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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조여오는

지독하게 조여오는

박규리

Last update: 2023-12-26

제1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 “그게… 제가 먼저 옷을 벗고 침대로 갈까요, 아니면… 먼저 벗겨드릴까요?”
  • 소서영은 샤워 타월을 두른 채 욕실 문 어구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 오늘은 그녀의 첫날 밤이다.
  • 멀리 휠체어에 앉아 눈을 검은 비단으로 가리고 있는 그 남자는 앞으로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다.
  • 그와의 첫 만남이지만 본인이 사진보다 훨씬 잘 생겼다.
  • 남자는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콧대가 높고 짙은 눈썹에 훤칠한 키를 하고 있어 그녀가 꿈에 그리던 남신의 모습이었다.
  • 아쉽게도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님이었다.
  • 누군가 민시혁은 태어날 때부터 재수가 없어서 9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게 하고 13살 때 누나를 죽게 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연속 세 명의 약혼녀를 죽게 만들었다 했다.
  • 이런 소문을 들은 소서영도 처음에는 두렵기 그지 없었다.
  • 하지만 삼촌은 그녀가 시집만 가면 민 씨 집안에서 할머니의 병을 치료해줄 돈을 댈 거라고 했다.
  • 할머니를 위해 그녀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 남자가 반응이 없자 소서영은 그가 듣지 못한 줄 알고 다시 한번 반복했다.
  • “하.”
  • 차갑고 고귀해 보이는 남자가 눈을 가린 천을 천천히 풀고 차갑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 “네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는 알아?”
  • 그의 차가운 눈빛에 소서영은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두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는 장님이잖아!
  • 그런데 장님 저렇게 깊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을까?
  • 장님을 본 적 없는 소서영은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 “알아요.”
  • 남자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 “죽는 게 두렵지 않아?”
  •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자 그는 더욱 고고하고 차가워 보였다.
  • 소서영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 “두렵지 않아요.”
  • 그녀는 그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당신이 할머니를 구해주셨기에 당신은 저의 은인이에요. 전 꼭 약속을 지켜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주고 평생 돌봐줄 거예요!”
  • 여인의 작고 예쁜 얼굴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 민시혁은 묵묵히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 잠시 뒤 그는 비웃으며 말했다.
  • “그렇다면 나를 씻겨줘.”
  • 소서영은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
  • “좋아요.”
  • 그녀는 민시혁에게 시집 가겠다고 민할아버지에게 약속을 한 뒤로 후회한 적 없었다.
  • 결혼 등기까지 한 그녀는 정정당당한 그의 아내였다.
  • 남편이 장애인이니 아내가 그를 돌보며 목욕을 시켜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 “목욕물 받으러 갈게요.”
  • 말을 마친 그녀의 작달막한 몸이 욕실로 들어갔다.
  • 민시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굳게 찌푸렸다.
  • 그도 사람을 보내 그녀를 조사해 보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 이 여자의 자료는 심플하기 그지없었는데 시골에서 온 가난한 계집애가 가족의 병원비를 위해 명성이 바닥에 떨어진 재수 없는 그에게 기꺼이 시집오겠다고 한 것이다.
  • 이전의 세 약혼녀는 전부 a시 상류사회의 유명인사로 집안이 부유하고 배경도 탄탄했다.
  • 하지만 그녀들 전부 다 결혼식 전날 밤 누군가에 의해 암살 당했다.
  • 멍청하고 단순한 소서영은 뜻밖에도 그와의 첫날밤까지 무사히 살아있다니?
  • 그녀가 너무 바보 같아서 손을 쓸 필요도 없거나, 아니면 그녀가 멍청한 척 하고 있는 것이다.
  • 민시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든 순간 검은색의 눈동자에 경이로움이 드러났다.
  • 욕실에서 자욱한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 수증기에 젖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쇄골 사이에서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 몸에 감겨 있던 타월은 이미 젖은 채 그녀의 몸에 달라 붙어 영롱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 “잠시만 기다려요.”
  •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침대 밑에 있던 캐리어를 꺼내어 열었다.
  • 캐리어의 한쪽에 그녀의 속옷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 그녀는 흰색의 레이스 세트 하나를 꺼내 라벨을 뜯었다.
  • 아마 민시혁이 장님이라고 생각해서인이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 모든 과정을 그의 눈 앞에서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 이토록 단순한 행동도 한 남자의 눈에는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닐까 싶게 만들었다.
  • 이 계집애 그가 정말 장님인지 테스트해보는 거야?
  • “후~”
  • 속옷을 입은 소서영이 걸어와 자연스럽게 민시혁의 휠체어를 욕실 문 어구로 밀고 갔다.
  • 민시혁을 부축해 욕실로 들어간 뒤 그녀는 그의 옷을 한벌 한벌 벗기기 시작했다.
  • 짙은 수증기를 사이에 두고 민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 소서영은 고개를 떨군 채 집중한 표정이었는데 맑고 깨끗한 두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고 마치 수업을 듣는 듯 진지했다.
  • 그의 시계를 풀고 셔츠를 벗겼다. 그리고…
  • 그리고, 마지막 방어선에서 소서영은 약간 어색하게 손을 움츠렸다.
  • “저기… 이거 입고 씻을 수 있어요?”
  • 그녀를 살펴보는 민시혁의 눈동자에 사악함이 드러났다.
  • “이거 입고 있으면 어떤 곳은 씻을 수 없어.”
  • “음… 그렇겠네요.”
  • 소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손을 내밀었다.
  • 민시혁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 그녀의 진지한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는 그의 미간은 줄곧 굳게 일그러져 있었다.
  • 이 여자는 정말 바보인 거야, 아니면 바보인 척 하는 거야?
  • 부끄러움이 뭔지 몰라?
  • “여기 욕조에 들어가세요.”
  • 소서영은 남자의 몸에서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보지 못한 듯 진지하게 민시혁을 부축해 욕조에 들어가게 했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그녀는 얼굴을 두드리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그에게 물었다.
  • “많이 아파하지는 않죠?”
  • “응.”
  • 소서영은 젖은 귀밑머리를 귀 뒤에 걸고 몸을 돌려 캐비닛을 뒤적거렸다.
  • 잠시 뒤 그녀는 거친 때밀이 수건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 민시혁 이마의 핏줄이 저도 모르게 튀어 올랐다.
  • 지금 첫날 밤에 그에게… 때를 밀어주려 한다?
  • 소서영은 그의 의견을 전혀 묻지도 않고 손을 들어 그의 등부터 밀기 시작했다.
  • “아프면 얘기해요, 살살 할게요.”
  • 민시혁: “…”
  • 소서영은 아주 열심히 아주 진지하게 밀었다.
  • 민시혁에게 시집 오기전 그녀는 허약하고 병든 할머니를 오랫동안 돌봤다. 할머니는 그녀가 이렇게 목욕시켜 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매번 때를 밀고 나면 편안해서 잠도 달게 잘 수 있다고 했다.
  • 때문에 소서영은 민시혁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녀는 욕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때수건으로 그의 모든 피부를 열심히 밀었다.
  • 비록 힘을 다하긴 했지만 민시혁 에게는 그저 간지럼을 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 진지함을 보아낼 수는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이마에 땀이 한층 맺혔다.
  • 민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자신이 그녀를 괜히 탓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이토록 바보같이 단순한 계집애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 “저기.”
  • 그의 다른 곳을 다 씻겨준 소서영이 얼굴을 붉히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 “이것도 씻어야 해요?”
  • 민시혁은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 “네 생각에는?”
  • 소서영은 작은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 “역시… 씻어야겠죠.”
  • 그녀는 때수건을 든 손으로 그곳을 향했다.
  •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정확하게 잡았다.
  • 순간 공기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 소서영은 자신이 때수건으로 만지면 민시혁의 그것이 망가질 거라 생각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순수한 눈으로 물었다.
  • “날 잡고 있으면 어떻게 씻어요?”
  •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서늘함이 스쳐지나갔다.
  •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