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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잠꼬대를 하며 스스로 걸어 들어온 거야

  •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남자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입술을 말아 문 소서영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검사는…”
  • “돌아가서 다시 하지.”
  •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거친 숨을 내쉬었다.
  • “사실 방금 전은 억지로 괜찮은 척한 거예요…”
  • “그리 건장한 사람과 싸워 이기진 못할 거예요. 그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만큼의 재주도 제게는 없고요.”
  • 소녀가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시선이 벌거벗은 자신의 두 발로 향했다.
  • “네… 하지만 전 당신을 데리고 도망을 칠 수는 있죠.”
  • “달리기는 꽤 빠른 걸요.”
  •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앞으로 계속 날 데리고 도망을 칠 생각이야?”
  • “네.”
  •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다른 생각이 든 건지 다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 “계속해서 도망치지는 않을 거예요. 언젠가 제가 강해진다면 그땐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요.”
  • 달빛을 빌어 민시혁이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웃었다.
  • “그래, 네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릴게.”
  • “네!”
  • 두 주먹을 꼭 쥔 어린 소녀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 소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탁탁 때리더니 어두운 도로를 보며 말했다.
  •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 그녀가 신었던 하이힐은 방금 전 사람을 때릴 때 무기로 사용되었고 맨발로 휠체어까지 밀면서 멀리 떨어진 집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다.
  • 휠체어에 앉아있던 남자가 웃었다.
  • “눈 감고 열까지 세어 봐. 그럼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 낼 테니.”
  • 소서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농담을 하고 있어요.”
  • “내가 농담을 하는 건지는 해 보면 알 것 아냐.”
  •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 입을 삐죽 내민 소녀가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얌전하게 눈을 감고 수자를 세기 시작했다.
  • “일, 이, 삼…”
  • 달빛 아래에서 소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얼굴처럼 맑고 깨끗했다.
  • 빛이 스며드는 검은 색의 비단 넘어 민시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 지금 그의 시선이 얼마나 부드러운 지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 “팔, 구, 십!”
  • 열까지 센 소서영이 눈을 떴다.
  •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 때문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몇 초 뒤, 라이트를 켜고 달려온 차량이 그녀와 민시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 차 문이 열리고 주 기사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 “늦었습니다.”
  • “너무 늦진 않았어.”
  • 남자가 덤덤하게 웃었다.
  • “하지만 일초만 더 늦었더라면 월급 깠을 거야.”
  • 소서영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 그를 부축해 차에 오르면서 소서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주 기사님께 데리러 오라 연락을 하셨군요.”
  • 그가 느릿느릿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 “장님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지.”
  • 그가 항상 자신을 “장님”이라 칭하는 것이 듣기 싫었던 소서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곁에 앉았다.
  • 차의 시동이 걸렸다.
  • 어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소서영은 가죽 시트에 기대 앉아 가볍게 흔들리는 차량의 움직임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버렸다.
  • 잠결에 그녀는 누군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나누는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 “계속 자게 깨우지 마.”
  • “하지만…”
  • 그리고 잠시 뒤, 소서영은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안긴 것처럼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리고 그녀는 따듯하고 편안한 품에 안겼다.
  • 박하처럼 시원한 남자의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혔고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져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아마…꿈이겠지.
  • 시원한 민트향이 나는 특별한 남자의 체취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 아마, 꿈일 테지.
  • 꿈 속에서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올린 남자가 그녀를 편안한 침대에 눕혔다.
  •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 “바보.”
  •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소서영은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게 느껴지면서도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 햇빛에 조금 눈이 부셨다.
  •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신혼 방의 침실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어제 밤 있었던 일을 상기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 기억은 그녀와 민시혁이 주 기사의 차에 앉아 본가에서 돌아온 시점에서 멈춰 있었다.
  • 차 안에서 잠이 쏟아졌던 탓에 그녀는 잠시 눈을 붙였다.
  • 그리고…아침까지 잠들어 버렸다고?
  • 어떻게 차에서 침실까지 온 거지?
  • 설마…
  • 어제 밤 꾸었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 아니, 그럴 리가 없지.
  • 얼른 고개를 저은 그녀가 사실일 리 없는 가설을 지워버렸다.
  • “깼어?”
  • 낮고도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멈칫한 소서영이 얼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 마침 민시혁의 깊고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진 소서영이 얼른 얼굴을 돌렸다.
  • 도대체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의 눈빛이 왜 이토록 날카로운 거야!
  • 하지만 그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 하여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 “깼어요?”
  • “응.”
  • 그녀의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 “어제 밤에 잠을 잘 못잤어.”
  • 소서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 “왜요?”
  • 그녀는 어제 밤 아주 깊은 잠을 잤는데!
  • 남자는 조금 원망스러운 듯 입을 열었지만 그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 “네가 코를 골아서.”
  • 소서영: “…”
  •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 “어제 밤 제가 어떻게 침실까지 온 거예요?”
  •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 “몽유를 하면서 혼자 걸어 들어왔지.”
  • 소서영: “…”
  • 소서영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어제 밤 그녀가 코를 골았다는 사실도 진짜가 아닌 것 같은데.
  • 몽유까지 했다고?
  • “전 종래로 몽유는 해 본 적이 없는 걸요.”
  • 건장한 신체의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거버렸다.
  • 소서영은 닫힌 화장실의 문을 향해 매섭게 눈을 치켜 떴다.
  • 몸을 일으킨 그녀는 구깃구깃해진 드레스를 벗고 깨끗한 청바지와 흰 티로 갈아입었다.
  • 막 옷을 갈아입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당이함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든 당이함의 목소리는 몹시 급박했다.
  • “레몬아, 빨리 여기로 와야겠어!”
  • “누군가 학교로 와서 네 교과서와 노트를 찢고 불태우고 있어!”
  • 소서영의 눈 앞이 새카매졌다.
  • “뭐라고!?”
  •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A시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몹시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특별히 공공 자습실에 자리를 하나 맡아 두고 모든 학습 자료와 필기들을 그곳에 놓아두고 있었다.
  • 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이 모두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째서 누군가 그녀의 책을 찢고 불태우는 거지?
  • “아무튼 빨리 와! 늦으면 되돌릴 수조차 없을 것 같아!”
  • 통화를 끝낸 소서영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 그 때, 민시혁은 소파에 기대 앉아 차를 마시며 주 기사가 읽어주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 그녀가 달려 나오는 모습을 본 그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뭐가 그리 급해.”
  • “지금 당장 학교로 가 봐야겠어요. 일이 생겼어요!”
  • 소서영이 다급하게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갈아 신었다.
  • “주 기사님이 절 학교로 데려다 주실 수 없을까요? 급한 일이라서요.”
  • 지금 시간대엔 택시를 잡기도 어려울 것이다!
  • “가 봐.”
  • 남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 신문을 내려 놓은 주 기사가 큰 보폭으로 소서영을 따라 집을 나섰다.
  • “회장님.”
  • 소서영이 떠나고 백 집사가 다가왔다.
  • “민규한이 사모님의 학교로 갔다고 방금 전 본가에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 민시혁이 냉소를 지었다.
  • “차 준비시켜.”
  • “사모님의 학교로 가실 건가요?”
  • “그래.”
  • “하지만…”
  •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던 백 집사는 다시 입을 닫았으나 결국 다시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 “회장님, 우리의 계획 상 아직 민규한과 정면 충돌할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비단을 벗어버린 민시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 “내 아내에게 마수를 뻗고 있는데 무슨 계획이 더 필요해?”