 일도 없었고 그들은 아주 순리롭게 45번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 안의 어느 방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이케다 야스히라는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듯했다.
“지유, 이 집에 저 사람 한 명뿐이야?”
“비밀 연락원의 말로는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알겠어. 문 열어.”
한 병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문을 따기 시작했다.
제울섬의 모든 정예군은 저마다 여러 가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문을 따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어린아이들 소꿉장난처럼 쉬운 일이었다.
“철컥!”
대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별장 안으로 진입했고 불빛의 방향을 따라 2층 서재 문 앞에 도착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재 안의 불빛이 어두운 복도까지 쭉 이어졌다.
문 앞에 서니 안에서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숨까지 참아가며 온 신경을 집중해 그를 잡으려고 할 때, 영주혁은 갑자기 머리털이 쭈뼛 서면서 뼈까지 시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기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