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아, 네 약혼자는 왜 아직도 안 온 거냐? 걔 얼굴 못 본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다.”
“할아버지, 강훈씨는 조금 전에 집안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와서 일 처리하느라 조금 늦게 도착할 거 같아요.”
“그래…”
온범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씨 집안은 대가족이니 처리할 일도 많겠지. 그럼 우리는 걔가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리자꾸나. 강훈이 온 다음 식사하자고.”
영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작자길래 이 정도 대우를 해주는 거야? 온씨 집안의 열이 넘는 사람들이 전부 그 사람을 기다린다고?’
바로 그때 온범준은 영주혁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자네는…”
온나리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할아버지, 얘는 보육원에 있던 제 동생이에요.”
“그리고 미래 남편이기도 하죠.”
영주혁은 바로 말을 보탰다.
“장난치지 마.”
온나리는 테이블 밑으로 그에게 살짝 발길질했다.
“그래?”
온범준은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영주혁을 훑어보더니 온나리를 꾸짖기 시작했다.
“어쩐지 최근 들어 아벨 백화점의 실적이 자꾸 떨어진다 싶었는데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연애질해서 그랬던 거구나.”
“할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유성 상인연합회가…”
그녀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온기욱이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온나리. 적당히 해. 네 창업 자금은 우리 집안에서 대준 거야. 그런데 네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딴짓만 하는 걸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겠어? 그러니까 얼른 아벨 백화점 내놔.”
다른 친척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능력이 없으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정말 낯짝 두껍긴.”
“우리 집안 산업은 당연히 온가네 사람이 장악해야지. 네가 아무리 온씨 성을 가지게 됐다고 해도 결국엔 피도 안 섞인 외부인이야.”
“당신들…”
온나리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목청을 높였다.
“아벨 백화점은 제 피와 살을 갈아서 일으켜 세운 회사예요. 온씨 집안에서 창업 자금을 대준 건 맞지만 그때 그 빚 저는 오래전에 다 갚았어요.”
“됐다!”
온범준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다들 입 다물어!”
분위기는 삽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그때 준수한 외모의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부쉈다.
그는 온화하고 우아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
그가 나타나자 온가네 사람들은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저 사람이 바로 온아름의 약혼자, 위씨 집안의 도련님 위강훈이래.”
“금방 유학하고 돌아왔다던데 아주 앞길이 창창하다고 하더라.”
“세상에나, 위씨 집안이라면 경안구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이잖아. 온아름이 이렇게 좋은 집안과 연줄을 맺다니, 생각지도 못했어.”
위강훈은 부러움에 찬 시선들을 즐기며 턱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온아름의 옆에 자리를 잡더니 예의 바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집안에서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고 하길래 좀 늦었습니다. 여러분들을 기다리게 했네요.”
온수찬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당연히 우리 사위를 기다려야지.”
온범준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강훈아, 대체 무슨 급한 일이었는지 우리한테 얘기 좀 해줄 수 있겠니?”
온범준은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위강훈이 지각한 것에서 남다른 기운을 느꼈다.
위강훈은 돌연 표정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늘 오전, 한 대기업이 경안구에 2조 원이라는 거액을 자본금으로 내 사업자등록을 했고 도원동 테크노밸리를 사들여 사업소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이 협력 프로젝트를 몇 개 내놨는데 그중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출셋길에 오르는 격이죠. 어쩌면 경안구가 아니라 성운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 될 수도 있어요.”
“헉!”
테이블에 앉아있던 뭇사람들은 헛숨을 들이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본금이 2조 원이라고?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통이 큰 거야?”
위강훈은 선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제울그룹이라고 하더군요. 실력이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온범준은 많이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우리 손녀사위. 우리 집안도 그 협력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까?”
“그건…”
위강훈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허세를 부리며 대꾸했다.
“제울그룹에서 요 이틀간 협력 프로젝트 공모전을 한다고 합니다. 저희 집안에서 도와준다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잘됐네!”
주름이 가득한 온범준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만약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자네 장인어른의 오성 그룹에 16억 원을 지급해 제울그룹과의 협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네.”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온수찬과 온기욱 두 사람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고, 그와 반대로 온지후와 강서연의 안색은 한없이 어두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가네 모든 재산이 온수찬 가족의 손에 들어갈 것 같았다.
온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말했다.
“할아버지, 16억이라 하셨어요? 그 돈은 어디서 나신 거예요? 설마 또 아벨 백화점 보고 내라는 건 아니겠죠?”
온범준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벨 백화점은 우리 온가네 산업이야. 돈 좀 내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까요. 제울그룹하고 협력할 수만 있다면 아벨 백화점을 팔 수도 있는 거죠.”
온아름은 같잖다는 듯이 온나리를 흘겨봤다.
“내가 보기에 넌 우리 오성 그룹을 질투하는 것 같은데. 내 약혼자가 너한테 빌붙어 사는 기생오라비보다 능력 있어서 질투하는 거잖아.”
“너…”
온나리는 이를 악물었고 화가 나서 호흡이 거칠어졌다.
온가네 사람 중 그녀를 진짜 존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사실에 온나리는 분통이 터졌다.
영주혁의 얼굴에 언뜻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감히 제울의 무신인 자신의 누나를 욕보이다니,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누나, 그 일은 나한테 맡겨요.”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온가네 사람들을 쭉 둘러봤고 그의 시선은 온범준의 몸에 멈췄다.
“저랑 내기하실래요?”
“넌 뭐야? 감히 우리 아버지와 내기하겠다니, 겁도 없이!”
온수찬은 탁자를 내리치며 욕했고 온나리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얘기했다.
“주혁아, 이 일은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