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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 당이함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소서영의 곁에 서있는 민시혁이 내뿜는 분위기가 험악해 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 입술을 깨문 당이함이 낮은 목소리로 소서영에게 안녕을 고한 다음 그 곳을 떠났다.
  • 학교에서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민시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소서영은 몇 번이나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 별장으로 돌아온 소서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찢겨 진 증서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는 일이었다.
  • 찢어진 증서들을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은 그래도 수월했다.
  • 하지만 이미 절반이 넘게 타버린 할머니의 카드는 다시 되돌리기가 어려울 듯 보였다.
  • 책상 앞에 앉아 찢어질 듯 아픈 마음으로 불에 타버린 사진첩을 보면서 소서영은 마음 속으로 민규한을 향해 수도 없이 많은 욕을 퍼부었다.
  • 실컷 욕을 퍼부은 그녀가 막 사진첩을 닫으려 했을 때, 카드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
  • 카드를 주워 사진첩에 끼워 넣으려던 그녀는 카드에 숨겨진 층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속에는 오래된 남자 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 사진은 불에 조금 그을려 있었다.
  • 한참이나 카드를 살펴보던 소서영은 기억 속에 이런 남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했고 조심스레 다시 사진을 사진첩에 넣어 두었다.
  • 기회가 있다면 할머니에게 왜 그녀에게 주었던 카드 속에 다른 사람의 사진이 있냐고 물어볼 것이다.
  •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나니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 문 밖에서 이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 “사모님, 어르신께서 사모님과 회장님에게 함께 본가에 들르라 전화하셨어요. 준비하시죠.”
  •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저녁 여덟 시가 되어 있었다. 민 어르신께서 이 시간에 그들을 집으로 부른다고?
  • 소서영의 마음 속에 불안한 예감이 싹텄다.
  • 소서영이 옷을 갈아 입고 내려왔을 때 민시혁은 이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할아버지께서 이 늦은 밤에 부르시는 건…오늘 있었던 민규한의 일과 연관이 있을까요?”
  •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 “그럴 거야.”
  • 민시혁의 낮은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 “민규한이 상처를 입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널 탓할 거라 말 했잖아.”
  • 말을 마친 그가 고개를 돌렸고 검은 비단에 쌓인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 “무서워?”
  • “아니요.”
  • 소서영이 고개를 저었다.
  •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은 그저 잘잘못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거야.”
  • 민시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 “소서영, 네 세상엔 그저 옳고 그름으로 간단하게 나뉘어져 있는 거야?”
  • 소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옳은 게 아니라면 잘못된 거고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옳은 거죠. 이 세상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 “선생님께서 시험을 볼 때는 아무도 네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채점을 하는 선생님은 그저 최종적인 결과만 볼 뿐이래요. 맞는 건 맞는 거고 틀린 건 틀린 거죠.”
  • 단순한 나머지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대답이었다.
  • 아니, 어쩌면 그녀는 정말 때묻지 않은 아이일지도 몰랐다.
  • 가볍게 한숨을 내 쉰 민시혁이 손을 뻗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 “너 같은 성격도 아주 귀한 거지.”
  • 그의 말이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판단이 가지 않았던 소서영은 마음 속에 담아둔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아주 빨리, 차는 민 씨 본가에 도착했다.
  • 이미 저녁 아홉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평소라면 이미 민 씨 저택에 불이 꺼졌을 시각이었으나 오늘은 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소서영이 민시혁의 휠체어를 밀고 본가에 도착했을 때 붕대를 감은 가슴팍을 움켜 쥔 민규한은 소파에 누워 황루루가 먹여주는 과일을 받아먹고 있었다.
  • 소서영이 들어온 것을 본 민규한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할아버지, 제 편을 들어 주셔야 해요…”
  • 황루루도 울음을 터뜨렸다.
  • “아버지, 재수없는 계집이 왔네요. 우리 규한이 편을 들어 주셔야 해요…”
  • 과장된 몸짓으로 울부짖는 두 사람은 사극에서 억울하다 울부짖는 배우들 못지 않은 모습이었다.
  • 그때 민 어르신은 곁에 있는 바둑판 앞에 앉아 민동철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모자가 울부짖기 시작하자 생각이 흐트러진 민 어르신이 삐끗하여 잘못된 수를 두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민동철에게 지고 말았다.
  • “제가 또 이겼네요.”
  • 가볍게 웃은 민동철이 민 어르신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었다 귀띔해 주었다.
  • “아버지, 시혁이와 서영이가 왔으니 해야 할 일을 하셔야죠.”
  • 민 어르신이 고개를 들어 민시혁의 휠체어를 밀고 집으로 들어서는 소서영을 보고는 미세하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 몸을 일으킨 민 어르신이 우뢰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따라 오거라.”
  • 민 어르신은 그들을 이끌고 2층의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 집사가 방 문을 열었을 때 소서영은 그제서야 이 방이 아주 커다란 사당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방 안에는 수많은 신주들이 모셔져 있었다.
  • “소서영.”
  • 어르신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 “네.”
  • 대답을 한 소서영이 휠체어를 쥐고 있던 손을 내려 놓았다.
  • “이리 와서 무릎을 꿇어라!”
  • 민 어르신이 그의 곁에 놓인 방석을 가리키며 매섭게 말했다.
  • 소서영은 어르신이 무슨 까닭으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르신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얌전하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 무릎을 꿇은 그 순간, 소서영은 아주 분명하게 황루루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 “탁--!”
  • 다음 순간, 곁에 서 있던 집사가 회초리를 꺼내 소서영의 등을 향해 매섭게 내리쳤다.
  • 살가죽을 에이는 듯한 통증에 소서영은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 입술을 깨문 소서영이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할아버지,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요?”
  •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 곁에 있던 황루루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높아졌다.
  • “네가 먼저 우리 규한이를 꼬셨잖아, 규한이가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니 그를 다치게 만들었고!”
  • 황루루가 이를 악물었다.
  • “시혁이와 결혼을 하자 마자 시혁이의 사촌 형님을 유혹하려 하다니. 그러고도 뻔뻔하게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말을 내뱉어!?”
  • 소서영이 살을 에이는 아픔을 참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 “숙모님, 제가 민규한을 유혹했다는 증거가 있으세요?”
  • “증거가 필요해?”
  • 황루루가 콧방귀를 뀌었다.
  •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규한이를 위해 증인이 돼 줄 수 있어!”
  • 황루루가 싸늘한 눈빛으로 회초리를 들고 있는 집사를 쳐다보았다.
  • “뭘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때려요!”
  • 그 말을 들은 집사가 또 다시 회초리를 내리쳤고 “짝--!”하는 소리와 함께 회초리가 소서영의 등에 내려앉았다.
  • 두번의 매질이 끝나고 나니 소서영이 입고 있던 흰색의 티가 찢어져 벌어진 상처를 내보이고 있었다. 매를 든 집사가 평소보다 더욱 독하게 매질을 한 게 분명했다.
  •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서영은 피하지도 않고 독한 매질을 견뎌내고 있었다.
  • 그녀가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 “전 민규한을 유혹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않았어요.”
  • “아직도 억지를 부리다니!”
  •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던 황루루는 고개를 돌려 회초리를 들고 있는 집사를 쳐다보았다.
  • “계속 해!”
  • “잠깐만.”
  • 집사가 세번째 매질을 시작하려는 찰나,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민시혁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 “할아버지께서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매질을 하다니.”
  • “집사는 도대체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건가, 아니면 숙모님의 명령을 따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